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년 북방에서 새롭게 흥기한 거란의 성종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북송을 침공하여 전주에 이르러 북송의 진종과 대치하였다. 여기에서 거란과 북송 사이에 화의가 성립하는데, 그 결과 진종은 거란의 황태후에게 숙모의 예를 갖추면서 매년 10만 냥의 은과 200만 필의 비단을 바쳐야 했다. 이것이 바로 전연의 맹약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송은, 천하가 거란과 북송으로 나누어져 북쪽에는 거란이, 남쪽에는 북송이 존재한다는 남북조의 병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 북송의 황제는 천하의 통치권을 갖고는 있지만 단 한 사람의 ‘정통’ 황제가 아니라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다. 그것은 북송에게 있어서 치욕일 뿐이었다.
이러한 치욕에 대한 반발로, 실상은 오래전에 이주한 유목민의 자손이었던 북송인들이 자신들의 ‘정통’은 ‘중화中華’와 ‘한인漢人’이라 주장하여 상처입은 자존심을 위로하면서 북방에서 새롭게 흥기한 유목제국을 야만무도한 ‘이적夷狄’이라 경멸하였는데, 이처럼 고작 분풀이로 시작한 일이 ‘중화사상’의 기원이 되었다.
이 ‘중화사상’을 대표하는 것이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痛鑑』이다. 『자치통감』은 편년체編年體로 쓰인 역사서로 서기전 403년부터 959년까지 약 1362년 동안에 벌어진 사건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는데, 남북조 시대를 서술할 때는 북조의 연호를 표기하지 않고 남조의 연호만을 표기하면서 동진, 송, 남제, 양, 진을 비롯한 남제의 황제만을 ‘황제’라 부르고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를 비롯한 북조의 황제는 ‘위왕’, ‘제왕’, ‘주왕’으로밖에 부르지 않았다. 북조는 ‘정통’이 아니기 때문에 참된 황제가 아니라는 발상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진陳이 멸망하기 바로 전해인 588년까지 계속되어 그해의 기사에서는 수의 문제文帝를 ‘수왕’으로, 진의 마지막 황제인 장성공을 ‘황제’라 부르는 데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듬해인 589년이 되면 그해 정월 기사에서부터 진의 황제는 ‘진쥐’로 격하시키는 대신 수의 문제를 ‘황제’라 부르고 있다. 이는 진이 멸망한 해를 기준으로 ‘정통’이 남에서 북으로 옮겨 갔다는 발상인데, ‘정통’ 이론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수는 ‘정통’이 아닌 왕조가 되어 이어지는 당나라나 나아가 사마광이 종사하고 있던 북송도 ‘정통’이 아닌 왕조가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북송과 대립하는 거란을 예전의 북조로 비유하여 거란의 황제는 ‘정통’이 아니기 때문에 천하를 지배할 권리를 갖지 못한 가짜 황제라는 것을 에둘러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보다 아무리 군사력이 강대해지고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다 하더라도 ‘이적’은 문화를 갖지 못한 인간 이하의 존재이며 ‘중화’만이 참된 인간이라는 것이 ‘중화사상’의 요지이다. 이러한 ‘중화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어서 중국인이 세계의 현상을 직시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