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총정리
이제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정리해보자. 자본주의 세계에 속한 많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정치판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중요한 정치 토론은 겉보기에는 ‘자유 시장’과 ‘정부’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정치적 우파는 정부보다 시장에 비중을 두어 일반적으로 세금을 낮추고 공공 지출을 줄이자고 주장한다. 정치적 좌파는 시장보다 정부에 비중을 두어 일반적으로 세금을 높이고(최소한 부자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고)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자고 주장한다. 해당 논쟁에는 시장을 설계하고 조직하고 시행하는 데 정부의 역할이 필수라는 중대한 현실이 숨어 있다. 입법자·행정인·판사가 기본 임무를 수행할 때 내려야 하는 무수한 결정이 이러한 현실 때문에 모호해진다. 그들은 혁신이 이루어지고 기술이 발달하며 시장 조건이 계속 바뀌므로 새롭게 결정을 내려야 하고 과거의 결정을 재고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시장’이냐 ‘정부’냐를 둘러싼 오랜 논쟁은 이면에 숨은 결정을 무시함으로써 결정 방식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키고, 대기업·월스트리트·부자가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차 증가한다는 사실을 가린다. 소득 상위층이 경제적 힘을 획득하면서 경제 게임의 기본 규칙에 미치는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힘이 더욱 커졌다. 매우 큰 목소리로 ‘자유 시장’을 열렬하게 찬양하는 많은 사람은 이처럼 경제의 물밑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최대 수혜자들이다. 그들은 대중이 이해하는 경제 기능 방식에서 힘의 실체를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편리하게 감춘다.
결과적으로 밖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현상은 정부가 세금과 이전지출을 통해 부유층에서 빈곤층으로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상위층과 하위층의 소득 격차가 벌어지면서 최근 수십 년 동안 확대되었다. 결과적으로 세금과 이전지출 이후에 관찰할 수 있는 불평등의 폭은 그 이전만큼 크지 않다.
하지만 소득의 하향 재분배는 전체 그림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소득의 재분배가 소비자·근로자·소기업·소형 투자자에서 고위 기업 임원, 월스트리트 트레이더와 포트폴리오 매니저, 자본 자산의 주요 소유주로 상향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상향 재분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주요 통로는 상당한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형성하는 시장 규칙 안에 숨어 있다. 따라서 시장 구조 안에서 상향 분배가 먼저 이루어지고 난 후에 정부가 나머지 소득을 세금과 이전지출을 통해 빈곤층에 하향 재분배하는 것이다.
경제가 아이디어를 향해 이동하고 유형의 상품에서 멀어지면서 이면에 숨은 시장 규칙은 훨씬 모호해졌고 따라서 자원과 힘을 소유한 사람의 손에서 훨씬 쉽게 조작된다. 오늘날 가장 가치 있는 재산은 특허와 저작권을 비롯한 지적재산으로 특허 ‘제품 갈아타기’, 제약회사와 복제약 제조사가 체결하는 역지불합의 협정, 저작권 보호 기간의 연장 등을 통해 거대 기업의 손에서 조용히 확대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 현재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형태의 지적재산은 광대역 같은 네트워크, 유전자 변형 씨앗, 표준 디지털 플랫폼, 소수 월스트리트 은행이 통제하는 금융 체제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대기업과 월스트리트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시장 지배력을 키우고 소규모 경쟁사들의 경제적 공격이나 반독점법의 법적 위협을 피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계약의 대상은 물건보다 자료와 아이디어다. 따라서 강력한 이익 집단이 소액 투자자에 대항해 내부 정보를 사용하고, 직원·고객·프랜차이즈 가맹점에 의무적으로 중재해 동의하라거나 법적 권리를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근거로 파산법은 나날이 근로자·주택 소유자·학자금 대출자보다 거대 기업과 거대 은행에 체계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한다. 금융은 매우 불투명해져서 CEO는 기업 환매 시기를 조절해 자기 소유의 스톡옵션과 성과급 주식을 현금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소액 주주들의 몫을 가로챈다. 또한 노동권법, 집단적 협상권의 부적절한 시행, 직업의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지적재산권과 금융 자산을 보호하는 무역 협정으로 근로자의 협상력은 꾸준히 잠식당한다.
정부의 시행 전략도 문제를 악화시킨다. 대기업과 월스트리트를 조사하고 감독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기관은 근본적으로 인력이 부족하고, 법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며, 기업에 처벌과 벌금을 적절하게 부과하지 못한다. 임원 개개인에게 형사상 책임을 묻지 못하고, 사적 소권訴權을 제한하고, 집단 소송의 자격을 축소한다. 또한 가벼운 처벌을 받는 것으로 합의를 성사시키려고 매진하는 기업 변호사들과 월스트리트 변호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법적 자원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
이렇듯 대기업·월스트리트·부자는 시장을 형성하고 규칙을 시행하는 결정에 여러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선거 후원금을 기부하거나,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특정 정치인의 정적에 대항해 홍보 활동을 벌인다. 로비 회사나 월스트리트의 고소득 직업과 정부 관리직 사이에 회전문을 설치해 서로 넘나들 수 있게 하거나 공직에서 내려오고 나서 고소득 일자리를 주겠다고 암시한다. 전문가를 고용해 두뇌 집단을 결성하고 홍보 활동을 펼쳐 특정 정책이 대중에게 이롭다고 믿게 한다. 몸값 비싼 로비스트와 변호사 군단을 갖추고 입법 기관과 행정 기관의 청문회와 법원을 장악한다. 또한 검사와 판사에게도 손을 뻗는다.
‘자유 시장’은 이러한 현상 전체를 위장하는 막이다. 따라서 경제 이득을 분배하는 체제는 중립적인 힘이 작용한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처럼 보인다. 실력주의 사회는 사람들이 대체로 자기 가치에 비례해 보수를 받는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노동의 대가를 매우 적게 받는 사람도 매우 많이 받는 사람도 자신의 ‘가치’가 그만큼이라고 추정한다. 미국의 실력주의 관점으로는 개인의 소득과 미덕이 일치하고, 재산과 도덕적 가치가 일치한다. 따라서 고소득을 세금으로 구속하거나, 정부의 이전지출을 통해 저소득을 보충하려 시도하는 것은 시장을 침범해 효율성을 해치고 유인책을 왜곡하고 실력주의의 도덕적 기반을 위태롭게 만드는 행위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이러한 위험은 정치적 관점에 따라 공정성을 달성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시장은 부유한 이익 집단에 유리한 정치적 결정을 반영하므로 시장을 통해 경제 이득을 분배하는 제도가 반드시 근로자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 거대 기업 임원의 급여가 최근 수십 년 동안 치솟고 있는지, 어째서 월스트리트의 매니저와 트레이더가 받는 급여가 급등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조사해보면, 그들의 통찰이나 기술의 가치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 아니라 시장의 규칙을 결정하는 영향력이 강력해지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중산층 가구의 소득이 감소하고, 근로 빈곤층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은 두 집단이 개인적으로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힘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거대 기업·월스트리트·부자가 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힘은 재산과 더불어 시장 규칙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한편으로 중산층과 하위층은 과거에 소유했던 힘을 많이 잃고 덩달아 경제적 지위가 쇠퇴하면서 시장 규칙에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상실한다.
그렇다고 높은 자리에 앉아 규칙을 만드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상위층도 개인의 이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개인적인 이윤 추구가 ‘자유 시장’을 효율적인 동시에 대중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이끄는 원동력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행동하는 무대는 이론적인 ‘자유 시장’이 아니라 실질 정치경제로서 경제적 힘이 정치적 영향력을 구축해 경제 게임의 규칙에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힘을 더욱 키운다. 그들 개개인이 합리적으로 계산한 결과를 합하면 전혀 효율적이지도 않고 체제 전체가 합리적이지도 않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기존 체제 안에서 완전히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은 이러한 행동들이 쌓여 체제는 서서히 무너지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문제는 상위층이 소유한 힘이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아니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문제다. 대기업, 월스트리트, 부자가 소유한 정치적 힘은 점점 커지는 데 반해 이를 억제하거나 균형을 맞출 만한 대항적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중산층과 빈곤층, 그들을 포함한 경제적 이익 집단에는 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그렇다면 다음 세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대항적 세력이 다시 형성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를 어떻게 위협할까? 둘째, 어떻게 하면 중산층과 빈곤층이 더욱 광범위한 번영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재조직하기에 충분한 대항력을 다시 갖출 수 있을까? 셋째, 그렇게 완성된 시장의 재조직은 어떤 형태일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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