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칸트의 철학 개념과 방법
철학은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 철학함이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철학의 정체는 무엇이며, 철학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에라도 쓸모가 있는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갖듯이, ‘철학자’ 칸트도 이런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철학’에 ‘학學’자가 붙은 것을 보면 무슨 ‘학문’은 ‘학문’인 모양인데, 그 말이 우리에게 지시해주는 내용을 얼른 파악할 수 없음이 그 첫째 이유일 것이다. ‘학문’을 무엇에 관한 ‘체계적 이론’ 내지는 어떤 ‘이론적 체계’로 보기로 한다면, 대체 ‘철학’이란 어떤, 무엇에 관한 이론 체계인가?
물리학은 사물의 물질적 원리에 관한 이론 체계요, 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의 원리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요, 법학은 법에 관한, 생물학은 생물에 관한 학이며, 이름하여 정치학이라는 것도 정치에 관한 어떤 종류의 이론 체계이겠거니 하는 짐작이라도 간다. 그런데 ‘철哲’에 관한 학문이라는 것도 있는가, 아니면 ‘철’하는 활동도 학문 활동이란 말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의아심을 가지면서도 명칭만 가지고서는 철학에 대한 어떤 감感을 잡을 수가 없어,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벌어진 일들의 현장, 즉 ‘철학사’를 들춰보며 ‘철학’의 정체를 파악해보려 한다. 그러나 ‘철학사’ 책을 넘겨가면서 이른바 ‘철학자’들 스스로 자기 업무, 즉 철학을 규정한 것을 살펴보면, 그 다양함이 자못 철학자 수만큼이나 됨을 발견하게 된다. 대체 이런 사정은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문제를 해명하고, 먼저 철학에 대한 규정부터 확실히 해둠으로써 철학적 논의에 으레 끼어드는 불필요한, 뿐만 아니라 철학의 본뜻과 정반대되는, 개념적 혼란을 미리 방지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말이 서양 문화사의 초기에 등장하는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의 번역어라면 이 말이 형성될 즈음에 무엇을 뜻했는가는 소크라테스Sokrates, BC 469~399의 다음 말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파이드로스여, 그를 지혜 있는 자라 부르는 것은, 내가 보기엔 너무 높이 올라간 것 같고 그런 말은 신에게나 적용하면 적절할 것 같네. 그러나 지혜를 사랑하는 자philosophos 혹은 그 비슷한 말로 부른다면, 그 자신도 차라리 동의할 것이고, 보다 더 합당할 것 같네.”
그러니까 플라톤Platon, BC 427~347이 전해주는 소크라테스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자’란 지혜를 가진 자라기보다는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며, 그에 이르려고 애써 노력하는 자, 즉 구도자求道者쯤을 지칭하겠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우리가 ‘철인哲人’으로 이해하는 것은 유가儒家의 전통에서 볼 때도 그럴듯하다 하겠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從心所慾不踰矩’ 자, 그는 분명히 신인神人이며 성인聖人이다. 이런 성인 공자孔子, BC 552~479의 으뜸 제자 10명을 ‘십철十哲’이라 칭했고, 그 다음 수준의 사람들을 골라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 일컬었으니, ‘철인’ 내지 ‘철학자’는 ‘현인賢人’보다는 좀 더 ‘도道’에 가까이 다가간, 그러나 완전히 도에 이른 성인은 아직 아닌 자를 이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가적인 파악에 따르든, 그리스 철학의 이해에 따르든, 이 ‘철학자’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철학자’와 똑같은 함축을 가질까? 오늘날 의미에서의 물리학자는 지혜 즉 참된 지식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며, 수학자와 역사학자는 그렇지 않은가? 이 반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초기 의미에서의 ‘철학자’는 오늘날 우리의 개념으로는 ‘학자’에 해당하며, 이에 상응해서 당시의 ‘철학’은 ‘학문’ 일반을 지칭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가 말하는 ‘철학’은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런 개념 사용은 근대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데카르트R. Deccrates, 1596~1650에게도 그러하고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에서도 그러하며, 뉴턴I. Newton, 1643~1727에게도 그러하다. 데카르트는 그의 라틴어 저술 『철학의 원리』는 1. 인간 인식의 원리들에 관하여, 2. 물체적 사물의 원리들에 관하여, 3. 가시계可視界에 관하여, 4. 지구에 관하여 등의 4부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다 5. 동물과 식물의 본성에 관하여, 6.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등을 덧붙이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뉴턴도 근대 물리학의 체계를 담고 있는 그의 저술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라는 제목을 붙였으니, 분명히 이때까지만 해도 ‘철학’은 ‘학문’ 일반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던 ‘철학’ 개념이 언제, 어떤 계기로 의미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 그것은 근대적 의미에서의 ‘과학’들의 성립과 함께라고 보아야 한다. 서양 학문사에서 그 성립의 과정을 고려할 때나, 그냥 ‘학scientia, science’이라 일러도 무방할 터인데 굳이 ‘분과학分科學’이라 말하는 우리의 이해로 볼 때나, 과학科學은 총체학總體學 내지는 근본학根本學, 즉 철학을 전제하고, 또 그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렇다면 ‘철학’이라는 말이 생긴 이래 1500년 이상 일괄 통칭되던 학적 작업들, 혹은 학적 문제들 가운데, 왜 어떤 것들은 ‘과학적’이라는 명칭을 새로이 얻게 되고, 어떤 것들은 오늘날도 여전히 ‘철학적’인 것으로 남아 있으며, 언필칭 과학의 시대에 왜 새로운 ‘철학적’ 물음들이 생겨나는가? 그것은 문제의 성격과 그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학문적 관심이 싹튼 초기에는 일체의 문제들이 ‘철학적’이었다. 그것은, 자연에 관해서든 인간에 관해서든 문제와 사태의 근본 원리를 찾으려는 문제의식은 있었으되, 문제 해결을 위한 변변한 수단과 방법을 개발하지 못한 채 암중모색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다가 어떤 문제와 사태 영역들은 그것들에 접근해갈 수 있는 비교적 신뢰할 만한 방법들을 개발하면서 어느 정도 ‘객관적’인 논의 영역이 확보되었다. 그래서 이른바 ‘학문의 부분 영역’, 즉 ‘과학’들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과학들이 분과되어간 이래로도 여전히 ‘철학’에 머물러 있는 문제 영역들은 그 성격상 이른바 ‘과학’의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오늘날의 ‘철학’은 연구 대상에 있어서나 연구 방법에 있어서 수학과도 다르고 여타 과학과도 다르다. 모든 과학들이 그리고 수학조차도 본래는 철학과 한통속이었고 이로부터 분화되었다고 해서, 오늘날의 수학과 과학이 오늘날의 철학과 동종의 학문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 물론 그 뿌리의 같음과 인간의 지혜의 한계로 인해 그런 제 과학에도 여전히 철학적 문제가 남아 있어, ‘과학철학’, ‘법철학’, ‘심리철학’ 등등의 영역이 있기는 하지만 - 18세기 중엽에 ‘철학자’들은 이러한 ‘철학’의 상황 변화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서양 문화사에서 이 시기는 인간의 일반 이성이 ‘계몽’을 폭넓게 체험하고 있던 때였다.
많은 과학들은 이제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는 언어(즉 수학)와 방법(즉 실험 관찰), 그리고 그들만이 다룰 수 있는 도구(즉 과학 기기器機들)를 통해 큰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 연구 성과는 놀라웠고, 그리고 그것은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를 본, 여전히 철학적 문제에 관심이 더 많은 학자들은, 이제 철학도 전문적으로 연구되어야 함을 자각하였다. 이로부터 철학의 전문화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철학의 직업화를 낳았다. 그리고 이제는 학문의 수준 자체가 전문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그것도 분업적으로 몰두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 있기도 했다.
사실 탈레스Thales, ca, BC 640~550 이래 18세기 초엽까지 오늘날 우리가 ‘철학자’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철학’은 그들의 직업 소개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생업이 따로 있거나 필요 없었으니, 말하자면 철학함은 그들에게 ‘한가schole한’ 여가 생활이었다. 철학사에 남긴 그들의 혁혁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들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면, 철학의 ‘아마추어’들이었고, 또한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하려 했다. 고중세의 철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데카르트, 스피노자B. de Spinoza, 1632~1677, 라이프니츠, 로크J. Locke, 1632~1704, 버클리G. Berkeley, 1685~1753, 흄D. Hume, 1711~1776 등 근대 철학의 초기 대표자들도 모두 그러했다.
이런 철학사적 전통에다가 아직까지도 ‘객관성’이 없어 보이는 철학적 논의의 형편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철학’은 어느 정도의 지성과 일반적인 일상 체험만 가지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할 수 있어야 하며, 또 ‘철학’은 당연히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전문가’로서의 철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여타의 모든 학문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있겠거니 하고) 조심성 있게 침묵으로 관망하는 사람들도 형이상학[철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학문에 비해 그들의 무식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음으로 해서, 대가인양 지껄이고 대담하게 결정”한다.『형이상학 서설』:A21/22=Ⅳ264
고 칸트는 세인들을 비판했고, 더 나아가 그의 후배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사람들은 구두 한 켤레를 만들기 위해서도, 비록 누구나 자기 발에 맞는 척도와 손들, 그리고 구두를 만드는 일에 필요한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고 훈련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유독 철학함에 대해서만은 그러한 연구나, 배움 그리고 노고가 필요치 않다고들 말한다.”
고 철학에 대한 세인들의 오해를 지적했다. 이런 생각에서 칸트는, 그 역시 당시 지성인의 사회적 사명인 계몽주의 운동에 앞장섰으면서도, 엄밀한 학적 토대를 닦음이 없이 그런 운동에 나서는 ‘에세이스트’ 내지는 ‘이데올로그’들을 ‘통속철학자’라고 비판, 자신을 그들과 구별하였다.
요컨대, 이제 철학도 수학이나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문제의 근원성과 보편성, 그리고 난해함과 절실함으로 인해, 더욱더 엄밀히 학문적으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상황에 놓였다고 칸트는 파악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 창조적 자세로 대응한 최초의 탁월한 철학자가 바로 칸트 자신이다.
칸트는 우리가 철학사에서 만나는 대가들 가운데 최초의 직업 철학자, 즉 철학 교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종래의 여느 철학자들처럼 직업적으로는 다른 일에 종사하면서 철학적 문제에 관심이 많고 재능이 뛰어난, 그래서 후세에 큰 연구 성과를 남긴 아마추어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함이 그의 생업이었고 - 엄밀히 말해, 후반생後半生이 그러했지만 - 또 오로지 철학에 전념한 최초의 ‘프로’ 철학자이다. 비록 당시의 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철학부’가, 국가 경영에 직접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상부’ 학부인 신학부·법학부·의학부의 ‘하부’ 학부모서 기초 교양 교육을 염두에 두고 설치되었다 하더라도, 이제 철학은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연구되고 교육되기 시작했으며, 칸트는 대학 강단에서 정규적으로 철학을 논하는 교수였다. 이때쯤 해서 사람들은 학교에서 연구되고 강론되는 철학의 개념, 이른바 ‘철학의 학교 개념’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일반 시민의 견지에서 볼 때, 철학은 여전히 “인간 이성에게 법칙을 수립해주는 자”KrV, A839=B869이다. 이 같은 철학의 ‘세계 개념’ 그러니까 철학함의 궁극 목표는 우리 이성 사용의 최고 원칙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단계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18세기 중엽 철학의 ‘전문인’들은 철학이란 “개념들에 의한 이성 인식의 체계”라고 규정했고, 칸트도 이 규정을 좇았다.『논리학』: Ⅺ, 23 개념들로 이루어진 이성 인식의 체계로서의 철학은 첫째로 “개념들의 구성作圖에의한 이성 인식의 체계”인 수학과 구별되고KrV, A713=B741 참조, 둘째로 ‘경험적 자료에 의한 인식cognitio ex datis’들의 체계들인 모든 과학들과도 구별된다.
이성 인식이란 ‘원리적 인식cognitio ex principiis’, 즉 순수한 선험적 인식을 말하며,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첫 번째가 이성의 이성 자신에 대한 인식이요, 그 두 번째가 이성에 의해 순수하게 원리적으로 생각되는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철학은 두 부분을 갖는다. 그 첫 번째 부분이 이성 자신의 형식에 관한 인식들로 이루어진 논리학論理學, logica이고, 그 두 번째 부분은 순수하고 원리적이되 대상의 실질(실재) 내용에 관한 인식들로 이루어진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a이다. 이러한 철학의 개념에 따라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한 칸트는 6년이나 먼저 제안받았던 시학 교수직을 거절하고, 그의 나이 46세가 되어 뒤늦게나마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위한 교수’ 직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자신에게 합당한 직분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것’, 즉 ‘감각 경험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 너머의 것’에 관한 학문인 형이상학은 철학의 본령本領으로서 다시금 자연自然, 즉 ‘스스로 그러한 바’의 것存在者에 관한 것인 ‘자연 (또는 존재) 형이상학’과, 자유自由 즉 ‘스스로에서 비롯하는 바’의 것當爲, 道德에 관한 것인 ‘자유 (또는 윤리) 형이상학’으로 나뉜다. 그리고 존재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존재자 일반의 존재 원리를 탐구하는 ‘일반 형이상학metaphysica generalis’ 혹은 별칭하여 존재론과, 한 존재자이기는 하지만 결코 감각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특수한 존재자들, 곧 영혼과 세계 전체 그리고 존재자 중의 최고 존재자로서의 신을 탐구하는 ‘특수 형이상학metaphysica specialis’으로 세분된다.
이런 학교 철학의 연구 분야에서 거론되는 제 문제를 칸트는 보편적 원리를 찾는 철학 정신에 충실하게 진지하고 반성적인 태도로 천착해나가는데, 그것의 결실을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이 주저들인 『순수이성비판』1781·1787,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793 등에서 볼 수 있다.
칸트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계몽주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의 파악에 의하면 계몽주의 시대란 “모든 것을[이] 비판에 부쳐야 하는” 비판의 시대로, 이제 “이성은 오직, 그이 자유롭고 공명한 검토를 견뎌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꾸밈없는 존경을 승인한다.”KrV, AXI, 주 칸트의 철학하는 방법은 바로 이런 시대정신에 정향定向되어 있었다.
그는 학생들을 향하여 자주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함을 배우라”KrV, A837=B865고 강조했고, 학생들이 “내용 없는 개념”을 농弄하고 “흉내내 얘기”하는 것을 경계했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제 발로 설 것”을 요구하였다.XXIX, 1.1, 6 이하 참조 그리고 이것은 그 자신의 철학하는 자세이기도 하였다.
“철학함을 배운다 함은 자기 이성을 스스로 사용함을 배운다는 뜻이다.”XXIV, 698 철학의 의의가 지혜의 추구에 있다면, 우리는 오로지 자기 이성 사용의 자기 훈련을 통해서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칸트는 본다. 그래서 칸트는 “사람들은 단지 문헌에 의한 작업만으로는, 한 저자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 강의할 정도로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어쩌면 저자 자신도 […] 이해하지 못했던’ 사태 자체는 투시하지 못한다”XXIX, 6 이하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철학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남겨진 문헌을 문자에 따라 연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가 되는 사태를 관조하고 사색함을 말한다. 이러한 철학의 태도를 오늘날 우리는 ‘현상학적’이라고 부르거니와, 칸트는 이러한 철학 방법을 실연實演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칸트는 역사적인 문헌들을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에 앞서간 사상가들이 남긴 이론들 가운데에, 설령 그 안에 착오가 포함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모습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드러나 있다고 보았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위대한 발견들 곁에서 분명한 착오들과 마주치게 된다 해도, 이는 한 인간의 실수에서라기보다 오히려 인간 일반의 인간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다.”(⌜활력의 참된 측정에 관한 사상들⌟: I, 151) 그러나 인간성이라는 것이 고착되어 있고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착오는, 그것이 나타나면, 이성 자신에 의해 설득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개 인간의 주관성에 입각한 이론들 중에서, 보편적 이성이라는 표준 척도에 따라 전진해가는 하나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 철학함의 일이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그래서 칸트는 그의 사상을, 그에 앞서간 탁월한, 그러나 서로 상충되는 이론을 주장한 사상가들을 대화시키고, 그 충돌점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전개시켰다. 이러한 철학 방법을 우리는 ‘변증법적’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뜻에서 칸트는 헤겔에 앞서 등장한 변증법적 사상가의 대표적 예이다. 우리가 변증법을 사태의 자기 전개 논리라고 이해할 때, ‘철학함’도 하나의 사태여서, 철학하는 개인과 개인,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단계적으로 발전해간다는 것을 칸트는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에 의해 수행된 ‘이성의 자기비판’도 이성의 자기 부정을 통한 전진의 한 방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