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홍순명 선생이 2010년 첫 번째 농민교양강좌 때 강의했던 내용입니다.
‘평화 사상과 정신을 기르는 홍동밝맑도서관 소식지 12’(펴낸 날: 2012년 7월 20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난 달을 맞이하여 조금 손질하여 게재한 것을 홍순명 선생의 허락을 받아 ‘나비웹진’에 옮겨 싣고 함께 읽고자 합니다.
글의 내용에 맞는 사진을 골라서 집어넣었습니다. 끝부분에는 2011년 10월 22일에 열린 홍동밝맑도서관 개관식 때 찍은 사진 몇 장을 덧붙여 둡니다.(편집자 주)
두 가지 평화
“내가 주고자 하는 평화는 이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여러분이 내가 주는 평화를 알았더라면” 하고 예수는 말했습니다. 예수가 그 말을 하던 당시는 팩스 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시대(기원전 27-서기 180년)였습니다. 패권주의 로마의 강대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여 유지되는 평화였습니다. 여기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평화로 생각하였습니다. 로마와 이스라엘의 평화는 미움과 보복의 악순환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다른 메시지였습니다. 미움과 보복을 형제애로 변화시키는 혁신적인 평화였습니다. 그 평화는 마음의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그곳은 하나님과 깊이 관계를 맺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입니다. 평화의 근원이고 창조자입니다.롬 15;13, 사 45;7 시 4;8 그리스도는 평화를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곧 그를 통해 모든 적대적인 관계에서 인류가 하나 되게 하는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는 길을 여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엡 1;14 성서에서 평화는 개인차원에서 예의,창 43:23 건강, 안면, 장수. 안전, 선종,출 18;7, 수 10;21,1 왕 22;17, 욥 5;23 시 4;8,38;3 잠3;2, 사 38;17 사회차원에서 질서, 정의, 평등, 평안, 그리고 국가 간의 좋은 관계삿4;17,1왕 5;26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는 평화의 반대인 차별이 철폐된 ‘하나’의 사회입니다.갈 3;28
평화는 유약하지 않습니다. 분노, 미움, 폭력에 지는 것이 약합니다. 예수는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나귀를 타고 적진에 들어가서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실현할 길을 여셨습니다. 그의 정신을 따라 흑백 인간 차별과 억압을 극복한 흑인의 워싱턴 행진과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제안을 채택하여 서독의 동독에 대한 인도적 지원, 아프리카 전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세상을 바꾸어갔습니다.
성서는 역사의 주재자가 하나님이며 역사의 과제는 그의 뜻에 따라 인류가 하나가 되고엡 2;14-17 인류가 하나님과 화해를 실현하는 것롬5;1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평화의 실현입니다. 곧 평화는 경제적인 것이나 군사적인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것입니다. 그런 종교와 역사의식으로 남북 평화에 대해 말한 이가 함석헌 선생입니다.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사진출처: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
평화를 위한 발걸음 ‘88 통일 선언’
그는 1958년 아무도 그런 소리를 못하던 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을 『사상계』에 발표하여, “한국의 분단과 고통에는 일본, 미국, 소련, 중국, 주변 강대국이 모두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대놓고 그들에게 바른 말을 못하는 것은 아무리 이념이라고는 하나 우리 동포끼리 너무 잘못했기 때문이다. 동포끼리 죽이고 받은 훈장을 무어라고 자랑하나? 뼈저리게 뉘우쳐야 한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통일, 독립 정신인데 그런 정신은 신앙심 없이는 될 수 없다. 나아가 우리가 겪는 시련을 통하여 하나가 되는 세계를 실현하는 것이 역사의 과제고 민족의 사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함 선생과 사상적 맥락을 같이 하는 이들이 주류가 되어 ‘88선언’을 하게 됩니다. ‘88선언’이란, 1988년에 「대한기독교교회 통일선언」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의미의 중요성만큼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88선언’은 민간기관 처음으로 분단과 통일에 대한 성서적 해석과 민족의 문제인 통일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이 선언은 1985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협의회에서 작성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350명이 넘는 회원, 교단 지도자들이 눈물로 기도하며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였고, 교직자만이 아니라, 정치가의 의견과 사회과학자, 성서학자들의 자문, 그리고 청년과 여성의 의견을 수용한 민족 양심의 큰 선언이었습니다.
‘88선언’의 요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부분은 신앙고백과 이 선언의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입니다. ‘88선언’ 이전에는, 전쟁의 모든 책임은 북한 정권의 침략에 있으므로 그들의 만행을 규탄, 증오하고 심판을 바라는 일반의 여론에 동조하는 것이 교회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통일 선언을 선포하면서 분단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어왔던 일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백한다.
1. 한국 민족의 분단은 세계 초강대국들의 동서 냉전체제의 대립이 빚은 구조적 죄악의 결과이며, 남북한 사회 내부의 구조악의 원인이 되어 왔다.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는 범해왔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 왔다. 분단은 전쟁을 낳았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 방지의 명목으로 최강 최신의 무기로 재무장하고 병력과 군비를 강화하는 것을 찬동하는 죄(시 33:11~20, 44:2~7)를 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반도는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각 분야에서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고, 동서 냉전체제에 편입되고 예속하게 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민족 예속화 과정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포기하고 자주 독립 정신을 상실하는 반민족적 죄악(롬 9:3)을 범하여 온 죄책을 고백한다.
2. 우리는 한국 교회가 민족 분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침묵하였으며, 면면히 이어져 온 자주적 민족 통일운동의 흐름을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분단을 정당화하기까지 한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남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각각의 체제가 강요하는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하여 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역죄(출 20:3~5)이며, 하나님의 뜻을 지켜야 하는 교회가 정권의 뜻을 따른 죄(행 4:19)이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요일 3:14~15,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하여 고통 받았고 또 아직도 고통 받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요일 3:17)이다.
둘째 부분에서는 통일의 원칙을 제시하고 원칙 실행을 위한 사항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고 있습니다. 곧 1972년 군사정권이 북한정권과 체결한 7.4공동선언의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 원칙을 수용하고 거기에 인도주의 원칙과 민족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참여를 강조하였습니다. 셋째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 교회의 과제를 들었습니다.
평화통일의 이정표 6.15공동선언
7.4선언은 국가 대표 간 체결한 것이 아니고, 일관성 유지 노력이 없던 데 비하여,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남북 대표 정상 사이에 체결한 6.15선언에는 이 88선언에서 준비된 많은 구체적 부분이 그대로 선언의 밑바탕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정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단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여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방안을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경제,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을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6.15공동선언의 모든 것을 포함한 내용입니다. 평화 선언입니다. 북한과 대립하고 배척하지 않고 민족의 양심과 성서의 평화정신으로 공존을 모색하여 그 정신을 정치와 역사에 적용한 선언입니다. 민족의 일대 양심선언입니다.
지난 해 독립학원에서 평화학습여행단이 풀무에 왔을 때, 독립학원 이사의 한 분인 히다카(日高) 야마가다 대학 선생은 티셔츠의 앞뒤에 평화헌법 9조(뒤에 나옴)를 일어와 영어로 인쇄하여 입고 다녔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우리도 이 귀한 ‘6.15선언’과 그 정신을 모든 학생과 국민이 알고, 우리도 옷 앞뒤에 써서 입고 다닐 만큼 공감하고 실천할 의지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 Independent Reunification 자주적인 통일
2. Gradual (Con)federation 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접근
3. Humanitarian approach 흩어진 가족 상봉 등 인도적 접근
4. Economic and cultural cooperation 경제의 균형 발전과 문화 교류
5. Holding consecutive dialogue 대화의 계속
평화 선언 정신의 확대
분단 체제의 평화적 해결 정신은 기독교와 정권 차원에서 평화 실현 주체인 일반 사회까지 확대가 되었습니다. 2009년 10월 10일 용봉산 입구에서 59년 전에 홍성 지역에서 죄 없이 학살당한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영령을 위로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하는 합동위령제가 열린 것은 통일을 향한 민족 구성원의 참여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행사로 생각합니다.
강희락 경찰청장은 홍성경찰서장의 대독을 통해, “비록 전시였다고 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공권력에 의하여 고귀한 생명이 희생되었던 불행한 역사에 대하여 깊은 성찰과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아울러 오랜 세월 동안 인내하며 지내오신 유족 여러분의 슬픔을 달래드리고 고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정부의 후속조치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라고 사과와 후속 조치를 약속하였고,
이완수 군수 대행은, “반세기 동안 희생자의 부조(父祖)와 자녀들은 피로 물든 비참한 희생 현장에서 오열하며 가슴 깊은 곳에 한을 담아 살아 오셨으며 사회의 편견과 무관심으로 온갖 고난을 겪어 왔습니다. 오늘 추모식을 계기로 그동안의 공포와 체념, 무관심과 무기력 속에서 고통 받으며 살아오신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여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른 역사의식과 민족 사회 양심의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종교와 정권과 서민을 대표하여 지방 관공서에서 과거를 반성, 고백하고 공존 방향으로 통일을 모색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올해는 국치 100주년, 한국전쟁 60주년입니다. 북한은 외세와 압제 밑에 100년을 지나왔다는 말입니다.
*일본의 평화헌법 9조의 내용을 영어로 인쇄한 티셔츠,
사진출처: http://blog.livedoor.jp/pastabco/archives/497293.html
일본의 평화헌법 9조
위에서 말한 것처럼, 히다카 선생은 앞뒤에 헌법 9조를 인쇄한 셔츠를 입고 왔습니다. “평화헌법 9조를 셔츠에 인쇄해 입으셨군요.”라고 하니까, “그럼요.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란, 일본 국민과 세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들렸습니다. 영어로 쓴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또 그런 생각을 할 뿐만 아니라. 절실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평화헌법은 일본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이 되고 자매학교는 모두 평화헌법 공부회를 하고 있고, 그 연장으로 한국 방문을 합니다. 다시는 과거 군국주의의 발흥을 막기 위하여, 끊임없이 강연을 하고 학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도 우익이 있어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군국주의화하여 자기들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합니다. 언론은 북한 위기를 선동하고 정권은 교사들에게 식전마다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부르게 하고, 거부하면 파면으로 위협하기도 합니다.
*사진출처: http://www.9-jo.jp/ko/index_ko.html
평화헌법은 이렇습니다.
제9조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기타 전력은 이를 보유하지 않는다. 나라의 교전권(交戰權)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평화헌법은 “일본의 패전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본에 주신 축복이다.” 애진학교의 초대 교장인 와다나베(渡邊晴季) 선생은 최근 발행한 교지 『아이신(愛眞)』에서 말했습니다. 와다나베 선생은 집 앞 길가에 간판을 달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달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고 하고, “일본 헌법 제9조야말로 세계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길 가는 친구들하고도 이야기하고, 동창회에서도, 이전의 제자들에게도 그 취지를 말한다고 합니다.
*아이신고등학교 전경, 사진출처: http://www.aishinhigh.ed.jp/index.html
친구들에게 말하면 많은 친구들은 “평화헌법은 좋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이야. 현실은 가혹해. 북조선을 보라. 실제로 일본의 상공을 미사일이 날아오지 않느냐?”고 의견에 반발합니다. 또는 “중국이 항공모함을 만들고, 센카쿠제도(尖閣諸島)를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하지 않느냐? 한국 사이에도 다케시마 문제가 있지 않느냐? 러시아와 북방 영토 문제도 있다. 그런 현실이 있지 않은가? 만일 적이 쳐들어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합니다. 그래도 와다나베 선생은 평화헌법은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우선 이 평화헌법은 원수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적을 만들기 전에 여기서 먼저 손을 내민다, 그것이 평화헌법의 갈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납치 문제도 북한을 제재(制裁)하자, 제재하자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재로는 납치 피해자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재를 되풀이하는 지금 일본의 태도로는 납치 피해자를 돌아오지 못하도록 움직이게 합니다. 북조선과 사이좋게 되면 자연히 돌아옵니다. 일본이 먼저 식민지 시대를 사죄하고 여기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제재로는 절대로 안 돌아온다는 것을 왜 모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애진 교지)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1861-1930), 사진출처: ko.wikipedia.org
일본 평화주의 사상의 원류(源流)
평화헌법을 말하면서 일본의 평화주의 사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조는 우치무라 간조일 것입니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8개월 전에, “나는 러일전쟁 비개전론자일 뿐 아니라, 전쟁 절대 폐지론자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죄악이다. 그리고 대 죄악을 범하고 개인도 국가도 영구히 이익을 거둘 자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전쟁은 전쟁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실제로 전쟁을 그치게 하지 않습니다. 아니 전쟁은 전쟁을 낳습니다. 전쟁으로 군비는 조금도 감축되지 않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마다 더욱 더 군비는 확장합니다. 전쟁은 전쟁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지, 평화를 위한 전쟁은 역사상 한 번도 있지 않았습니다. 청일전쟁은 그 명목은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더 큰 전쟁인 러일전쟁을 낳았습니다. 러일전쟁도 또 그 명목은 동양 평화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큰 평화를 위한 전쟁을 낳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은 한없이 탐욕스러운 야수입니다.”
러일전쟁이 끝난 뒤 쓴 그 글대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돌입하여 미국과 전쟁을 벌여 아시아를 황폐하게 하고 국토에 원폭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1893-1961)
사진출처: http://get.nccu.edu.tw:8080/getcdb/handle/getcdb/306370
우치무라의 제자로 전쟁 뒤 제2대 동경대학 총장이 되었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앙공론』 1937년 5월호에 「국가의 이상」이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거기에서 “국가가 혼미에 빠졌을 때는 이를 구하는 것이 이상이다. 이상을 밝히는 것이 혼미에서 구하는 길이다. 국가의 이상은 정의고 나라간의 정의는 평화다, 전쟁은 정의가 아니고 평화가 아니다.”라고 구약의 예언서를 들어 국가 권력자들을 비판하였습니다. 그해 10월에 히비야 공원에서 친구 후지이 다케시 7주년 기념강연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이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이상을 살리기 위하여 일단 이 나라를 장사 지내라.”라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런 글과 말로 결국 12월에 동경대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독립학원의 스즈끼 교장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평화를 주장하다가 1944년에 경찰의 취조와 8개월의 감옥 생활을 했고, 해방 후 방위비를 세금에 포함해 내는 것은 일본 헌법에 어긋난다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최고법원에 상소를 하였습니다.
독립학원 건물 바로 앞에는 와다나베(渡部彌一郞)란 농민의 집이 있습니다. 스즈끼 교장에게 감화를 받아 평화사상으로 함께 체포되어 옥중생활도 했습니다. 아들 와타나베 료조(渡部良三)도 그 사상을 양심에 깊이 새겨 징집되어 중국의 전선에 배치되어, 난징(南京)민간인 학살 사건 때, 신병의 담력을 키운다고 손발을 묶은 포로나 민간인을 총검으로 찌르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감연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때 심경을 그가 쓴 시가 있습니다.
울려 퍼지는 크신 이의 소리 들리니
“학살을 거부하라. 거기 네 목숨을 걸라.”
그 때문에 그는 호된 린치를 당했으나, 전쟁이 끝났을 때 그를 학대하던 상관은 풀이 죽고, 그는 어깨를 펴고 귀환하였습니다. 독립학원 이사장을 지낸 마사이케징(政池仁)은 민간인 최초로 한국에 사죄하러 와서 풀무학원에 들렸습니다.
6.15선언과 맞물린 평화헌법
일본의 자매학교들은 휴전선, 나눔의집, 안중근기념관, 독립기념관, 서대문형무소 방문 등 평화학습으로 해마다 한국에 오고, 애진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와다나베 선생이 평화헌법 9조를 집 앞에 써서 달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남북의 평화를 선언한 6.15공동선언을 이해하는 학생도 많지 않은 형편입니다.
일본학생의 평화학습은 과거일의 반성이고, 미래 우경화의 대두를 방지하자는 취지인데, 우리는 현재 진행 중이고 언제 촉발할지 모르는 위협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평화를 배우지 않고 관심이 적은 것은 우려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 탈북자의 수기(『국경을 세 번 넘은 여자』, 최진이, 북하우스, 2005)를 보니, 청진의 장터에서 젊은이가 전신주를 들이받고 죽었는데, 배가 고파서 남이 먹던 주먹밥을 가로채어 정신없이 먹으며 달리다가 일어난 일이었다고 합니다. 먹다 남은 주먹밥은 진흙탕에 떨어졌는데 벌써 누가 가져갔는지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죽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아무 관심 없이 늘 있는 일로 알고 이야기만 계속하더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어찌 같은 하늘 아래, 몇 시간 거리에서, 같은 동족 사이에서, 일상으로 일어나다니요!
출애굽기에는 애굽에서 노예로 가혹하게 일하는 이스라엘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신음과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닿았다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23-24) 북한 주민의 신음과 고통도 그럴 것입니다. 어찌 북녘 하늘만입니까? 남한 하늘에도 북녘 동포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북한의 타도를 목적으로 한 동족 간 대립, 북한 동포의 고통에 무관심한 회개, 평화 희구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야 할 것입니다.
남북 평화는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평화는 식량 의료등 인도적인 접근에서 문화, 경제로 확대되어 민족의 동질감을 회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도 여러 국내 문제가 있습니다. 화학물질이 물과 흙과 공기와 사람 몸을 오염시키고, 온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경쟁 속에서 어둡게 지냅니다. 나타나는 현상은 다양하지만 성장과 발전을 절대시하는 물신숭배의 피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깨져 전쟁이 일어나면 이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재앙이 닥칩니다. 분단을 구실로 비평화 세력이 더욱 억압과 차별, 대립을 가중하므로, 평화 실현에 국내 문제를 푸는 매듭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생각할 것은 한국의 6.15선언은 일본 평화헌법과 그리고 아시아 평화와 맞물려 있는 점입니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파기하고 군사력을 기르면 일본의 불행이고, 아시아 평화를 위협합니다. 3·1운동 때도 종교인 중심으로 동양 평화의 대의를 저해하는 일본의 침략을 비폭력으로 책망하여,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한국의 6.15선언을 후퇴시키면 남북한 서민들이 큰 고생을 하고 일본의 군국화에 박차를 가하며 아시아에 먹구름이 낍니다. 한국의 평화는 한국에 국한하지 않고 아시의 평화의 초석이 됩니다. 한국과 일본이 6.15공동선언과 평화헌법을 굳게 지킬 때 아시아 평화가 실현됩니다. 일본과는 과거의 역사를 쉽게 잊어서는 안 되지만, 거기에 갇혀서도 안 되지요. 유럽의 독일과 프랑스가 과거에 지독하게 싸운 역사를 배우면서 유럽공동체의 중심국가가 된 전향적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이 그렇듯 일본에도 보수 국가주의 세력과 평화 양심세력이 있습니다. 평화양심세력이 서로 도와 아시아공동체의 초석을 놓아야 할 것입니다. 자주적인 남북 간 평화실현은 힘든 길이지만, 그 노력이 대립하는 두 체제를 대승적으로 종합하는 제3의 국가 건설 과정이 된다면 초강대 제국에 둘러싸인 21세기 우리 민족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세계사적 사명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한반도 북쪽에 사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령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안다. 오랜 기간 그런 운명에 빠트린 소위 강대국이나 직접 폭력을 가해온 자들, 또는 남의 불행으로 적대적 공생을 해온 자들, 냉정한 방관자들 때문에 내 백성이 부르짖는 소리를 왜 내가 못 듣고 그 아픔을 못느끼랴? 그러므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모든 억압자로부터 구출하고 분단과 억압의 나라에서 건져내어 토지 투기가 없는 아름답고 광대한 땅, 건강한 농산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거기서 북한 족속, 남한 족속, 중국 족속, 일본 족속, 미국 족속, 소련 족속이 서로 자유롭고 평화롭게 오가며 장사하고 문화 교류를 하는 통일된 새 나라로 너희를 인도하겠다. 그것이 내 뜻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일어서라. 내가 정령히 너희와 함께 하여 평화를 가로막는 모든 바로의 세력에서 인도하여 낼 것이오, 너희가 이 산, 곧 아시아의 영산 백두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희를 이 세상 가운데 보낸 증거니라. (출애굽기 3장 7-10 절 중 족속 이름 등 고침)
평화의 깨달음을 조그맣게 실현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작은 스티커를 만들어 홍동밝맑도서관에서부터 붙이려 합니다.
6.15南北共同宣言과 平和憲法 九條 支持 區域
*왼쪽부터 홍순명 선생, 송진호 홍성부군수, 이운학 이사, 이기문 전 서울대 교수 사진: 안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