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역사는 달리 말하면 곧 저항사다
1.
저항의 물결이 전 지구적으로 출렁이고 있다. 자본주의 심장부 월스트리트에서 사회주의 심장부 모스크바까지, 중동·북아프리카의 아랍국가에서 유럽과 아시아까지, 99퍼센트의 민중이 눈을 부릅뜨고 1퍼센트를 향해 분노한다. 『분노하라』, 『점령하라』 같은 책이 세계 출판시장을 점령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나치에 저항했던, 우리 나이로 96세의 노인인 스테판 에셀은 20여 쪽짜리 소책자에서 젊은이들에게 노골적으로 “분노하라”고 말한다. 제목도 아예 분노하라는 뜻의 ‘Indignez-Vous!’이다.
“젊은이들이여,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참지 말아야 하는 게 어떤 것인지, 곧 알게 된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하겠어? 내 일이나 잘해야지……’ 하는 태도다. 그러면 인간을 이루는 기본요소의 하나인 분노의 힘을 잃게 된다. ‘참여’의 기회도 영원히 놓치는 것이다.”-에셀의 ‘정다운’ 채찍이다.
2011년 초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시민봉기가, 같은 해 9월 17일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으로 나타났다. 시위자들은 미국 맨해튼 남쪽 주코티 공원에 천막을 치고 1퍼센트의 기득권층에 저항했다. 분노의 목소리는 곧 유럽으로 번지고 전 세계적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다소 가라앉은 듯하지만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이다. 인류 역사상 전 세계적으로 99퍼센트가 동시다발적으로 ‘분노’와 ‘점령’의 기치를 내걸고 1퍼센트에 대적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지난해 시사주간지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the protester)’를 선정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시위자’는 곧 ‘분노하는 다수’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분노할 줄 아는 동물이다. 분노를 모르는 인간은 노예다. 그리고 역사는 달리 말하면 곧 저항사다. 저항이 없는 역사는 공동묘지일 뿐이다. 태초에 분노가 있었다. 무화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제(禁制)의 철망을 뚫을 때 분노가 치솟았다. 그때 아담이 분노하지 않았다면 ‘이성적 인간’은 태어나지 못하고 에덴동산에는 박제된 ‘유인원’이 남게 되었을 것이다.
나를 가리키는 말의 ‘아(我)’는 손(쒜)에 창(戈)을 들고 서 있는 모양의 상형이다. 손에 창을 들고 자기를 지키는 형상을 ‘나’로 표기한 옛 사람들의 예지가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때의 ‘나(我)’는 사적 개인과 더불어 공적 국민, 인류 등을 포함한다.
“만일 노예가 그 앞에 서 있다면 반드시 진심으로 슬퍼하고 분노해야 한다. 진실로 슬퍼함은 그의 불행을 슬퍼하기 때문이며 분노하는 것은 그가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 중국의 저항작가 루쉰의 말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哀其不幸
怒其不爭
루쉰은 또 이런 말도 남겼다.
“밝은 빛의 세력이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싸우지 않고, 만약 사악한 세력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너그럽게 감싸는 것인 줄로 착각하여 덮어두고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혼돈의 상태는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도 여기에 한마디 보탠다.
“백인의 차별보다 더 무서운 것은 흑인 스스로의 열등감이다. 복수하지 않고도 폭력의 악순환을 깨뜨릴 방법은 혹인 스스로 권리의식을 찾는 길이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솔론은 “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똑같이 분노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라고 말하고, 미국의 워싱턴은 “사슬에 묶여서 똑바로 걷는 것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쪽이 훨씬 더 났다”고 주장했다.
오래되고 낡은 집을 뜯고 새로 지으면 진보요 그대로 두면 보수다.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동물은 전진한다. 신체구조부터 그렇다. 후퇴할 때도 뒷걸음질이 아니라 뒤로 돌아 걸어간다. 인류는 원시상태에서 진보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 뒷걸음질이 정상이 아니듯이 역사를 뒤로 돌리는 것은 무지이거나 무모한 짓이다.
고(故) 리영희 교수가 사상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J. B. 베리(1861~1927)는 『진보의 관념』에서 “진보는 서양문명의 중심개념”이라 지적하였다. 서양문명뿐이겠는가. 태고에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이 비슷한 시기에 싹이 트고 진행되다가 중세(中世) 이래 동양(중국)에서는 요·순·우·탕의 치세를 이상향으로 하는 상고주의(尙古主義)가 통치철학이 되면서 ‘동양적 전제’가 계속되고, 서양에서는 천부인권론에 따른 분노와 저항이 자리 잡으면서 합리주의와 과학정신으로 동양을 앞서게 되었다. 물론 동양에서도 분노와 저항의 진보사관이 있었고, 서양에서도 전제군주 천년왕국의 퇴보사관이 있었다. 동양에서도 전제와 싸운 사상가가 있었고 서양에서도 그런 사람이 많았다.
사유하는 ‘이족동물(二足動物)’은 지극히 이기적이어서 좀체 손해 보는 일에는 나서지 않으려 한다. 또 오랜 ‘동양적 전제’로 노예근성도 DNA(유전자) 속에 남아 있다.
독일의 저항 목사 마틴 니뮐러의 시 「그들이 왔다」는 많이 인용되지만 항상 새롭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천주교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인이었으므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이제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2.
이 책은 <기독교사상> 2009년 2월호부터 2년여 동안 ‘인간 진보와 저항의 발자취’란 이름으로 연재한 것을 보완하고 추가하여 묶었다. 연재 기간은 이명박 정권 아래 민주주의 후퇴, 서민생계 파탄, 남북관계 적대라는 반동의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용산참사, 총리실 민간인 사찰, 촛불집회 참가자 지명수배, 노무현 전 대통령 정치보복, 4대 강 파헤치기 등 반시대적 ‘백색전제’가 활개치고, 족벌신문과 어용화된 방송이 ‘이명박 찬양’을 한목소리로 내면서 비판과 저항세력을 좌경종북으로 몰아쳤다. 6월항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유신·5공 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천박한 모습이었다.
동학혁명, 3·1항쟁, 4월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그리고 두 차례 민주정부 수립의 역사를 가진 우리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아랍의 봄’ 시위가 계속될 때 ‘먼 산 불구경’을 했다. 리비아의 카다피, 이집트의 무바라크, 튀니지의 벤 알리, 예멘의 살레 대통령이 쫓겨나거나 처형될 때 한국에서는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이 다시 세워지고, 박정희의 거대한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역사의 역설일까, 아니면 역사의 반동현상일까.
‘인간 진보와 저항의 발자취’를 연재하면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시기마다 소수의 선각자들이 분노와 저항을 통해 인류사를 진보시켜왔음을 보았다. 그들 대부분이 기득세력의 구조화된 폭력에 육신이 찢겼지만, 그들의 순혈이 몽매한 민초들을 각성시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데 기여했음을 보았다.
책을 쓰는 데는 미흡한 점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의 진보와 저항의 사력을 담지 못했다. 이것은 순전히 저자의 한계 때문이다. 그쪽 분야에 도통 지식이 없다. 쿠바 해방의 체 게바라는 알면서도 베트남 인민들의 위대한 저항, 아시아인 최초의 반제투쟁 기수 필리핀의 호세 리잘, 라틴 아메리카 5개국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는 몰랐다. 오로지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그럼에도 단행본으로 엮는 용기를 낸 것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1퍼센트가 99퍼센트의 자산을 독점하는 한국사회의 구조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에서다. 다행히 이 땅에서도 분노의 목소리, 저항의 대열이 움직이고 각성한 진보와 저항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역사의 맥을, 경험을 아는 지혜가 중요할 것이다.
덧붙이자면, 에릭 홉스봄이 그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에서 갈파한 경구 때문이기도 하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출판 시장이 지극히 어려운 때 책을 내주신 ‘철수와영희’의 사장님과 직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연재가 쉽지 않았던 시기에 글을 실어주신 <기독교사상>의 한종호 주간님께 사의를 표한다.
2012년 새봄, 김삼웅
1.
태초에 저항이 있었다
고대
동양 사회의
진보와
저항사상
‘상고주의’ 속에서도 진보사관 싹터
일반적으로 동양에는 진보의 개념이 없었던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옛날의 문물을 숭상하여 모범으로 삼는 ‘상고주의(尙古主義)’가 동양사의 중심 개념어가 될 만큼 동양사에서 인간의 꿈은 현세나 미래보다 과거 지향적이었다.
동양(중국)의 유교는 과거에서 이상향을 찾았다. 백성이 ‘격양가’를 불렀다는 전설의 요·순 시대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뿐만 아니라 주(周)의 문왕과 무왕, 한나라의 고조와 당의 태종과 현종이 다스리던 시대, 심지어 이민족인 청(淸)의 강희·건륭 시대 역시 성군들이 정치를 펼쳤던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고주의 유교사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이나 진보의 개념이 설 땅을 찾기 어려웠다.
대신 자연스럽게 천명사상(天命思想)이 나타나 자리 잡게 되었다. 백성을 다스리는 제왕은 하늘의 명령을 받는 사람으로, 곧 ‘천자(天子)’ 라는 인식이었다. 하늘의 아들인 천자는 선정을 베풀어야 하며, 왕조나 시대에 따라 유기체같이 생성·발전·쇠퇴·멸망한다는 순환론이 있을 뿐, 인위적인 변혁은 용납되지 않았다. 일치일란(一治一亂) 즉, 태평성대와 난세가 순환적으로 교체된다는 인식이었다. 카를 비트포겔의 ‘동양적 전제’란 바로 이런 체제를 두고 한 말이다.
공자와 같은 대학자·사상가들이 나와서 요·순·우·탕을 찬양하고 임금을 사모하면서 동양에서는 상고주의 유교사관이 수천 년 동안 지배 질서로 정착되고 유지되었다. 고대 동양 사회는 왕조의 흥망성쇠는 있었지만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의지는 매우 희박했다. 그렇다고 진보와 저항사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압제와 불평등이 있는 곳에는 늘 저항이 나타나고 진보사상은 이를 토양으로 삼아 자라기 마련이다.
중국에서는 서주(西周) 말기에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5원소가 우주 간의 모든 생성 변화의 근본이 된다는 오행사상(五行思想)이 생겼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진보의 실천을 희구하는 오행사상의 최초 주창자는 추연(鄒衍)이었다. 이 사상은 제나라 산동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중국 사상의 큰 줄기가 되었다. 동중서(董仲舒)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도 유행했다. ‘하늘과 인간은 하나’라는 세계관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천명사상·오행사상·민본사상 등과 함께 유가의 전통 사상 속에서도 진보사상은 싹트고 면면히 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동양의 유교는 서양의 가톨릭에 비해 전제적 권력이 약했던 까닭에 역설적으로 동양에서 진보사상이 싹트기가 그만큼 더뎠던 것 같다. 그러나 억압에 저항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에 속한다. 고등동물인 인간도 저항과 비판이라는 본성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주자학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서는 비시지심(非是之心) 즉,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을 사단(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씨) 중의 하나로 치지 않았던가.
동양에서 진보·저항사상의 선각자를 꼽으라면 단연 기원전 4세기 인물인 맹자(孟子)라고 할 수 있다. 맹자는 태평세와 난세가 순환적으로 교체되는 치난론(治亂論), 즉, 일치일란의 역사 법칙을 제시하면서 난세의 절대왕권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인간의 정치와 역사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순환적인 변혁의 과정을 밟아 진보하는 것으로 보았다. 『맹자』에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제나라 선혜왕은 하왕조(夏王朝)의 걸왕을 쫓아내고 은왕조(殷王朝)를 세운 탕왕과 은왕조의 주왕(紂王)을 축출하고 주왕조(周王朝)를 창건한 무왕(武王)의 사례를 들며 맹자에게 물었다.
“아무리 폭군이라도 신하로서 군주에 반역하는 것이 타당한가?”
맹자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인(仁)을 해치고 의(義)를 해치는 자는 이미 군주가 아닙니다. 일개 야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개 야인인 걸주(걸왕과 주왕)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군주를 반역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맹자의 폭군방벌(暴君放伐) 사상의 핵심이다. 인의와 왕도를 저버리고 백성을 학대하는 패도를 행할 때는 천자나 군주라도 서슴지 않고 쫓아내거나 교체해야 한다는 혁명 사상이었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교로 삼아 500년 동안 사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유학의 양대 산맥이라 할 공자는 숭배하면서 맹자는 배척했다. 그의 혁명 사상을 배척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 역사는 혁명을 모르는 정체된 사회가 되고 말았다.
한 나라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다. 그 다음이 사직이며 임금이 가장 가벼운 존재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에 들게 되면 대부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무도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제후를 바꾸고, 천자가 국가를 위태롭게 하면 그를 몰아내고 현군을 세운다. 그리하여 좋은 재물로 시기에 따라 제사를 올렸는데 정해진 한발이나 홍수의 재해가 발생한다면 사직단과 담을 헐어버리고 다시 세워야 한다.
맹자의 거침없는 폭군방벌론, 혁명 사상을 들은 제나라의 선혜왕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를 돌려보냈다. 동양에서는 맹자 말고도 진보 인권 사상을 제기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로 기원전 468~376년경에 살았던 묵자(墨子)는 전통적인 유가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겸애설을 주장한 진보사상가이다. 그는 주(周)나라 대(代)에 확립된 봉건제의 근간인 군왕과 귀족들의 세습 제도를 반대했다.
그는 신분과 재산의 상속은 “자기 노력에 의하지 않은 부귀”(無故富貴)로서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재산의 사적 소유를 반대하고 공동 소유를 주장했다. 이런 묵자의 사상에 대해 기세춘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사유 제도가 있는 한 도둑을 없앨 수 없다는 민중적이고 혁명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재산상속과 사유제를 반대했다는 것만으로도 묵자는 위대한 인간해방 사상의 시조라 할 것이다.”
묵자는 자신의 책 『묵자』에서 “하늘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귀한 자와 천한 자, 측근인 자와 소원한 자를 차별하지 않지만 어진이는 들어 높이고 어질지 못한 자는 억누르고 내리친다(雖天亦不辨 貧富貴賤 遠邇親疏 賢者擧而 尙之 不肖子 抑而廢之)”라며 인간의 평등사상을 과감하게 주창했다.
서기 2세기 무렵의 학자 하휴(何休)도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소박하지만 체계적인 진보사관을 제기했다.
그는 군왕이 바뀌고 왕조가 교체되면서 점점 더 좋은 임금이 나온다고 보았다. 즉 복희·신농·황제 등 전설적인 제왕들로부터 시작해서 성군으로 추앙되는 요·순·우를 거쳐, 은의 탕왕, 주의 문왕으로 이어지는 여러 차례의 혁명을 거쳐서 곧 이상적인 신왕이 출현될 것이 기대된다고 했다. 이렇게 이상 군주가 장래에 출현할 것으로 공자도 예상했다고 그는 해석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장삼세(長三世)’의 이론을 내놓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의 역사 발전 사관은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삼세(三世)란 공자가 알고 있었던 세 개의 시대를 말한다. 즉 공자가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시대, 할아버지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시대, 그리고 전문(轉聞)해서 알게 된 증조부·고조부의 시대, 이렇게 세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전문의 시대는 쇠란(衰亂)의 시대이고, 들어서 알던 시대는 승평(昇平)의 시대이며, 보던 시대는 태평(太平)의 시대이다. 다시 말하면 쇠란 → 승평 → 태평으로,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세상은 발전·향상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17세기 당나라의 문인·사가 왕부지(王夫之)가 있다. 왕부지는 정통적인 유교 사상의 일대 혁신을 주장하면서 사회와 문화 심지어 인간의 도덕조차도 점차 진화한다는 진보사관을 제시했다. 끝까지 청조(淸朝)에 출사를 거부하고 산림에서 방대한 저술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저술은 대부분 금서로 묶였다.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나”
대체로 역사의 흐름에서 치세는 짧고 난세는 길었다.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36명의 군주가 신하에게 피살되고 140개의 제후국 가운데 10여 개만 남고 모두 멸망했다. 이 시기는 극도의 혼란기였다.
주(周)나라 왕실이 서안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기원전 770년 이후부터 기원전 403년에 이르는 360여 년간을 춘추시대라 한다. 공자가 편찬한 『춘추』를 토대로 이런 이름이 생겼다. 이 시기 주 왕실이 쇠퇴하고 수백 개의 제후국으로 분열되어 다투다가 전국(戰國) 7웅(七雄)의 하나인 진(秦)이 천하통일을 했다. 진왕은 통일 후 왕호를 황제로 고치고 스스로 시황제라 불렀으며, 짐(朕)·폐하(陛下)·조(詔) 등의 용어를 정했다. 봉건제를 폐하고 36군으로 나누는 등 군현제를 시행했다.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소전(小篆)이라는 통일된 문자를 만들고,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시켰으며 법전을 완성했다. 대외적으로는 만리장성을 쌓아 흉노족을 몰아냈으나 초호화 아방궁 등 대형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에 큰 고통을 주었다. 백성이 정치에 대한 논의를 못 하도록 분서갱유를 감행했다. 영생을 추구하며 불로초를 구하다가 창업 16년 만에 지방 순행 도중 병사했다.
진시황제는 뒷사람이 ‘천고일제(千古一帝)’라 부를 만큼 유사 이래 최고의 권력과 호사를 누렸다. 백성에게는 그만큼 고통과 질곡이 따랐다. 대를 이어 황제가 된 아들 호해는 진시황의 과오를 고치기는커녕 더 극단으로 몰아갔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호해 때의 정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법령과 형벌이 날로 가혹해지자 여러 신하들과 사람들이 스스로 위험을 느꼈고 모반하려는 자가 많아졌다. 계속해서 아방궁을 짓고 치도(馳道)와 동궤(同軌)를 건설하느라 세금은 더욱 늘어났고 부역의 징발이 그치지 않았다. (…) 신하를 처벌하는 것이 더욱 엄격해졌고 백성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는 자가 현명한 관리라고 여겨졌다. 길에 나가보면 행인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형벌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시장 바닥에 가보면 사형당한 시체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다. 이러다 보니 사람을 많이 죽인 자가 오히려 충신 대접을 받았다.
중국 사서에 가끔 나오는 ‘저의반도(楮衣半道)’라는 말이 있다. ‘저의’는 죄수가 입은 주황색 옷으로 이 말은 즉 길에 다니는 사람의 반이 죄수라는 뜻이다. 폭정의 극한을 의미한다.
어느 시대나 폭정에 저항하지 않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죽어버린 공동묘지와 다르지 않다.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노나라의 대학자·사상가·교육자인 공자는 인(仁)의 정치 곧 덕치를 주장하고, 그 실천 방법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중시했다. 그러나 진시황과 호해를 거치면서 인의 왕도정치는 실종되고 패도정치가 천하를 어지럽히고 백성의 고혈을 빨았다.
이때 처음으로 저항의 횃불을 든 사람은 진승(陳勝 ?~208 BC)과 오광(吳廣 ?~208 BC)이다. 중국 역사에서 크고 작은 내란이 수백 수천 번 발생했고, 중국 전체를 혼란으로 빠뜨린 ‘대동란’도 아홉 차례나 일어났다. 대부분 농민들이 중심이었다. 진승과 오광의 농민반란을 시작으로 녹림·적미의 난, 황건적의 난, 수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안녹산의 난, 황소의 난, 백련교도의 난, 이자성의 난, 태평천국의 난이 뒤를 이었다. 모두가 ‘농민에 의한’ 반란으로서, 개중에는 왕조를 창건하기도 했다. 그 시작이 진승과 오광의 횃불이었다.
진나라의 폭정 가운데 특히 분서갱유(焚書坑儒)는 독특하다. 분서는 진나라 역사 기록, 박사관 소장의 책, 의약·점복·농업서 이외는 민간이 소장하는 책을 전부 소각하고 위반자를 극형에 처한 걸 말한다. 갱유는 학자 460여 명을 함양에서 흙구덩이를 파고 묻어 죽인 일을 말한다. 이로써 선비·학자의 씨가 마르고 비판과 저항은 멸문지화를 각오하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동한(東漢)의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에는 당시의 실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황제에 이르러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는데, 안으로는 큰 공사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수확의 3분의 2를 세금으로 징수했다.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억제한다는 명분으로 상인들을 모두 징발했다. 남자들이 힘써 농사짓고 여자들은 힘써 방직했지만 늘 양식과 의복이 부족했다. 천하의 재물을 모두 긁어모았어도 황제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마침내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고 원망하여 도망하거나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209년, 그러니까 호해가 즉위한 다음 해에 마침내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일으켰다. 진승은 남의 집 머슴 출신이고 오광은 농민이었다. 이들은 노력 동원에 징발된 무리 900명과 함께 지금의 북경 지방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때마침 홍수에 길이 막혀 정해진 날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기일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참수되는 것이 당시 진나라의 법령이었다. 가도 죽고 가지 못해도 죽게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진승과 오광은 인솔하던 장교를 죽이고 무리들을 향해 “어차피 죽을 바에는 큰일을 위해 싸우다가 죽자. 어찌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겠는가?” 하며 선동했다. 이것은 마른 들판에 던진 불씨가 되었다. 도처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반란군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진나라에 멸망당한 6국의 옛 귀족들, 진시황의 폭정에 숨죽이고 있던 식자들, 원한이 쌓인 백성, 정치 변혁기에 한몫 잡으려는 기회주의자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진승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인민정부라 할 장초국(張楚國)을 세우고 장초왕이 되었으며 오광은 가왕(假王)이 되었다.
서한(西漢) 시대의 학자 가의(賈誼)는 진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옹기를 새끼로 꿰어 창문으로 삼을 만큼 가난한 집의 자식으로 천하고 일정한 거처도 없었으며, 재능은 중간치도 못 되어 현명하지도 부유하지도 못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병졸들 속에 섞여 있다가 수백의 무리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했는데, 나무를 꺾어 병기를 만들고 장대를 세워 깃발을 걸자 천하가 구름같이 호응했고, 산동 호걸들이 모두 일어나 진을 멸망시켰다.
미천하고 재능도 없는 사람이 왕후장상하유종(王侯將相何有種), 즉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나?’라는 만민평등·진보사상의 기치를 들고 저항에 나선 것은 세계사적인 피압박 민중 해방운동의 횃불이었다. 두 사람은 얼마 뒤에 부하들에게 암살되어 품은 뜻을 펴지는 못했지만, 인류사에서 어느 사상가·철학자에 못지않은 인간 진보의 큰 획을 그었다.
진승이 세운 장초국은 불과 6개월 후에 사라졌지만, 그의 과업은 같은 농민 출신인 유방(劉邦)이 계승하여 성공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얼마 뒤 유방은 한(漢) 제국을 세우고 한고조가 되었는데, 진승을 위해 묘지기를 둘 만큼 그를 높이 평가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승을 열전이 아닌 세가(世家)에 배열하면서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진섭세가(陳涉世家)를 찬술한 이유를 “진의 멸망이라는 대사건은 진승의 거병이 발단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진승을 그만큼 높이 평가한 것이다(진섭은 진승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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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 <민주전선> 등 진보매체에서 주간을 역임했으며,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로 활동했다. 제7대 독립기념관장을 지냈으며,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제주4·3사건희생자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자문위원, 『친일인명사전』 편찬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로 있다.
저서로는『친일정치 100년사』,『곡필로 본 해방 50년』,『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단재 신채호 평전』,『백범 김구 평전』,『심산 김창숙 평전』,『녹두 전봉준 평전』,『안중근 평전』,『약산 김원봉 평전』,『장준하 평전』,『죽산 조봉암 평전』,『만해 한용운 평전』, 『김대중 평전』,『리영희 평전』,『김상덕 평전』,『이회영 평전』,『송건호 평전』등이 있다.
출판 잡지 <라이브러리&리브로>에 권두서평 ‘역사의 물굽이를 바꾼 한편의 글, 책’과 <책과 인생>에 ‘책수레 만리길’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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