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인 내게 페미니즘은 비당사자 운동이다. 경험에 한계가 있으며 절박함도 덜하다.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이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데 이견이 없으며, 남성들은 페미니즘을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여성보다 커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맨스플레인을 하지 않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싸울 테니 남자들은 빠져라’와 같은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흑인 민권 운동에 투신한 백인이 있고,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삶을 건 시스젠더-헤테로도 많다. 생물학적, 사회적 여성 중에서도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명예 남성’이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향이다.
또한 남자라서 가능한 역할도 있다. 페미니즘을 함께 공부하는 한 선생님은 학생이 쓴 ‘김치녀’라는 말을 제지하려다가 “선생님한테 한 말 아닌데 왜 그러세요? 혹시 선생님도 김치녀?”라는 반응에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이런 경우처럼 남학생들에게 잘못을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데는 남자 선생님의 말이 더 효과적인 경우가 있다. 여자의 말보다 남자의 말에 더 신뢰를 보이는 남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듣기 거북한 남자 상사의 발언에 “요즘 그런 말씀 하시면 큰일 나요”하고 제지하는 것도,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보이는 남자 동료를 설득하는 것도 같은 남자가 하면 더 수월한 면이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다. 좁고 딱딱한 틀에 갇힌 남성의 숨통도 틔워줄 수 있다. 남자들은 왜 술에 취해야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할까. 힘들어도 혼자 이겨내는 것, 슬퍼도 울지 않는 것이 왜 남자다운 행동이 되었을까. 꾹꾹 눌러놓은 감정 때문에 병이 생겨 여성보다 빨리 죽는 건 아닐까. 여성의 소득이 남성과 비슷해지면 모든 비용을 반씩 부담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육아를 여성에게 미루지 않게 되면 아빠와 아이의 친밀감이 커지지 않을까. 내 가족이, 내 친구가, 내 주변 사람들이 일상에서 불쾌감과 공포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에게도 좋을 일이 아닐까.
의회 민주주의의 본고장인 영국의 여성들은 1927년까지 투표권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혼외 성관계 처벌 조항이었던 간통죄는 1953년 6월까지 여성에게만 적용되었다. 지상파 뉴스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여대생을 ‘정조 관념’으로 칭찬했던 것이 고작 1994년의 일이다. 호주제 폐지는 4천만 명이 휴대전화를 쓰는 2005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현재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도 당대에는 관습, 전통, 미덕으로 인정받은 경우가 많다. 지금 기준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 당대에는 급진적 변혁처럼 인식된 경우도 숱하다. 역사는 더 많은 주체에게 더 큰 권리를 보장하는 쪽으로 발전해왔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오늘의 갈등도 얼마 뒤에는 고루함과 편협함이 만들어낸 부끄러운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2010은 백인 대학교수였다. 즉, 사회가 바뀌지 않는 것이 유리한 기득권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흑인 학생들의 학습권을 위해 싸웠고, 투표권을 요구하는 흑인 대오의 선두에 섰다. 반복된 해직과 투옥 앞에서도 일관되게 지켜온 그의 신념에 다른 많은 백인들도 하나둘 감화됐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피부색이 다른 이를 위해 한평생 싸웠던 그를, 자기 이해 대신 신념과 정의에 따라 움직인 그를, 인종차별 철폐에 전기를 마련한 그를 ‘현대사의 양심’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남성들이 페미니즘의 하워드 진이 되어주면 좋겠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손을 내밀어주면 좋겠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력단절을 겪지 않고,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꿈을 꺾지 않는 세상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다. 남자아이가 눈물을 참지 않고, 시시콜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며, 육아의 즐거움과 가사의 고단함을 아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힘을 모아주면 좋겠다. 놀이방에서 남자아이도 인형을 만지고 여자아이도 로봇을 조립할 수 있도록,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여학생과 고무줄놀이를 하는 남학생이 공존할 수 있도록, 여학생이 엔지니어를, 남학생이 네일 아티스트를 꿈꾸고, 소꿉놀이에 빠진 아이들이 퇴근하는 남편과 밥 차리는 아내를 연기하지 않도록. ‘여자라서’ ‘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원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탐색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함께 이 길을 걸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