1장
나와 청소년문학 20년
청소년 문학 20년을 돌아본다
내 또래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977년에 〈나의 20년〉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콧수염을 기른 장계현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다.
동녘에 해뜰 때, 어머님 날 낳으시고
귀엽던 아가야, 내 인생 시작됐네
열두 살 시절엔 꿈 있어 좋았네
샛별의 눈동자로 별을 헤던 시절
커피를 알았고 낭만을 찾았던
스무 살 시절에 나는 사랑했네
너밖에 몰랐고 너만을 그리며
마음과 마음이 주고 받던 밀어密語
그러나 둘이는 마음이 변해서
서로가 냉정하게 토라져 버렸네
새파란 하늘처럼 그렇게 살리라
앞날을 생각하며 인생을 생각하리
요즘 청소년문학을 떠올리면 엉뚱하게도 이 노래가 덩달아 떠오른다. 아마도 내가 쓴 『봄바람』이 발표된 지 20여 년이 되어서 제목이 〈나의 20년〉인 이 노래가 저절로 입에 맴도는 모양이다. 20년은 강산이 두 번 변할 만큼 긴 세월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세월 동안 청소년문학 판을 보자면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에 사회의 다른 분야도 변화가 많았지만, 청소년문학가인 내 처지에서 보면 청소년문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실로 ‘감개무량’이다. 그도 그럴 것이 『봄바람』이 나온 뒤 거의 10년 동안은 나 혼자서 청소년문학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는 다른 작가들이 청소년문학에 관심을 많이 두어 덜 외로웠고 내 어깨가 많이 가벼워졌다.
하여간 〈나의 20년〉이라는 노래의 한 대목처럼 나는 지난 스무해 동안 “너밖에 몰랐고 너만을 그리며” 살았다. 물론 ‘너’는 청소년문학이다. 처음 10년은 외로웠지만 점차 외롭지 않게 된 나중 10년. 나의 외로움을 덜어 주고 내 어깨를 가볍게 해준 다른 작가들의 책을 살짝 돌아본다.
사계절1318문고, 청소년문학의 시작
『봄바람』이 사계절출판사의 ‘1318문고’로 나온 해는 1997년이다. 1997년은 외환위기가 닥쳐 IMF에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이 시작된 해다. 웬만한 국영기업은 다 민영화했고, 괜찮은 기업은 외국 자본에 팔아넘겼으며, 직장에서는 ‘명예퇴직’ 칼바람이 불었다. 내 또래 역시 직장에서 막 중견으로 일할 나이인데 불명예스러운 ‘명예퇴직’, 즉 ‘명퇴’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해야 했다. 그래서 그때 받은 명함엔 전화번호가 ‘○○○-5292’가 많았다.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으로 오리구이 식당을 많이 차려 전화번호도 ‘오리구이’와 소리가 비슷하게 ‘5292’를 많이 썼기 때문이다. 오리구이집이 유행하던 때라 오리구이 식당을 많이 차렸지만 금세 거의 망해 나갔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퇴직금만 날리고 망연자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절이었다.
그런 시기에 나는 『봄바람』을 펴냈다. 처음엔 회고조니 옛날 이야기니 하는 말을 참으로 많이 들었다. 사람들은 옛날이 더 살기 좋았다고 “아! 옛날이여!”를 입에 달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봄바람』에 대해선 옛날 이야기라서 현재성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소설에 보편적인 것이 들어 있으면 그만이지, 옛날 이야기, 오늘 이야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IMF사태를 맞이했다는 건 우리 경제가 마침내 성장이 끝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경제는 성장이 끝났지만 육체와 정신이 같이 성장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겐 끝난 게 아니었다.
1997년에 『봄바람』을 출간하였지만 다음 해인 1998년에도, 또 그다음 해인 1999년에도 다른 작가의 청소년 소설이 나오지 않았다. 1999년은 20세기의 가장 끝에 있는 해였다. ‘세기말’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해였다. 1999년만 지나가면 2000년, 즉 21세기라는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다. 내 개인적으론 지난 세기니 새로운 세기니 하는 구분이 마뜩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에 대한 기대와 염려에 마구 들떠 있었다. 새로운 세기가 온다고 해서 사람들의 삶, 특히 청소년들의 삶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삶의 바탕은 묵은 세기이든 새로운 세기이든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작가들의 청소년 소설이 나오지 않자 2000년에 나는 『나는 아름답다』를 ‘1318문고’로 또 펴냈다. 이어 2001년엔 『밥이 끓는 시간』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청소년 소설을 쓰겠다는 작가가 겉으로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계절출판사에서는 ‘사계절문학상’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듯이 1회(2003년) 때는 대상을 못 내고 우수상으로 이재민의 『사슴벌레 소년의 사랑』을 뽑았다. 그 이후 주목을 받은 대상 작품이 많이 나왔다. 이옥수의 『푸른 사다리』(2회), 신여랑의 『몽구스 크루』(4회), 김해원의 『열일곱 살의 털』(6회), 박지리의 『합체』(8회), 이송현의 『내 청춘, 시속 370km』(9회), 홍명진의 『우주 비행』(10회), 김선희의 『더 빨강』(11회), 최상희의 『델 문도』(12회) 등이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들이다. 나는 10년 넘게 예심과 본심 심사위원으로 사계절문학상에 응모하는 작품들의 경향을 살펴보면서, 이제 청소년문학판에서 뒤로 물러나도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사계절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은 수상을 계기로 이후 청소년 소설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심사위원들로 하여금 머리털만이 아닌 다른 털까지 상상하게 한 『열일곱 살의 털』의 작가이자 사계절문학상 6회 수상자 김해원은 이후 『추락하는 것은 복근이 없다』(사계절, 2015)라는 단편집에 그만의 개성적인 인물과 독자로 하여금 슬며시 웃음 짓게 하는 독특한 유머를 구사함으로써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사계절문학상 8회 수상자인 박지리는 뒤이어 펴낸 『맨홀』(사계절, 2012)에서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등장인물을 내세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었다. 이들 수상자 모두 나 혼자 10여 년 간 고군분투했던 청소년문학계를 많이 풍성하게 해주었다.
특히 2회 대상 수상자인 이옥수는 이후 『내 사랑, 사북』(사계절, 2005), 『킬리만자로에서, 안녕』(시공사, 2008), 『키싱 마이 라이프』(2008), 『개 같은 날은 없다』(2012, 이상 비룡소) 등의 작품집을 펴내며 청소년 소설가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4회 수상자인 신여랑은 『자전거 말고 바이크』(낮은산, 2008) 등 아주 개성적인 청소년 소설을 선보였다.
2000년대 후반, 청소년문학의 전성기
사계절문학상에 이어 출판사 창비도 청소년문학상을 제정했다. 창비청소년문학상 1회(2008년) 수상작인 김려령의 『완득이』는 청소년 소설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독자의 반응이 좋았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희화적인 인물 설정과 리드미컬한 대화,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유머는 잘 읽히는 수준을 넘어, 눈앞에서 곧장 만화 페이지가 넘어가는 느낌마저 준다”라는 심사평을 했다. 그래서 나중에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완득이』에 나오는 인물들의 말투와 사건을 청소년 소설의 전형으로 삼는 작가가 생길 정도였다. 김려령은 이어 평범한 소녀의 죽음에 따른 사실과 진실을 설득력 있게 그린 『우아한 거짓말』(창비, 2009)을 펴냄으로써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청소년 소설 문법을 내보였다.
창비청소년문학상은 2회 때 구병모의 『위저드 베이커리』를 당선작으로 내보이며 확실히 터를 다졌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미스터리, 공포, 판타지 요소를 담고 있었다. 『완득이』에 이어 『위저드 베이커리』의 장르소설적 요소는 이후 창비 청소년문학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경계 자체도 모호하다. 하지만 문학계와 출판계는 오랫동안 경계 짓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구병모는 『방주로 오세요』(문학과지성사, 2012) 등의 작품을 꾸준히 펴내며 청소년 소설가로서 자기 존재를 각인시켰다.
비룡소, 문학동네, 자음과모음 등의 출판사에서도 청소년문학상을 제정했다. 특히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1회 당선작인 김선영의 『시간을 파는 상점』(2012)은 시간의 양면성에 대하여 호기심과 긴장감을 유발하게 하는 이야기 방식으로 요즘 아이들의 현실을 잘 포착한 작품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2000년대 후반은 청소년의 삶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2009년 무렵, 당시 이명박 정부는 각급 학교에 일제고사를 도입하여 전국의 모든 아이들을 시험 성적으로 줄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반발한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학교도서관 관련 잡지를 내자고 제안했다. 앞으로의 사회는 기계적으로 암기만 하는 시험 선수가 아니라 학교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며 창조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그래서 창간 준비호를 거쳐 2010년 3월호로 〈학교도서관저널〉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했다. 나는 한기호 소장의 의견에 적극 찬동하여 창간 초기에 그 잡지의 기획위원으로 참여했음은 물론 청소년 소설 『방자 왈왈』을 이 잡지에 연재했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춘향전』의 각 인물들을 방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소설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일지라도 얼마든지 재창조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작품이기도 했다. 『춘향전』에 대해 일반적으로 정해진 질문과 정해진 답만 외운 학생들은 무척 당혹스러운 작품이었겠지만, 방자의 처지에서 보면 새롭고도 많은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작가인 나는 방자가 하는 얘기를 받아 적었을 뿐이고, 그의 행적을 그렸을 뿐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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