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 속에 태어나는 아이들
마을 주민 128명이 돈을 모아 내부 수리를 하고 문을 연 조합식 동네 마실방 ‘뜰’에 펼침막이 붙었다. 아기의 웃는 얼굴과 함께.
“갓골목공실 방인성, 진진선 부부의 둘째 딸
방단아의 여동생
단비가 태어났어요!
모두 축하해 주세요!”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어라, 갓골목공소 방인성이 둘째 딸을 낳았구먼.”
“그놈 참 예쁘게 생겼네.”
“예전에는 딸을 낳으면 외로 꼰 새끼 금줄에 숯과 솔잎을 끼웠지. 잡귀 들지 말라고 말이야.”
“지역 신문도 보면 만날 혼사나 초상집 광고만 내. 아이들을 낳아야 혼사고 초상이고 날 게 아니여. 안 그려?”
“왜 아니여? 작은 동네 한 달에 몇이나 낳는다고. 면사무소에서 출생 신고를 할 테니 담당에게 물어서 낳는 족족 이렇게 붙이면 좋겠네.”
“그럴 게 뭐 있어. 출생 광고는 ‘뜰에서 좀 하다가 아주 면사무소에서 맡아서 정문 위에 걸라고 하지.”
어린이는 동네에서 키운다지만 동네에 어린이가 없으면 얼마나 적막강산인가? 어린이는 내일의 지역 구성원이다. “어린이는 자연 속에서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고, 다문화 가족이건 장애인이건 사이좋게 같이 놀고, 마을 주민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이것은 우리 동네 어린이집의 교육 목표다.
보통 노약자라면 어린이와 어르신들, 장애인을 든다. 우리 사회 전반이 그렇지만, 농촌의 고령화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그것이 왜 걱정인가? 어르신들의 지혜와 경험을 살려 일자리를 만들어 드려야 한다. 텃밭에서 나온 농산물과 전통 요리로 마을 장터를 열고 마을 직판장 조합을 만든다. 일본에서도 할머니 마을 직판장이 전국에 1만 7천 곳이 생겨 ‘패전 후 유일한 농정 성공 사례’로 꼽히지 않은가. 어르신들이 마을 공예와 합창단에 들어가고, 책을 읽고 문학 기행을 하며, 자서전을 쓴다. 나라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역사, 개인의 역사가 있다. 어른들 일생에 근대사가 응축되어 있다. 재학 중인 장애 학생들이 노래하며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꿈이자라는뜰’ 농장에 오가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학교를 마친 뒤 그들은 집에서 유기농장으로 출퇴근하며, 농산물과 가공품을 지역에 공급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노약자’들은 지역의 축복이다. 한 지역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들 얼굴에 웃음이 있고 얼마나 행복한지가 그 지역의 인간화 지수를 알아보는 가늠자가 되지 않을까?
주민 교사와 현장 교실
충남 홍성군 홍동면의 우리 지역에는 위에 말한 어린이집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마을 대학(풀무학교 전공부)과 평생 교육 기관인 도서관이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공립이지만 학부모가 같은 지역에 살고, 교육부 전원 학교로 지정되어 방과 후 교실을 운영하기 때문에 지역의 모든 학교 간에 일관 교육이 이루어진다. 어린이들이 축하 속에 태어나 건강하고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내게 하는 것은 지역의 의무다.
학교가 지역의 외딴 섬이 되기 시작한 것은 1889년 배재학당 설립으로 근대 교육 모델이 도입된 때부터 백 년 남짓한 기간이다. 그 이전에는 수천 년 동안 조상들은 지역에서 배우며 철이 들었다. 마을 공동체에서 인간관계의 사회성, 일을 통한 생활력, 체력, 전통 문화의 지혜, 생명이 나고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며 실재 세계를 체험하고, 계절에 대한 미적 감수성, 대자연의 순환, 신생의 리듬과 흙에 순응하는 미덕을 내면화했다. 학교가 지역과 가정의 교육력을 살리지 않고 교사의 힘으로만 참고서와 인터넷에 눌린 학생들에게 활기 있는 전인 교육을 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농민의 협력으로 ‘주민 교사’, ‘현장 교실’을 만든다. 학교에 텃밭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지역 현장 교실에 가서 배우는 것이 효과가 크다. 지난 5월에 지역의 중학교에서 방과 후 교실을 운영하는 ‘햇살배움터’ 네트워크 발족식을 했는데, 지역에서 논배미, 꿈이자라는뜰, 신나는지역아동센터, 풀무학교 생협, 원예조합 가꿈, 갓골목공실, 여성농업인센터, 교육농장 등 열세 개 단체가 참가했다. 단체마다 자원자가 두 명에서 일곱 명까지 활동하고 있다.
동네에 목공소가 하나 있는데, 학생들은 거기에서 배운다. 경쟁을 의식하지 않고 제 손으로 만드는 즐거움이 있다. 도자기나 건축, 사진, 영화 등 다른 활동도 마찬가지다. 논 교실에서는 생물 다양성을 조사한다. 밭 교실에서 흙과 미생물을 일하며 배운다. 냇가 교실에서는 물과 오염 대책을 공부한다. 원예조합 ‘가꿈’에서는 꽃을 배우고 가꾼다. 학생들은 지역을 산책하면서 장터에 들르고, 도서관에 와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책을 읽거나 역사를 배운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동네 마실방 뜰이 있고, 마을 축제에는 학생과 주민이 같이 참가한다.
학생들은 마을의 교육 환경에서 새 지식을 얻는 기쁨,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는 기쁨, 새 사회의 가능성을 믿게 되는 기쁨을 얻는다. 무엇보다 협력 주제 학습으로 지역에서 생태와 평화적 과제를 여러 과목의 교육 과정과 연계해서 공동으로 조사하여 이해하고 문제 해결을 찾는다. 경쟁이 아니라 문제를 공동으로 이해하고 공동으로 해결하는 학습이다. 마을은 펼쳐진 교실이고, 학교는 지역의 기관이 되고, 오늘의 학생은 내일의 협동적 지역 사회의 주민이다.
바보 이반의 공화국
지역의 풀무학교에서는 초기부터 마을과 학교가 같이 나가야 한다는 사상이 강했다. 초창기 때 공부 잘하는 사람은 시골에 남고 제일 못하는 사람이 대학에 가라고 했다. 물론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남았지만, 그들은 성적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떳떳이 학교 생활을 했고, 졸업 뒤에는 건강한 생각과 경험과 지혜로 농사를 짓고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중요한 일을 했다. 공부가 전부가 아니고 모든 사람이 자기 할 일과 쓸모가 있다는 교육의 귀한 본질을 그들이 증명한 것이다.
학교에서도 말로만 할 수 없어서 농촌에 남은 졸업생들과 어려운 농촌 문제에 고민을 같이 하면서 해답을 찾았다. 유기농업과 소농의 협동조합이 그 대답이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한 50년 학교의 역사는 수업과 학생 지도를 하면서 마을 만들기에 학교가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을 추구한 기간이었다.
그 기간에 탄생한 협동조합으로 풀무소비조합, 풀무신용조합, 농기계조합(중단), 풀무도서조합, 재생비누조합, 농가공조합(풀무학교 생협), 재생지 포장재 제작소(중단), 축산가공조합(중단)이 있고, 교육과 문화와 관련해서는 갓골어린이집, 최초의 지역 신문인 ‘홍동 소식’, 대체공업연구소, 전공부, 홍동밝맑도서관, 유기농연구소, 목각실(중단), 유물관이 있으며, 유기농업과 오리농업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요즘에는 주민들과 함께 할머니조합, 발효식품조합, 토지재단, 농민문화연구소, 의료조합, 마을 돈(지역 화폐), 지역역사자료관, 햇살에너지조합 등을 추진 중이다. 이렇게 작은 지역에 각급 학교와 여러 협동조합이 올망졸망 갖추어졌다.
나열해 보면 여럿 같지만 학교는 모판에 작은 씨앗을 뿌리고 졸업생과 지역 주민들이 힘을 모아 가꾼 것이다. 성서 말씀대로 바울이 씨를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다. 특기할 일로 농협이 순환 농업을 위해 미생물 퇴비 공장을 지었고, 주민들이 지역 먹거리를 이용한 조합식 식당도 두 개나 만들었다. 어린이집, 전공부, 도서관 같은 것은 주민들이 짧게는 3년, 길게는 십수 년간 한 구좌 만원의 모금으로 지었다.
동네에 ‘이반의 농장’이라는 교육 농장이 있다. 학생들은 이 농장에서 기르는 작은 동물을 좋아한다. 손수 집을 짓고 메탄가스를 부엌에 이용하며 조용히 일하는 주인 부부는 동네의 이반이다. 편리를 추구하는 세상에 얼렁뚝딱 건축 조합원으로서 전기를 안 쓰고 생태적 화장실을 들인 흙집을 지은 이반도 있다.
톨스토이 민화에 나오는 바보 이반은 늘 일하면서 정직하고 소박하게 산다.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환영하여 같이 살고 폭력을 쓸 줄 모른다. 이반의 여동생 마르타는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장애인이지만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세묜과 타라스는 군사력이나 자본력의 작은 도깨비에 끌려 다니며 이반을 괴롭힌다. 정말 큰 도깨비는 말만 잘하는 이론가들이다. 그러나 작은 도깨비, 큰 도깨비가 아무리 이반이 밭에서 자연의 법도대로 곡식을 가꾸는 것을 방해해도 바보 이반은 오늘도 묵묵히 일을 한다. 마틸다는 음식을 대접한다. FTA가 닥쳐도 그들의 바보 행진은 계속될 것이다. 잘못된 세상과 인간성을 구할 사람은 그들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
작게 시작한 생협은 조합원이 750명, 신협은 조합원이 2700명, 자산 규모와 매출액은 각각 250억, 350억이 되고, 지역은 ‘유기농업의 메카’라 불리게 되었다. 신협은 농촌에서 도시로 역진출해 분점을 냈고, 생협은 800평의 직매장을 내어 생활권을 넓혔다. 이렇게 조합은 진화와 분화를 계속하고 있다. 농협도 올해 지역 농산물 판매점을 내기로 했다. 토지와 자본, 기술이 없는 젊은 귀농자가 노는 땅을 빌려 작은 시설 원예 협동조합을 만들고, 그런 단위 조합이 모여 복합체 협동조합을 이루는 ‘젊은협업농장’을 만들었다. 의미 있고 현실적인 실험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빵과 꽃과 책과 이웃과 음악과 차(커피)와 웃음이 아닐까? 전국 면 소재지의 중심에는 면사무소와 지서와 다방의 풍경이 있다. 우리 지역에는 면소재지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에 ‘갓골’ 마을이 있다. 갓골에는 우리 밀 빵집과 ‘자연의 선물’ 유기농산물 가게와 조합이 있다. 원예조합 ‘가꿈’과 ‘그물코 출판사’, ‘느티나무 헌책방’이 있다. 학생, 어른, 홈스쿨링 어린이들이 드나들며 여러 강좌를 듣고, 협의와 창조적 문화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생각과 희망의 홀씨를 날려 보내는 도서관과 어린이집, 전공부, 교육농장, 논배미 사무실이 있다. 스몰톡 영화 제작팀과 농민 사진 작가와 뻐꾸기 합창단이 드나든다. 조약돌만한 마을이지만 모든 지역의 중심이 하향식 행정 관청보다 주민의 생활과 자치와 문화가 싹트는 공간으로 이동하고, 그런 지역이 호수의 파문같이 퍼져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농촌은 농사만 짓는 곳이 아니다. 귀농자가 농사지을 땅과 집이 있어도 막상 지역에 살려면 유통, 교육, 금융, 복지, 의료, 문화 모두가 걸린다. 지역은 산업으로서의 농사를 포함한 사람이 사는 유기체 사회라야 한다. 사람이 그렇듯 지역도 몸과 정신과 영혼이 구비되어야 한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말이 있다. 협동조합같이 사회적 약자가 스스로 자립하면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경제일 것이다. 즉 더불어 사는 기업이다. 교육 역시 더불어 사는 교육이라야 할 것이다. 그 교육은 각자의 천성을 발전시키고 생태와 평화적 공동체 안에서 자기 역할을 찾는 것이다. 대안 대학인 풀무학교 전공부에서는 먹을 것을 자급자족하고, 학교 부지가 논, 밭, 숲과 모든 기능이 있는 마을이며, 인문과 실습을 균형 있게 배우고, 지역에서 일할 인재를 기른다. 더불어 사는 정치는 이장, 주민 기관, 행정의 지역 문제 협의회가 첫걸음이 될 것이다. 더불어 사는 농업은 소농이 협력해서 유기농업으로 농사를 지으며 가공, 유통에 진출하고 소비자와 함께 지역 생활권을 만드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문화는 생활과 노동과 역사 속에서 지역 예술을 세계화한다. 더불어 사는 복지는 지역 농업과 일자리로 장애인과 어르신들을 활기 있게 한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더불어 사는 사회는 농촌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소통하고 교감하고 돌보고 치유하는 사회다. 연민compassion(같이 아파함)의 사회다. 그런 사회는 세상을 시장화하고 상품화하고 그 가치로 보는 자본의 폭주 대신, 영혼의 자유와 존엄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바탕이 되고 목적이 되는, 아래에서 시작되는, 지속 가능한 안정된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