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병장은 누드모델이 될 거라고 했다.
“왜?”
“그냥 해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단조로운 군 생활 속에서도 자유를 품고 있는 그의 내면이 궁금했다.
“안 병장같이 자유로운 영혼이 어떻게 군 생활에 적응했는지 궁금해. 통제되고 억압된 환경이잖아.”
“에이, 아닙니다. 군 생활 엉망으로 했지 말입니다.”
“무슨. 분대원들은 잘 따르고 포대장님은 칭찬하시던데.”
“에이, 아닙니다.”
안 병장이 웃었다.
나는 진지했다. 실제로 그랬다. 안 병장은 포대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의 선임들도, 후임들도, 안 병장을 좋아하고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부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브라보 포대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당직근무를 서게 되면서 안 병장을 만날 기회는 더 많아졌다. 당직근무는 밤을 세워야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로한 일이었다. 보통 간부 한 명과 병장급 병사 한 명이 함께 선다. 가끔은 안 병장이 근무에 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러면 밤새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는 그동안 책에서 읽었던 내용에 대해 물어봤고, 나는 그의 그림과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물어봤다.
한 번은 그의 전투화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안 병장의 전투화는 항상 깨끗했다. 당장 구보를 나갈 때도, 흙바닥에서 작업이 예정되어 있을 때도 그는 직전에 전투화를 닦았다. 내가 물었다.
“어차피 곧 더러워질 텐데, 너무 비효율적인 거 아닌가?”
안 병장이 경계근무명령서를 확인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저도 예전에는 안 그랬지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군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도 힘들게 하고, 되는 일도 없고. 왜 힘든지 생각했더랬지 말입니다. 생각하다 보니까 보람도 성취도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생각했습니다. 그럼 왜 보람도 성취도 없나. 그랬더니 제가 모든 걸 대충하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군대 일이란 게 그렇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 구색만 맞추려고 한 거지 말입니다. 그렇게 저는 군 생활 전체를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채우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역해서 사회에 돌아가면 지난 2년은 버린 시간이 되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걱정이 됐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20대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하찮은 시간으로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지 말입니다. 나한테 선물해야겠다. 군 생활의 2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선물 해야겠다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뭐, 구두부터 닦기 시작했습니다.”
경계근무자들이 돌아왔다. 반사적으로 안 병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서기 전, 나는 내 전투화를 내려다보았다. 흙투성이의 전투화는 내 발에 임시로 신겨져 있었다.
(중략)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 병장의 판단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무수히 많은 생각의 가지를 뻗었다. 자신의 시간을 포기할 만큼 군대라는 집단이 그렇게 윤리적인 집단이 아님을 생각했고, 한국의 군대문화가 만들어낸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를 생각했으며, 국수주의와 애국주의가 어떻게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되는가를 생각했다. 안 병장을 만나면 이런 것들을 말해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 모든 이유와 무관하게 옳다. 그는 자기 삶의 입법자이고, 자기 삶의 대지를 걸어가는 자가 아닌가.
(중략)
시계는 새벽 5시를 향하고 있었다. 근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짙푸른 빛으로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나와 안 병장은 텐트 가까이를 서성였다.
“안 병장은 그런 이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겠어?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실천하는 사람.”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멋진 사람은 죽어도 못 될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 모두 그럴 거야. 체 게바라 같은 강한 신념과 실천력을 갖기는 어려워. 사르트르로 체 게바라를 보고는 이렇게 이야기했어.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주변에도 이상적인 인간이 충분히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우리 주변에 말입니까?”
“그래. 그런 이상적인 이들은 숨겨져 있어.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지. 왜냐하면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 외에는 타인을 평가할 줄 모르거든. 권력을 잡은 정치가나, 성공한 사업가나, 학벌이 높은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나, 사람들이 보기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가시적인 성과를 낸 사람들만이 칭송의 대상이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이상적인 이들이 이상적인 이유는 그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서가 아니야. 그들의 내면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지. 체 게바라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쿠바혁명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야. 그는 성공보다 더 많은 실패를 했어. 콩고와 볼리비아에서는 참혹하게 패배했지. 마찬가지로 그가 높은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야. 그가 군의관의 신분으로 쿠바에 상륙했을 때, 혁명군들은 그의 지위가 아니라 그의 용기와 신념을 알아보고 그를 좋아했어. 이상적인 인간은 대중의 평가, 혹은 사회의 인정과는 무관해. 그런 사람은 각자 자기 세계의 범위 안에서 영웅이 되는 거야.“
“그럼, 정훈장교님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이상적인 인간, 시대의 영웅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응.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나는 안 병장이 바로 그 이상적인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확신해.”
“예? 에이, 그건 아니지 말입니다.”
안 병장은 손사래를 쳤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자의 평가는 이상적인 인간에게 불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