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꿈? 개꿈!
어떤 책의 앞날개에 적힌 내 약력의 첫머리 부분이다.
사람보다 더 유명한 진도에서 개띠 해에 태어나 개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중에 광주와 서울로 거처를 옮겨 다니며 공부를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가슴속으론 늘 좋은 의미의 ‘개 같은 인생’을 꿈꾸었다. 그 꿈이 아주 ‘개꿈’이 안 된 건 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다. 진도는 어찌 된 일인지 사람보다 개가 더 유명하다. 워낙 개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인지라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개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를 썼다. 커서 고향 진도를 떠나 광주로 서울로 공부길에 나서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늘 좋은 의미의 ‘개 같은 인생’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고향을 떠나 도회를 떠돌며 사는 동안 자칫 내가 꾸는 꿈이 아주 허망한 개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마다 고향에서 어린 시절 같이 살았던 개를 가슴속에 되살리며 내 꿈이 개꿈이 되지 않도록 의식·무의식 노력을 다했다.
가슴속에 품은 내 꿈은 누가 뭐래도 ‘개 같은 인생’이다. 개 같은 인생이라고? 아무렇게나 막살며 무시당하는 인생을 말하는가? 사람들은 개 같은 인생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개 같은 인생은 그런 게 아니다.
내가 꿈꾸는 개 같은 인생은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움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진도개는 자기의 분수를 아는 종자이다. 산을 오르내리며 사냥을 해야 할 때와 집 울타리 안에 있는 다른 가축을 지켜야 할 때를 안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호연지기를 맘껏 발휘할 때와 집을 지키는 직분을 다해야 할 때를 잘 아는 존재라는 말이다. 진도개에겐 그런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진도개가 타고난 본능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게 본능이라면 본받을 만한 본능이다!
진도개는 절대로 먹는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가 잡은 쥐 같은 것을 먹지 않는다. 가끔 쥐약 먹은 쥐를 먹고 죽는 개가 있기도 하지만 그런 개는 진도개의 ‘개 도리’를 하지 않은 개다. 진도개는 자기 위장의 2/3 쯤만 채운다고 한다. 결코 과식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진도개는 위장병을 앓지 않는단다.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진도개. 이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듣던 ‘더 먹고 싶다 할 때 숟가락 놓는다!’라는 밥상머리 교육과도 부합한다. 먹는 것을 통해서도 삶의 묘미를 일러주시던 할아버지.
자연스러움과 과욕을 부리지 않는 일. 사람인 내가 개에게 배워야 할 덕목이다. 개 도리이지만 사람 도리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살면서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욕심은 얼마나 부리고!
십수 년 전 아이가 중학생 무렵,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고향 진도까지 걸어간 적이 있다. 그때 이런 시를 탄생시켰다.
아들놈이랑 서울에서 내 고향 진도까지 눈보라 뚫고 걸어가는 길이었다. 가다가 팍팍한 다리도 쉬고 주린 배도 채울 겸 길가 기사 식당에 들어서자 운전기사들 밥 먹다 말고 우리 부자 행색 보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 눈 속에 어디까지 가시는 길이유?
진도까지 갑니다.
아, 거시기 진도개 유명한디 말이유?
예.
지금도 거기 진도개 많슈?
예.
왜 사람들은 진도에 사람도 산다는 생각은 않고 개 안부만 묻는 걸까? 개만도 못한 사람이 넘쳐나서 사람 안부는 물을 것도 없는 걸까? 그럼 개만도 못한 사람들은 모두 쥐일까? 아님 고양이일까? 이러다가 사람만도 못한 개가 넘쳐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하다 말고, 아차, 며칠째 우릴 기다리는 어머니는 점심식사나 하셨을까, 밥 먹다 말고 고향집에 전화를 넣는다.
어무니, 시방 충청도 지나고 있는디, 별일 없어유?
내사 뭔 일 있겄냐만 노랑이가 속쎄긴다.
왜 또 넘의 집 개랑 싸우고 다리 한 짝 부러져서 들어왔소?
아니, 고것이 새끼 낳더니만 입맛이 영 없는갑서. 뭣이든 주는 대로 잘 먹던 입인디 요 며칠 새 된장국도 안 먹고 미역국도 안 먹고 강아지들 젖도 안 멕일라고 그랴. 아무래도 지가 잡어놓은 노루 뼈라도 고아서 멕여야 쓸란갑다.
늙은 어머니, 이녁 안부는 뒷전이고 개 안부만 길게 전한다.
아, 나도 못 먹어본 노루 뼛국!
─ 「개 안부」 전문
***
진도개는 자연스럽게 사냥을 한다. 그래서 노루도 곧잘 잡아놓고 사람을 부른다. 사람은 개가 잡은 노루를 산에서 집으로 가져와 살은 장조림을 하고 뼈는 고아먹는다. 동물 애호자가 이 사실을 알면 질겁을 할지도 모른다. 노루를 잡는 개라니! 사냥을 하는 진도개를 나무랄지 모른다. 노루가 얼마나 순한 짐승인가! 하지만 진도개에겐 순한 노루도 잡아야 하는 게 자연의 이치에 맞는 일이다.
시 「개 안부」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안부는 뒷전이고 개 안부만 길게 늘어놓으신다. 개가 바로 노모를 지켜주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다 어머니를 따라 도회로 흩어져 갔지만 개는 시골집을 지킨다. 그런 개이기에, 출산 후 입맛을 잃은 어미개에게 자신이 잡은 노루의 뼈라도 고아서 먹이고 싶은 게다.
어머니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가리지 않는다. 다들 소중한 ‘숨탄 것’일 뿐이다. 목숨을 타고난 것은 다 귀중하다. 그렇다면 노루도 숨탄 것이잖아. 그런데 노루를 개에게? 이런 의문을 가질 만하다. 어머니에겐 모든 게 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가 노루 사냥을 하는 일, 노루뼈를 개에게 고아 먹이는 일. 이런 일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 세상엔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일이 도처에 횡행한다. 자연스러움을 무시하는 일이 되레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 일이 삶에 있어 가장 절실한 대목이다.
진도개와 진돗개. 나는 둘을 구별한다. 진도에서 태어났으며 진도개의 특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개는 진도개로, 진도가 아닌 뭍에서 태어났지만 진도개의 특질을 유지고 있는 개는 진돗개로 표기한다. 나는 진도개든 진돗개든 개 도리를 하길 원한다. 그러려면 사람부터 사람 도리를 해야 마땅하다. 개든 사람이든 도리를 다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 터!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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