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지난 몇 해 나는 꿈을 품은 많은 이주민과 만났다. 임금 체불, 폭행, 산업재해 등이 주였지만, 간혹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도 상담했다. 극도의 긴장으로 과호흡 증상을 보이는 이주노동자도 있었으며,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이도 있었다. 또한 밤만 되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단속과 강제 추방에 대한 공포로 작은 발소리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많았다. 이들에게는 가혹한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한국 사회와 아시아를 이해하는 임상 분석과도 같았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꾼다. 새로운 삶을 위해 더 나은 세계를 꿈꾼다. 이유가 무엇이든 현재의 삶이 신산(辛酸)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가 물구나무서 있어서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목말라한다. 그리고 그 간절한 목마름이 꿈을 낳는다. 꿈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때로는 목숨도 걸게 한다. 어떤 이는 국경을 넘다가, 또 어떤 이는 출입국 단속에 쫓기다가 하나뿐인 생명을 한줌의 잿더미로 태워 버린다. 그 꿈은 악몽이 되기도 하는데, 꿈을 꾸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절망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만난 대다수 이주노동자들은 악몽을 꾸는 이들이 아닌가 한다.
25년 전에는 나도 악몽을 꾸는 공장 노동자였다.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잔업에 철야까지 해가며, 월요일에 출근해 토요일 새벽이 되어서 퇴근하곤 했다. ‘아우슈비츠’라고 명명한 성형成型 공장을 나와 목재 공장을 전전하던 내 청년 시절은 온통 현장 노동자의 이력으로 채워졌다. 공단 주변에 있는 허름한 산동네에 살면서 꿈 많은 노동자가 되었다. 당시 일당이 3천1백 원이었는데, 그 돈을 모아서 월세를 냈고 쌀과 한두 종류의 찬거리를 사서 생활했다. 차비마저 빼고 나면 수중에는 2주일 치 담뱃값만 남았다. 집을 나와 부양할 가족이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온몸에서 진이 빠졌지만, 정작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니 한 달을 참아 내기란 여간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던, 괴물 같은 시대의 악몽이었다.
내가 노동 현장에 투신했던 그때와, 오늘날 이주노동자가 처한 현실이 다르지 않다. 오히려 악화된 것도 있다.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들여다볼수록, 부끄러운 한국 사회의 짙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산업 연수생들은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자 신분을 보장받지 못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는커녕 사용자에 대한 단결권·단체교섭권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겨웠다. 이주노동자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값싼 노동력 취급을 받거나 영혼이 없는 그림자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어떤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낯선 땅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대개 번듯한 사업장이 아니라, 30명 안팎의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에서 주로 야간 전담 노동에 투입되었다. 한국인이 퇴근한 텅 빈 공장에서 기계 소리와 함께 밤샘까지 마친 뒤에야 비로소 무거운 몸을 이끌고 컨테이너 방으로 갔다. 살림살이라고는 가스레인지와 싱크대가 전부인 한 칸짜리 방에 납덩어리 같은 몸을 뉘었다. 고향에 있는 대가족의 생계가 그의 노동에 달려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주노동의 고달픔에 대해 묻곤 했는데, 그들은 오히려 “나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를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고통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는 인내를 보였다. 그때마다 내가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이주 과정에서 겪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가령 사업장에서 폭행을 당한 이주노동자는 임금 체불이나 사업장 이전 문제와도 연계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의료와 체류 자격부터 생존권과 정주권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특징을 보인다. 때로는 치도곤 같은 모멸과 치욕을 견뎌야 한다. 그가 어디에서 왔고 어느 곳에 있든지 인간으로서 존엄을 보장받아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주가 전 사회적이고 일국을 넘어 전 지구적인 문제임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 줄 노동권과 시민권이 보장되기까지는 여전히 요원하다.
공동의 역사와 현실이 운명의 사슬처럼 이어진 오늘날의 아시아는 이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세계화가 곳곳에서 활개 치는 지금, 그 어떤 국가도 그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아시아 곳곳에서 숨 쉬고 생활하는 모든 이들은, 언제라도 이주의 삶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아시아 체제’의 이 같은 질곡을 극복할 주체는, 세계 경제체제의 하위자로 전락한 모든 아시아인이다.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는 힘은 결국 인간애를 지닌 인간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화’(和)와 ‘쟁’(諍)의 ‘다름과 같음’을 사유하게 된다. ‘화이부동’(和而不同), 서로 같되 다름을 통해 종당에는 서로 다름이 하나라는 화엄의 아시아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아시아의 하늘은 이어져 있다. 그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하든, 피부색이 어떻고 쓰는 언어가 무엇인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사람이다. 생존과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세계를 향해 길을 떠나는 우리 모두는 이주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주민의 문제가 당사자의 목소리로 발언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의 문제로 외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 목소리가 아시아에 대한 애정과 연동(連動)의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세계사의 고리에서 억압당하고 천시되었던 아시아에서 새로운 문명이, 모든 인권이 존중받는 새로운 도약이 움트기를 기원한다. 자신의 존재를 부당하게 잃어버린 투명한 인간이 아니라, 인류의 아픔에 공동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대부분 2005년에서 2011년 사이에 ‘한국이주인권센터’와 ‘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에서 활동하며 썼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주노동자와 이주민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이 책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값진 것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 모두는 이주민’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주의 삶은 꿈을 꾸는 것이다. 비록 신산한 삶이 기다릴지라도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은 포기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신성한 꿈을 모시고 있다. 나도 꿈을 꾼다. 국경이 없다면, 민족과 이데올로기가 없다면, 차별이 없다면 이 세계는 어떨까 상상한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모두에게 평화의 인사를 드린다.
2012년 4월
이세기
1부 불안한 귀환,
그 후
이주, 그 먼 길
사욍 씨가 고향을 떠나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온 것은 그의 나이 28세였다. 타이 동북부 오지인 잠롱에서 한국으로 올 때, 그는 고향에다 땅을 사 연못이 딸린 집을 짓고 가정을 건사하며 사는 꿈을 품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에는 180여 가구, 7백여 명이 살고 있다. 지방 국도의 조그만 대로변을 사이에 두고 집 몇 채가 흩어져 있고, 마을 입구에 초등학교와 보건소, 그리고 사원이 하나 있을 뿐, 타이의 여느 농촌 풍경과 다를 바 없다. 농사를 짓는 부모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사욍 씨(37세, 타이)는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지만, 다른 또래들처럼 일자리가 없어서 무직으로 지내야 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고향을 등지고 방콕 등지의 대처로 떠났다. 그 역시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가까운 소도시로 가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돈으로는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장래를 계획할 수 없었다. 아무리 벌어도 남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생활고와 절망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으로 오기 위해 9만 바트라는 거금을 빌려 송출 브로커 비용으로 주고, 1999년 고향을 떠나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왔다.
그가 처음으로 간 곳은 인천 5공단이었다. 인천의 대표적인 기계 단지로 주로 프레스 직종이 몰려 있는 공단이다. 그는 밤낮으로 일해 매달 70만여 원을 받으며, 5년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다. 산업 연수생 계약 기간인 3년이 지났지만 귀환하지 않은 채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남았다. 그러다가 2003년, 미등록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과 병행해 이뤄진,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합법화 조치로 구제되어 출국한 후 비전문 취업E-9 비자(비숙련공 비자)를 받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그와 만난 것은 2006년 봄이었다. 그는 인천 5공단에서 타이 이주노동자 네 명과 함께 사출직으로 일했는데, 다니던 회사에서 임금이 체불돼 상담을 받기 위해 찾아왔다. 그들은 3개월간 임금을 받지 못한 상태였는데 공장은 폐업했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하니, 사장은 한국의 여느 사업주와는 다르게 정중한 태도로 노동부에서 만나 해결하자는 의사를 전해 왔다. 노동부에서 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대부분의 3D 업종 사업주들처럼 여러 차례 클레임을 당해 심한 자금난을 겪은 끝에 부도를 낸 상태였다. 다행히 체당금 처리를 할 정도는 아니어서 체불임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지급 기일을 합의한 뒤 헤어졌다. 그 후 몇 차례의 중간 정산을 거치면서 다섯 명이 받지 못한 체불임금 1천7백만여 원을 받았다. 그렇게 사욍 씨와의 만남이 시작됐다.
그 후 그는 합법적인 구직을 스스로 포기하고 예전에 근무했던 공장에서 프레스 직종의 일을 했다.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비전문 취업 비자가 있으면서도, 고용지원센터를 이용하지 않고 임금을 더 주겠다는 공장에 가기 위해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두 차례 이주노동을 하러 오는 과정에서 진 빚 때문에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겠다는 공장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런 그의 선택과 생활은 얼마 못 가서 끝났다. 단속에 걸려 강제 출국을 당했던 것이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잔여기간조차 채우지 못하고 타이로 귀환했다.
짧은 만남은 거기까지였다. 그런 그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우연찮은 일이 종종 벌어지는 법이어서, 귀환한 사욍 씨를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타이로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이주노동자를 위해 도서관에 비치할 타이 책을 구해 오는 한편, 인권 여행의 일환으로 인도차이나반도의 몇 나라를 여행하며 귀환한 이주노동자를 만날 목적으로 가는 출장이었다.
방콕은 비가 내렸다. 우기의 비는 느닷없었다. 누군가는 우산이 필요 없다며 그냥 맞으면 된다고 했다. 괜한 짐만 될 뿐이라고 했다. 과장이 아니었다. 숙소로 정한 방람푸의 거리에도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렸다. 비가 갠 날은 습도가 높아져 숨이 막힐 듯한 열기가 온몸을 에워쌌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열대야의 더위가 게스트 하우스의 천장에서 도마뱀과 함께 내려왔다. 푹푹 찌는 더위가 무슨 전염병 같았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몰려든 카페에서는, 세계의 여러 인종이 모인 곳답게, 젊음의 열기가 밤새 식을 줄 몰랐다. 잔뜩 긴장한 나머지 이들과 섞이지 못한 나는, 이 도도한 자본주의의 기세에 휘둥그레진 채 명멸하는 밤의 방콕을 걸었다.
줄라롱컨 대학 구내 서점에서 책을 구하고 잠시 거리를 구경하니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동굴에 들어서자, 신비한 세계가 열린 듯했다. 알록달록하고 진귀한 온갖 차들과 매연에 그을린 도시의 건물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열대의 꽃들이 거리를 장식했고, 차이나타운은 사람들의 물결로 파도쳐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나는 내내 홀린 듯한 토끼 눈을 하고는 거리의 불빛과 차들과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세계 각지에서 온 젊은 여행객으로 방람푸의 밤은 짧기만 하다. 시간이 질주하고, 취해 흐느적거린다.
첫 번째 일을 끝낸 나는 드디어 사욍 씨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서 적어 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몇 차례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씨름했지만 번번이 그와 통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의 여동생과도 몇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응답이 없다. 수화기에서는 타이 말만 들려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낭패감이 커진다. 사욍 씨와 이야기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그의 고향집에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이 절망스럽다. ‘내 이런 절망이 이주노동자들이 이주 과정에서 겪는 문제가 아닐까.’ 나는 몇 번이고 되새김질했다. 외지에서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를 겪으면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막막하리라. 사욍 씨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그랬을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달래려 맥주를 사서 여느 유럽 배낭족처럼 거리에 앉아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마신 술은 한낮의 온도처럼 내 몸을 뜨겁게 달궜다. 갑자기 실어증에 걸린 듯 가슴이 답답하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아무도 없다. 나는 그 길로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었다. 점점 가슴이 답답해졌다. 심장이 뛰고 숨이 곧 멎을 듯한 기세다. 말의 침묵이 이런 것인가. 이런 것이 바로 모국어를 할 수 없는 이의 감옥살이이자 이주노동자가 겪는 고통이 아닐까.
이런 일도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이주노동자 메네트(41세) 씨가 실어증에 걸리고 정신착란에 빠진 것이다. 한국에 온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는 밤만 되면 누군가 자신을 잡으러 온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공장 창문을 넘어 어딘가로 가려 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도 없이 벽을 손톱으로 긁거나 천장을 뚫어지게 봤다. 어느 날은 벽에서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 동료들이 벽과 천장을 뚫어서 보여 줘도 믿지 않았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려니 했지만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작업 시간에도 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괴성을 지르고 몸부림 치며 날뛰자, 공장 동료들은 그를 기숙사 방 안에 가두었다. 결국 그는 병원에서 신경안정제를 맞고 사지가 묶인 채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며칠간 해야만 했다. 입원해도 호전되지 않자 곧 본국으로 귀환했다.
늦은 밤 방람푸의 거리에서, 메네트 씨와 내가 서로 다르지 않고, 실어의 고통 또한 모든 이주노동자가 겪는다고 생각하니, 답답함이 벼랑처럼 다가온다. 어둠 속, 창문 밖에서 들리는 우기의 빗소리가 정처 없다. 새벽 5시가 넘어서야 마음이 겨우 진정되어 잠시 눈을 붙였다.
가까운 사원의 닭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느닷없이 빗줄기가 쏟아진다. 공중전화를 붙잡고 다시 사욍 씨와 통화를 시도했다. 그의 여동생과 겨우 연락이 되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사욍 씨와 만나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간밤에 극심하게 온 공황증도 그렇거니와 점점 죄어 오는 실어증은, 내게 감옥살이와 다름없었다. 여행사에서 출국 예약을 하고는 곧바로 숙소에 돌아왔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차에 핸드폰 벨이 울렸다. 한국에 있는 타이 이주노동자였는데 사욍 씨와 가까스로 연락이 닿았고, 이제 내가 묵고 있는 숙소로 사욍 씨가 전화하리라고 전해 주었다. 이내 전화벨이 울린다. 사욍 씨다. 반가운 목소리다.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란다. 내일 아침 사람을 보낼 테니 숙소에서 기다리란다. 다행이다.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며칠간의 마음고생이 절로 치유되는 것 같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전화벨이 울린다. 나를 데려갈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잠시 뒤 카운터에서 손님이 왔다는 말을 전했다. 내려가 보니, 낯선 타이인이 “안녕하세요?” 하며 내 이름을 부른다.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했는데 뭔가 뭉실하다. 손가락이 없다. 직감적으로 그가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가 산재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근무하는 한국의 3D 업종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들은 야간전투를 위해 전선에 배치된 군인처럼 일해야 한다. 작업 효율성을 높인다며 안전장치도 제거한 채 한 공장에 두세 명씩 배치되어 생산성 향상을 위한 치열한 전투를 치른다. 전투에서 실패한 전투원은 가차 없이 해고되거나, 다른 전선에 배치되기 위해 작업장을 떠난다. 임금 체불은 다반사고 산업재해에도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다 팔목이나 손가락이 절단된 채로 산재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 허리디스크에 시달린다며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본국의 임금수준으로 책정된 형편없는 보상금뿐이다. 손가락을 잃고 받는 돈은 겨우 몇 백만 원에 불과했다. 그들은 평생을 불구로, 때로는 노동력이 상실된 채 살아가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산재 보상금을 받아 출국해 봐야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대부분 암담한 현실이다. 전쟁을 치른 군인이 고향에 돌아와도 할 일이 없는 것처럼 그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산재를 당한 몸으로 한국에 남아 치료받거나 다른 변통을 찾으려 애쓰지만, 노동력을 상실한 이주노동자를 받아 주는 사업주는 없다.
나를 찾아온 이는 사욍 씨의 친구인 리욤(32세, 타이) 씨였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사업장에서 산재를 당했다고 한다. 2005년경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왔는데 입국한 지 2개월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프레스에 그의 손가락이 싹둑 날아간 것이다. 다섯 손가락이 잘린 보상으로 3천1백만 원을 받았는데, 그 돈을 가지고 타이에 와서 택시 두 대를 소유한 사장이 되었다. 내가 타이에 와서 처음 만난 귀환 이주노동자였다. 그는 사욍 씨의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오른 나를, 웬일인지 손가락이 없는 뭉툭한 오른손을 치켜세우며 배웅했다. 마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 달라는 뜻 같았다. 그의 삶이 송곳이 되어 폐부를 찔렀다.
상담을 하면서 많은 이주노동자가 산재를 당하는 것을 봐왔다. 사출이나 프레스 직종에서 발생하는 산재는 주요 상담 중 하나다. 하루에도 일곱 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한다고 한다. 그래도 리욤 씨는 적은 보상금이나마 헛되이 쓰지 않고 생활 기반을 마련한 터였다. 그는 내게 앞으로 6백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여행하게 될 테니 한숨 푹 자두라고 했다. 저녁때쯤에야 잠롱에 도착할 것이란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한 데다 푹푹 찌는 날씨 탓에 온몸이 녹초인 채로 길을 떠났다.
나를 태운 차가 타이 동북부의 메마른 도로를 달렸다. 택시 운전사인 리응조(41세, 타이) 씨는 자신의 아내가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수정’이라고 했다. 한국 동료들이 지어 준 이름이라며, 지금도 그렇게 부른단다. 그는 운전하면서, 아내에게 배웠다는 한국 대중가요를 연신 불렀다.
차는 끝도 없이 불볕더위 위를 달린다. 실어증이 떠나가자, 정신적인 고통이 뒤를 따랐다. 간밤의 후유증으로 탈진해 기력이 쇠했다. 나는 잠시 사욍 씨가 이주를 위해 떠나왔을 길 위에서, 내가 떠나온 길을 생각해 봤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풍경들이 나를 어떤 고통으로 내몰았다. 나는 물었다. 내게 사욍 씨는 어떤 존재인가. 내가 굳이 사욍 씨를 만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디를 통과하고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되묻고 되묻는다. 차창 밖으로 풍경이 스칠 때마다 나는 고통스러웠다.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불현듯 볼 때마다 나는 내 정처가 고통으로 다가왔다.
고통이 더할수록 이 길을 오갔을 이주노동자의 꿈과 좌절이 떠오른다. 아시아의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가부장제 아래 집안 전체를 건사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그들은 비록 세계 경제체제 속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받지만, 그들의 양 어깨에는 가족은 물론이고 자신의 장래까지 챙겨야 하는 몇 겹의 멍에가 짊어져 있다. 일자리는 생기지 않고 실업률만 증가하다 보니, 일이 있는 곳으로 노동력이 몰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을 찾아 국경을 넘어 목숨을 건 이주를 단행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힘겨운 이주를 감행하는 것이다. 많은 이주노동자에게 “왜 고향을 떠나와서 고생을 하느냐?”라고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다. 자신의 나라에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사욍 씨가 살고 있는 마을까지 가는 길은 온통 흙구덩이 투성이다. 우기 때 내린 소낙비로 사방이 파헤쳐진 채 방치되어 있다. 느릿한 풍경은 우리네 시골 풍경과 닮았다. 흰 소가 풀을 뜯어 먹고, 구름은 한가로이 흘러간다. 마을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웅덩이가 심하게 패였다. 사욍 씨도 이 길을 따라 한국으로 이주노동을 왔을 것이다. 방콕에서 6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차가 마침내 잠롱에 나를 내려놓았다.
잠롱은 2개월째 비가 내리지 않았다. 논바닥은 갈라지고 심어 둔 벼는 이삭을 피우기도 전에 쭉정이로 메말라 가고 있었다. 흰 구름은 정처 없고 먹구름도 지나치기만 할 뿐이었다. 메마른 대지는 물을 간절히 애원하는 듯하다. 집집마다 어슬렁거리는 닭처럼 마을 사람들 역시 정처 없다. 닭과 병아리가 빈 마당을 거닐고, 연못에는 부레옥잠과 연꽃이 피어 있다. 바나나 나무와 야자수가 있을 뿐 사는 모습은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아열대기후로 숨이 턱 막힌다. 내륙의 기온 탓인지, 아직 본격적인 우기가 오지 않아서인지 그야말로 용광로처럼 푹푹 찐다. 먼 곳에서 손님이 왔다고 대접한 선풍기조차 열기를 더할 뿐이다. 그 사이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다는 몇몇 사람들이 모였다.
안부를 묻는 내게 사욍 씨가 대답한 첫마디는, “이곳 사람들 일 없어. 나도 일 없어.”였다. 이곳 청년들은 하나같이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가고 싶어 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다녀온 동네 청년 몇몇은 이곳에 그럴 듯한 집을 장만했다. 차와 농사를 지을 트랙터를 장만한 이주노동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실업자로 지내고 있었다. 어스름이 몰려오자 한두 명씩 더 모여들었다. 그런데 모두들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잠롱에서만 스무 명 넘는 사람이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갔었다고 한다. 인천 5공단과 남동 공단뿐 아니라 의정부·평택·성환·여주·용인 등지를 떠돌며 이주노동을 했다는 것이다. 일하다가 자진 귀환하거나,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지내다 단속에 걸려 귀환한 이들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먹고사는 문제다. 이곳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일이 많은 나라다.
그들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그들의 말마따나 한국은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렀고, 독재 정권에서 벗어났으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다. 그들에게 한국은 말레이시아·일본과 더불어 이주노동자로 가고 싶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속내를 들어 보니 한국 사회는 야만이 지배했다. 작업장에는 욕설과 폭행이 난무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산재를 위협받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걸핏하면 몇 개월씩 임금이 체불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였다.
사욍 씨의 안내로 묵게 된 집은, 지금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집이었다. 열대야 때문만은 아닌 듯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가끔씩 어둠에 잠긴 지평선에서 메마른 천둥이 울었다. 한밤중에 비가 바나나 나무 잎사귀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진다. 다시 홀로 있다는 느낌이 든다. 또 밤이 깊어 간다. 한참 마당을 서성거린 뒤에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인천 남동 공단에서 일했다는 룽(34세, 타이) 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그는 자신의 아내 역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다면서 자신을 ‘한국통’이라고 소개했다. 함께 집을 둘러보고 있는데 어제 만났던 이주노동자들이 온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잠시 있으니 사욍 씨가 왔다. 묵고 있는 집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단다. 엊저녁에 먹었던 까오똠이라는 죽이 커피와 함께 나왔다. 다시 먹으니 맛이 난다. 한국의 죽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식사를 마친 뒤 사욍 씨와 동네 구경에 나섰다. 정자처럼 생긴 곳에 마을 사람 몇몇이 앉아 있다. 그곳을 지나쳐 조금 걸으니 장례식을 하고 있는 집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당에 모여 장례를 치르는 모습은 영락없이 우리네 시골 같다. 초등학교로 향했다.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는데, 때마침 1학년생들이 마을 견학을 하던 중이었다. 인솔 교사의 제안으로 아이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교실에 들어가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학교를 나와 보건소와 사원을 둘러보고 사욍 씨의 집으로 향했다.
사욍 씨는 집에 도착하기 전에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근무했던 사람들의 집도 구경시켜 주었다. 나름대로 번듯하다. 그림 같은 집들이다. 그러나 모든 귀환 이주노동자의 집이 그렇지는 않았다. 사욍 씨는 자기 집을 보이길 꺼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누추한 집을 보이고 싶지 않았단다. 사욍 씨는 한국에서 7년 동안 일했지만 처음 5년간은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그 때문에 부인과는 아들 하나를 낳고 헤어졌다. 그는 7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아서는 크게 나아질 것이 없었다고 했다. 그 뒤에도 한 번 더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가서 1년여 일했지만, 빚만 졌을 뿐 지금은 방 한 칸 딸린 집이 전부다. 집터는 있지만 집을 짓지 못할 만큼 궁핍했다. 돈을 벌기는커녕 실업자에 새장가도 못 들고 나이만 든 상태라며 자신의 처지를 책망했다.
사욍 씨는 여건만 되면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집을 짓고 결혼도 하고 싶다고 했다. 가족도 건사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잡초만 무성한 텅 빈 집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시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로 왔다. 이제 긴 이별의 순간이다. 한국에서 귀환한 이주노동자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해 서로 인사를 나눴다. 사욍 씨를 불러내 택시비를 주려고 하니 한국에 있는 타이 이주노동자들이 이미 4천8백 바트를 지불했단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차비를 사욍 씨에게 주려고 했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그와 포옹하면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택시에 올랐다.
리응조 씨 역시 부인인 수정 씨와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그는 3개월에 한 번 정도 이곳 집에 온다고 한다. 부인은 1개월에 한 번씩 방콕으로 간다. 이를테면 집안 자체가 이주의 삶이다. 그는 내게 간밤에 잘 잤느냐고 물었다. 오히려 내가 짓궂게 되물었다. 그는 매우 좋았다고 넌지시 말했다.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의 나이 스물두 살에 아내를 만났고, 아들 둘은 이미 장성했다. 큰아들은 방콕에서 대학을 다니고 작은아들은 이곳에서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그는 한국이 돈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아내가 한국에서 5년간 번 돈을 택시에 투자했고, 그러고도 남은 돈으로 집을 지어 살고 있다.
마을을 떠난 차는 방콕을 향했다. 다시 6백 킬로미터를 달린다. 처음 떠나온 자리로 나를 다시 되돌려 놓으려는 듯 달리고 달린다. 나는 방콕으로 오는 내내 내가 겪은 일들이 진실과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세계의 안팎에서 중심으로 열린 길은, 언제나 진실이 왜곡되고 과장되어 보인다. 자신의 터전을 벗어나 중심으로 가면 삶이 풍요롭고 행복해질 것이라는, 세계화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이 많은 이들을 이주노동자로 내몰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전 지구적 차원으로 이동되고 있는 자본의 요구와, 이에 맞설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역시 그 길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이 벌레처럼 스멀거려 온몸이 몸서리친다. 주변부에서 떠밀린 이주노동자들의 주름진 얼굴이 떠오른다. 이주노동자들이 왔을 길을 따라 뒤를 돌아본다. 하늘은 청명하다. 그 아래 들판에는 흰 소가 느릿느릿 걷고 있다.
다시 돌아온 방콕의 방람푸 거리에는 온종일 우기의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거리에서는 젊은 청춘들이 그들의 세대를 향해 돌진하듯 열정을 불사른다. 불야성에 취한 불빛이 나의 눈빛을 홀린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방람푸의 카오산 거리를 걷는다. 웬일인지 나는 정처가 없다.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발길 가는 대로 비가 내리는 밤의 카오산 거리를 걸을 뿐이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카오산의 휘황한 불빛이 흐른다. 거리 곳곳에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젊음이 아름답다 못해 비극적이다. 거리의 한쪽에는 젊은이들이 술에 취해 드러누워 있고, 그 옆에는 성을 파는 여인이 온몸을 드러낸 채 활보한다. 다른 한쪽에는 늙은 악사가 기타를 연주하며 몇 바트의 동전 앞에서 흐느끼듯 노래하고 있다. 연애를 하고 술을 마시고 끝없이 대화를 하고 또 아침이면 어디론가 그들은 달려갈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몇 푼의 돈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수십만 킬로미터를 넘어온다. 국경을 넘어 생명을 건 이주를 선택한다. 서로 다른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질주한다. 양극화의 지점에 내가 있다. 나는 천천히 방콕의 밤길을 걷는다. 자본주의의 불빛이 멈출 것 같지 않은 카오산 거리에는 이국의 수많은 여행객들이 밀려온다. 질주는 끝이 없어 보인다. 극단의 세계와 함께 동거하는 현실이 이처럼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은 어째서일까. 왜 이처럼 세계는 극단으로 내밀리고 있는가.
세계화를 요구하는 전 지구적인 자본에 맞서자고 요구한다는 것은 이들에게 소귀에 경 읽기일지 모른다. 발가벗긴 채 자본이 선사한 굴욕과 치욕 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지금 이곳, 나와 연결된 아시아의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가 겪고 있는 고통의 지점이 아닌가.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지금 우리는 아시아의 고통이 이주의 고통으로 되살아오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한다. 사욍 씨가 오간 길 위에서, 아니 잠롱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오갔을 길을 되돌아오면서 묻는다. 아시아의 고통은 무엇인가. 이주의 삶을 통해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인가. 불안한 이주의 삶을 통해 무엇이 변화하는가.
인천 국제공항에 내리자 하늘이 푸르다. 전날 비가 내렸는지 활주로에 빗물이 고여 있다. 비로소 나는 앨리스의 동굴을 빠져나와 현실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짐을 찾고 출입국 신고를 위해 기다리던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주노동자였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빠져나가는 출구에는, 고용허가제EPS로 들어오는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30여 명이 유니폼을 입은 채 입국 심사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들의 눈동자에 긴장과 경계의 눈빛이 잔뜩 서려 있다. 바로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했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세계는 무엇인가. 갑자기 온몸이 답답해졌다. 방콕의 카오산 밤거리에서 느낀 바로 그 공황증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이 아열대의 빗줄기처럼 내 가슴을 두드린다. 그들의 눈빛이 두려움의 눈빛인지, 아니면 새로운 꿈을 향한 눈빛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스스로 이주노동자가 되어 천천히 공항 출구를 빠져나왔다.
(서문,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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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세기
1963년 덕적군도 문갑도에서 태어나 인천 뭍으로 건너왔다. 1985년부터 세창물산·신흥목재(우아미가구)·청호가구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당했고, 그 후 동일제강과 협신사, 그리고 목공소 등을 전전하며 현장 노동자로 살았다. 1998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았고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집 『먹염바다』와 『언 손』을 냈다.
이 책에는 시인이며 인권 운동가로 살아온 내력이 오롯이 담겨 있다. 2005년부터 ‘한국이주인권센터’와 ‘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에서 이주노동자, 이주민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크고 작은 고통들을 직면하며 받아 적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소박한 꿈을 위한 ‘오디세이아’의 모험을 함께하는 친구들이므로, 이 기록들은 나와 같거나 다른 이들에 대한 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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