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개념의 역사 - 백성, 인민, 국민
민은 《시경》에 102회, 《서경》에 278회 나오는 오래된 말이다. ‘민民’은 ‘붙잡혀 눈이 찔린 채 이주해 와서 노동에 종사하는 노예’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이처럼 민은 천한 신분을 뜻하는 말로 출발했으나, 춘추전국시대에 들어 서민, 여민黎民, 백성 등과 더불어 피통치자 일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정착했다.
조선에서도 피통치자를 민이라 불렀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은 《서경》에 등장하는 ‘민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다’는 뜻의 민유방본民惟邦本을 강조했다. 민본주의자인 그의 주장은 단호하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민은 국가의 근본이면서 군주의 하늘이다.”
조선 중기의 철학자 이황은 민을 사대부의 교화 대상으로 파악했다. 그에게 민은 끊임없는 교화와 수양으로 내면적 도덕성을 함양해야 하는 존재였다. 군주가 교화를 베풀어 이끌어 나가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이는 민을 군주가 사랑하는 동시에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군주는 민을 하늘처럼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민爲民, 즉 민을 위한 정치를 중시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국가가 국가다울 수 있는 것은 군주가 있고 민이 있기 때문이며 군주와 민은 모두 같은 사람이라 주장했다. 나아가 민이 없으면 군주가 없다고 해 민을 정치적 주체로 파악하는 민주주의 맹아적 시각을 드러냈다. 정약용은 한발 더 나아가 민을 사회와 국가의 원천으로 파악했다. 애초에 민이 있고 이들이 모여 산 이후에 사회나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천자天子도 민의 추대 형식을 거쳐 성립한 것으로 해석했다.
조선 시대에 민은 국민, 시민, 인민, 백성 등으로 불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국민 163회, 시민 395회, 백성 1718회, 인민 2504회 등장한다. 백성이 민을 부르는 일반적 호칭이었을 것이라는 통념과는 다르게 인민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인민은 세종 때 517회, 성종 때 258회, 중종 때 221회, 선조 때 358회로 조선 전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보였다. 조선 후기에는 인민과 함께 민인이란 개념도 자주 쓰였다. 그렇게 인민과 민인 모두 피치자 일반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혼용되었다.
인민도 《맹자》, 《관자》 등에 평민, 즉 피지배층 일반을 의미하는 말로 등장한, 역사가 오래된 개념이다. 또한 중국에서 2000년 넘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 오늘날까지 민을 가리키는 가장 대표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에서도 일찍부터 인민 개념이 사용되었다. 즉 인민은 한국, 중국, 일본의 전근대 사회에서 동일하게 피치자, 즉 통치 대상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19세기의 끝자락인 1896년에 창간한 《독립신문》에는 인민 개념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갑오개혁 이후 인민 개념이 부상한 것은 근대 조약 체결의 영향 때문이다. 인민은 일본, 처오가 맺은 조약과 장정에 등장하는 개념이었다. 강화도 조약에도 조선국 인민과 일본국 인민이란 말이 등장한다. 이 때 인민은 피지배층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특정 국가에 속하는 주민 일반을 가리켰다. 한편에서는 인민이 인민주권록적 관점에서 정치적 주체이자 문명개화를 선도하는 주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이는 변화도 일어났다. 19세기를 ‘인민의 탄생기’라 부를 때, 그 인민 역시 이러한 뜻을 지닌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렵부터 국민도 새로운 정치적 중요성을 지닌 개념으로 등장하지만, 인민에 비해 널리 사용되지는 못했다. 그때의 국민은 오늘날과 같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군주와 국가에 복종하고 충성하며 의무를 다하는 신민臣民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늘날에는 국민과 인민이 똑같이 정치적 주체를 뜻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국민을 즐겨 사용하게 되었을까? 1948년에 만든 제헌 헌법 초안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고 해 인민이 등장한다. 하지만 논의 과정에서 인민은 북한이 주로 쓰는 말이라는 이유로 국민으로 대체되었다. 결국 민을 가리키는 말도 남한의 국민, 북한의 인민으로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