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진화론이 예술마저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식사할 때 젓가락을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가 하면,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발명일까, 아니면 거기에도 공통의 뿌리가 있는 걸까? 가부키, 서구의 오페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춤은 공통적인 요소가 없는 각 지역의 독자적인 발명일까, 아니면 인간으로서 누구나 공유하는 요소가 투영된 결과일까?
모든 사람은 손을 사용해 음식을 입에 가져가고―영장류가 다 마찬가지다―어떤 음식은 변형시켜 먹기도 한다.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영장류의 생물학적 적응이며, 생존과 번식이라는 면에서 이점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자연선택으로 생겨난 특징이다. 음식을 먹기 전에 자르고 조리하는 등 변형시키는 것은 인간만의 적응이다. 여러 가지 형태가 있기는 하지만, 예술도 인간만의 적응이며 생물학적으로 인간종의 자질이다. 예술은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명백한 이점을 준다. 예술은 연극에서 나오는데, 연극 역시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들에게 널리 퍼진 적응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주로 스토리텔링의 예술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사물을 설명할 수 있다. 신화나 과학에 의거해 한 아이나 한 나라가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것에서부터 세계가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까지 말할 수 있다. 또한 그저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사실이 아님을 알아도 몹시 흥미롭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관찰, 발견, 발명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이어주는 것은 뭘까? 이야기가 왜,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고자 할 때, 가장 풍부한 설명을 주는 이야기인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을 지금까지 잘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한 동료가 내게 학문에 관해 물었던 일이 기억난다. "뭘 연구하고 있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윈의 진화론을 소설에 적용하는 문제를 생각하는 중이야." 내 대답을 듣자마자 그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그건 너무 한정적이지 않아?" "한정적이긴. 매우 확장적이지."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다르게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 맥락을 수십 년에서 수백만 년으로 확장하고, 역사적 정확도를 수십 년 전에서 순간까지 높일 수 있다고.
인간 본성영어의 nature는 자연과 본성을 다 뜻한다. 이 책에서는 문맥에 따라 자연과 본성 두 가지로 번역했는데―특히 human nature는 인간 본성으로, 다른 경우는 대부분 '자연'으로―원어는 같다는 점에 유념하라: 옮긴이을 진화적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철학, 경제학, 역사, 정치학, 언어학, 법, 종교 등이 크게 달라졌다. 그렇다면 진화적 이해는 예술마저, 극히 자유롭고 창의적인 인간 정신마저 설명할 수 있을까?
과거에는 도구의 사용이나 제작, 셈법이나 문화 등 예술과 기술을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여겼으나 이제 우리는 그런 분야에서도 자연에서 전거를 찾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례가 없는 인간만의 예술, 픽션 예술도 진화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필연성의 세계에서, 화자나 청자나 지금까지 전혀 있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아는 이야기를 읽느라 우리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유를 진화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도 최근의 문학에 비해 훨씬 덜 한정적인 방식으로, 더 폭넓고 섬세한 방식으로 증명하려 한다.
문학과 인문학 전반을 통틀어보면, 지난 40년간 '이론Theory' 혹은 '비판Critique'이라고 자칭하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이론을 Theory와 Critique로 표기하는데, 주로 문학에 관한 이론과 평론을 가리키므로 여기서는 일반적 이론과 구분해 문학이론이라고 표기하기로 한다: 옮긴이은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을 완전히 거부했다. 그러나 문학이론은 수십 년 전에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고 나중에는 주체(개인)의 죽음도 선언하더니 최근에 들어서는 자체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과 문학 연구에서 텍스트로 돌아가자는 부르짖음이 힘을 얻었다.
문학에 대한 생물문화적 접근은 텍스트의 풍요함과 텍스트가 환기하는 인간 본성의 다면성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문학 텍스트로 복귀할 경우 우리는 지난 반세기에 걸쳐 과학이 인간 본성, 정신, 행동에 관해 발견한 것을 수용하고, 그 발견이 최초의 진정으로 포괄적인 문학 이론을 위해 제안하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진화를 생물에 관한 가장 강력한 설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인간의 본성과 행동에 관해서는 거의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의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의 구조와 기능마저 자연선택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자유나 우리 자신과 세계를 변형시키는 우리의 능력이 손상되리라고 우려한다. 하지만 나중에 보듯이 그 우려는 잘못이다. 진화는 짝짓기부터 살인까지 모든 인간 행동의 토대만이 아니라 문화와 자유의 토대도 설명한다.
예술은 가장 자유로운 상상을 보여주며, 그 상상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생물학적 필연성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멀다. 진화가 예술마저 설명한다면 인간 행동을 전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진화만으로 예술이나 예술가의 모든 측면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셰익스피어도 《햄릿Hamlet》을 쓸 수 있는 유전자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픽션의 기원을 고려하지 않고는 그 풍부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이야기의 거의 끝에서 출발한다. 생물문화적 관점이 없으면 픽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고 얼마나 자연적인 것인지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인간이 예술, 특히 픽션 예술에 매료되는 이유를 알려면 예술이 왜 생겨났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왜 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지, 왜 이야기를 들으면 즉각 이해할 수 있는지, 왜 이야기가 지금과 같은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지, 왜 이야기가 인간 본성에 지금과 같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왜 새로운 지평을 계속 열어가는지를 알아야 한다.
돌고래는 숨을 들이쉰 다음 내쉬면서 기포를 내뿜는다. 이 기포를 그물처럼 이용해 물고기를 가두어 잡을 수도 있다. 아마존 강의 야생 돌고래는 이따금 기포로 목걸이 모양을 만들고 몸을 돌려 그 속으로 헤엄쳐가거나 그것을 입으로 물고 놀기도 한다. 바다 돌고래들 중에는 더 정교한 놀이를 즐기는 종들도 있다. 숨구멍으로 공기를 내뿜어 수중에서 고리를 만들면 그 형태가 몇 초 동안 유지되면서 점점 커진다. 그러나 인간이 담배 연기의 고리를 만드는 것처럼 돌고래도 그런 고리를 만들려면 특별한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1990년대에 조성된 하와이 오아후의 한 해상공원에서는 한 무리의 병코돌고래가 기포 고리를 나름의 예술 형태로 만들었다. 공원의 과학자들이 자극을 가하거나 보상을 주지 않았는데도 돌고래들의 절반은 상당히 정교한 기포 놀이를 즐긴다. 서로 동작을 맞추고, 안정적인 고리를 만들고, 자신의 작업을 검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 동료의 노력을 열심히 관찰한다. 팽창하는 고리를 통과해 헤엄치는 돌고래가 있는가 하면, 꼬리로 소용돌이를 일으킨 다음 그 속으로 고리를 만들어 보내고 위로 치솟는 게 아니라 옆이나 아래로 이동하는 돌고래도 있다. 다 자란 수컷인 카이코는 기포 고리를 연달아 두 개 내뿜은 뒤 주둥이로 슬쩍 밀어 하나의 커다란 고리로 합치는 기술을 보여준다. 젊은 암컷인 팅커벨은 몇 가지 독특한 기술을 개발했다. 이를테면 수조를 헤엄쳐가면서 등지느러미로 소용돌이를 일으킨 뒤 그 궤적을 다시 따라가면서 계속 나선형 기류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이 행동은 예술일까? 인간이 담배 연기를 내뿜는 것에 가깝다고 보면 그 행동은 예술이 아니라 놀이나 솜씨 자랑이 아닐까? 아니면 우리가 발레를 관람하거나 발리에 놀러 갔을 때 보는 것처럼 예술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춤이라고 해야 할까? 돌고래들이 만들어내는 기포 고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실제로 예술의 단초에 가깝다. 그러나 그런 놀이를 보고 돌고래가 종 전체에 걸쳐 '예술적' 행동의 성향을 가졌다고 여기기는 어렵다. 그래도 돌고래의 기포 예술은 놀이와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인간이 진화시킨 예술도 동물계에 널리 퍼진 놀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일부 인간 예술도 그렇듯이 돌고래의 기포 예술은 계획을 포함하지만 표현은 아니다. 표현이 없으면 픽션―노래와 춤 혹은 회화와 조각의 대부분―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아닌 동물도, 벌집의 동료들에게 꽃이 있는 곳의 위치와 거리를 알려주는 꿀벌의 몸짓보다 더 의도적이고 공개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표현할 수 있을까? 번식이나 생존 같은 직접적 기능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본성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다이언 포시Dian Fossey는 르완다의 비소케 산기슭에서 두 집단의 고릴라들이 만나는 장면을 설명했다. 두 집단의 수컷 대장들은 몸을 곧추세우며 짐짓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한 쪽의 대장이 서툰 몸짓을 보이자 그 집단의 젊은 고릴라들은 "그 어설픈 허세의 동작을 과장되게 흉내 내면서" 대장의 뒤를 따라갔다. 돌고래의 기포 예술처럼 그 고릴라들의 흉내도 놀이이지만 돌고래의 경우와 달리 이것은 초보적인 표현이 포함된 놀이다. 행동의 모방은 사회적 동물의 집단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각 개체가 다른 개체의 성공으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젊은 고릴라들의 모방은 단순히 대장의 허세를 흉내 내려 한 게 아니라 조롱과 재미를 위한 놀이다.
그 고릴라 이야기는 직접적인 모델에 의거한 모방의 간단한 사례다. 하지만 우리와 더 가까운 또 다른 유인원은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놀이의 사례를 보여준다. 우간다의 키발레 숲에서 영장류 동물학자인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은 여덟 살짜리 침팬지 카카마의 행동을 관찰했다. "카카마는 작은 통나무를 주워 이틀 동안 가지고 다니며 다양하게 활용한다. 자기 집에서 통나무에 등을 대고 눕는가 하면, 발 위에 올려놓고 엄마가 아기를 어르듯이 까부르곤 한다. 한 번은 작은 임시 거처를 만들어 통나무를 세워놓고 그 옆에 앉아 있었다. 통나무가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나중에 랭엄은 야생 돼지들을 피해 가느라 그 침팬지의 흔적을 놓쳤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나는 직업적으로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과학자이기에 한 번의 관찰을 토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으나, 직관적으로는 젊은 수컷 침팬지가 인형을 만들어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 인형이라니! 무척이나 새로운 생각이었으므로 나는 그냥 기록을 간수하고 그것에 관해 누구에게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다음 주에 우간다를 떠났다. 넉 달 뒤 키발레의 현지 조수인 엘리샤 카르와니와 피터 투하이르웨가 우연히 카바롤레와 카카마를 쫓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은 내 관찰에 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세 시간 동안 카카마가 통나무를 가지고 다니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의 그 통나무는 분명히 아니었다. 카카마는 먹이를 먹으면서도 통나무를 놓지 않더니 이윽고 통나무를 버리고 갔다. 카카마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통나무를 가지고 캠프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 통나무에 그 의미를 그들 나름대로 솔직하게 해석한 이름표를 붙였는데, 그것은 바로 '카카마의 장난감 인형'이었다.
카카마의 행동을 예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침팬지도 지속적인 상상을 통한 모방과 인간 아이의 가상놀이pretend play에서 보는 것과 같은 표현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가상놀이를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쉽게 마임, 연극, 스토리텔링으로 변할 수 있다. 모방이나 표현은 일부 예술에 공통적이지만(예컨대 회화나 소설) 어떤 예술에는 없다(음악이나 장식·추상·개념 예술). 그러나 카카마의 행동은 두 가지 점에서 예술과 다르다. 놀이는 침팬지에게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카카마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정교한 시나리오는 인간 아이의 가상놀이와 달리 침팬지 종 전체의 정상적인 속성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또한 인간 예술과 달리 그것은 타자와 함께 하는 활동이 아니다. 그에 비해 인간 아이는 혼자든 집단이든 아무런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완전히 '선천적으로' 가상의 시나리오를 구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인간종에게서 예술의 기원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순전히 일시적인 차원에서 보면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고릴라와 침팬지의 놀이처럼 별로 정교하지 않은 장면에서도 예술의 출발점과 비슷한 것을 식별할 수는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사건은 중앙아프리카의 이투리 숲에 사는 음부티족에게서 관찰된 것인데, 지난 10만 년 동안 혹은 수백만 년 동안 어느 인간 사회에서도 있었음직한 일이다. 게재되지 않은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특별판의 한 기사에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아들을 등에서 가슴으로 흔드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한다.
원숭이 아빠는 바로 이런 식으로 새끼를 운반하지. 아빠에게도 생각이 있단다. 유인원처럼 걸으면서 부드럽게 우는 소리를 내는 거야. 처음에는 자기 새끼를 위해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앞쪽의 집 가까이에 앉아 있는 암컷 집단이 그 소리를 듣고서 웃으며 소리치는 거야. 아빠의 동작을 그들도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거지. 그런 태도의 원인은 명백해. 아빠는 원숭이 아빠가 새끼에게 하는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거란다.
여기서 흉내 놀이는 예술과 극으로 변한다. 아빠는 아들이 아빠의 행동을 흉내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비록 근처에 본보기는 없지만 세상의 모든 아빠처럼 그는 아들이 동물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 아들은 원숭이의 동작을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을 흉내 내면 즐거운 놀이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원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많은 관중이 열렬한 반응을 보내자 아빠는 자신의 놀이, 흉내, 솜씨에 대해 더 풍부한 찬사를 이끌어내고자 한다.
나중에 보겠지만 인간 부모-아이 상호작용의 독특한 측면, 관심을 공유하는 인간종의 특별한 능력은 예술의 기원을 해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앞의 예에서 아빠는 아들의 관심을 유도해 기분을 달래준다. 그럼으로써 그는 타인의 기분에 영향을 주고, 타인의 칭찬은 거꾸로 그의 기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행동, 관심, 반응의 피드백을 통해 행동을 재조정하고 새로이 관심과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 특유의 예술적 기반을 이룬다.
다른 종에게서도 예술의 첫 자극을 찾아볼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은 없다. 정신에 호소하려고 탐구적 행동을 보이는 동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립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종의 예술적 충동은 모든 정상적 개체에게서 뚜렷하게 발달한다. 다른 종에게서는 고립된 불꽃이었던 것이 인간의 예술에서는 꾸준한 흐름이 된 것이다. 그 원인은 뭘까?
인간 예술의 기원을 말해주는 증거는 극히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언어의 기원을 탐구할 때처럼 우리는 개체의 발전이 종의 발전을 개략적으로 재연하는 방식에서 상당 부분을 연역해내야 한다. 그러나 구어는 사라지지 않고 계승되는 반면 문어가 사용된 기간은 수천 년에 불과하며 완전한 예술품의 역사도 수만 년 정도다. 1994년 프랑스의 쇼베 동굴에서 발견된 그림은 동굴 예술의 출발점을 1만 7,000년 전에서 3만 2,000년 전으로 앞당겼다. 그 사이 기간도 충분히 길기 때문에 아직 발견해야 할 게 많다.
쇼베 동굴의 모든 그림이 그린 사람의 의도를 나타내는지는 알 수 없다. 음부티족의 아빠가 보여준 놀이처럼 그 그림들은 동물을 표현한다. 아마 주술적 의미를 가졌거나, 그림에 나오는 힘센 동물을 다스리는 힘의 감각을 전달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예술적 요소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그것이 그림이라는 것, 동물을 그린다는 것, 솜씨 있게 그려야 한다는 것, 그림이 유사성과 힘의 감각을 담지 못하면 의미나 주술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쇼베 동굴이 돌연한 도약으로 보이는 이유는 거기서 예술이 발명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인상적인 예술을 선보인 곳이 바로 거기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장소는 사람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워도 그림을 보존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벽에 난 자국은 한가한 오후의 괜스런 낙서가 아니었다. 쇼베 동굴은 거주지가 아니었고 그 그림들은 석기시대의 벽지가 아니었다. 횃불이나 수지양초를 들고서만 들어갈 수 있는 깊은 지하에 자리 잡은 그 외딴 동굴은 날씨나 동식물 등 외부의 침탈을 막기 위해 일부러 신중하게 선택한 장소였다. 장인의 놀라운 솜씨를 보존하기에 딱 알맞은 곳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예술을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지만, 대규모 미술관에 보관된 귀중한 예술품 혹은 미술관 자체가 앞으로 3만 년이 지날 때까지도 무사히 보존되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다른 생물종은 그런 성과에 접근하지 못한다. 원숭이와 코끼리에게 적절한 도구를 주면 종이에 물감을 덕지덕지 칠한다. 1950년대에 데스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 영국의 동물행동학자이자 인류학자: 옮긴이가 침팬지에게 종이와 붓, 물감을 주었더니 침팬지는 제법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보상이 없었는데도 그저 즐거움만으로 그림에 몹시 열중했고 나름의 감각을 선보였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원숭이는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곧바로 흥미를 잃었고, 표현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것은 시도하지 못했다.
어떤 면에서 쇼베의 예술은 돌고래의 기포 예술이나 침팬지의 그림과 닮은 데가 있다. 생존에 직접 필요하거나 생존 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예술가와 동료들의 눈과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돌고래의 기포 예술과 달리 동굴벽화는 내구적인 매체로 그려졌으며, 수천 년 뒤에도 유사성을 식별할 수 있다. 그 동굴벽화는 유사성의 강력한 인지적 힘을 가졌고 보는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기 때문에, 다른 보이지 않는 힘들을 능가하는 힘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돌고래의 기포 예술이나 침팬지의 그림과 달리 쇼베 동굴벽화는 인간의 보편성을 반영한다. 심리학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물을 그리려 할 것이다. 막대기나 진흙으로, 마임이나 춤을 통해, 혹은 소리의 모방이나 이야기를 통해, 혹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평면에 동물을 표현한다. 그려진 동물과 동물의 그림을 권장하던 문화는 이제 사라졌지만, 현대 사회의 우리는 쇼베 동굴벽화를 즉각 알아보고 깊은 인상을 받는다. 벽화를 그린 화가들이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상관없다.
쇼베 동굴벽화가 그려질 무렵에 예술은 인간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런 정교한 예술품이 제작되기까지는 아마 나무껍질이나 가죽 같은 표면을 재료로 삼아 오랜 기간 연습과 실험이 있었을 것이다. 쇼베 동굴처럼 온전히 전해진 대규모 유물과 곳곳에 분산된 3만여 년 전의 유물들은 광범한 예술의 전통을 말해준다. 예술은 인간의 공유물이 되었고, 세련된 표현과 전문적인 솜씨를 필요로 했으며, 즉각 공감을 얻었고, 주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돌고래와 인간은 약 1억 년 전까지 조상이 같았다. 침팬지와 인간은 600만 년 전에 갈라졌다. 쇼베 동굴벽화의 연대는 3만여 년 전이다. 우리 시대에는 콘크리트 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린다.
1981년도 뉴질랜드의 어느 그라피티graffiti 달력에는 오클랜드 시의 풍경 사진이 있다. 한 사람이 풀밭을 달리고 있고 그 뒤편에 옹벽이 보인다. 그 벽에는 누군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1미터 크기의 글자들을 써놓았다. 너비는 10미터가 넘었는데, "랠프, 돌아와. 그냥 뾰루지였어."라고 쓰여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시구보다 짧은 그 열두 글자의 문구는 이야기, 연극, 비극, 농담, 그리고 그라피티라는 매체에 대한 왜곡된 성찰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섹스로 전염되는 질병에 걸렸다는 생각에 자신의 부정함이 밝혀져 애인이 떠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경솔한 행동에 불과했다는 게 드러났다고 하자. 이제 애인에게 돌아오라고 하고 싶지만 어디 있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의 감정과 신체의 상태에 관한 내밀한 사항을 10미터 길이의 메시지로 퍼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질투, 포기, 상실의 비극, 그리고 원상을 복구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한순간에 메시지의 내밀함과 매체의 공공성 사이의 불균형에 관한 자의식적 농담으로 뭉뚱그려진 것이다.
글쓰기는 동굴벽화보다 후대에 생겨났으나 이야기의 창작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인간의 보편성이다. 앞에 말한 그라피티 작가의 행동은 진화의 비용과 이득이라는 견지에서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메시지를 만들어 다듬고 그 정도 크기로 스프레이를 뿌리는 데 재료비와 시간이 투입되었고, 공공재산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체포될지 모른다는 위험도 있다. 그렇다면 이득은 뭘까? 그 그라피티는 서명이 없었고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내내 익명의 작품으로 남았다. 아마 작가는 뉴욕의 키스 헤링Keith Haring이나 런던의 뱅크시Banksy처럼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겠지만, 정작 그 작업은 혼자 몰래 했을 것이다. 그 그라피토그라피티의 단수형: 옮긴이가 얼마나 큰 환호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작가는 그 일을 가치 있게 여겼을 게 틀림없다. 그는 오로지 그 발상의 즐거움과 관객의 즐거움을 추구한 것이고, 익명의 관객들은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작가는 감상자가 그 몇 마디를 가지고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함축된 비극과 더불어 그것을 상쇄하는 유머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관념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그 그라피토는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고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진화적 견지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저 전에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뭔가를 공유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서 우리의 정신에 호소하고 타인에게도 전달하고 싶다는 충동이다.
우리는 불쑥 드러나는 농담이라도 편안한 웃음으로 넘긴다. 그러나 우리가 알맹이도 없고 허구인지 장난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도 이야기와 농담을 즉각 알아듣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까? 정신은 셰익스피어와 같은 시대 사람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생각했던 것처럼 귀납적이지 않다. 우리는 모든 증거가 나올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린 다음 조금씩 전진해 결론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발견된 것을 크게 뛰어넘는 추론을 곧바로 구성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앞에 든 사례처럼 그라피토 작가의 뛰어난 솜씨 덕분에 감명을 받는다.
스토리텔링은 문학의 핵심이다. 하지만 독자인 우리가 빈약한 암시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틈을 메워 상황을 추론하는 능력을 연구하는 문학적 탐구는 드물다. 그냥 그 과정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저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경우가 있다.
우리는 흔히 시각을 직접적이고 투명하게 여긴다. 그러나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시각적 이해를 프로그램화해 컴퓨터에 넣으려 할 때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깨달았다. 더구나 이야기식 이해는 아무리 단순하다 해도 프로그램화하기가 무척 어렵다. 나는 컴퓨터가 신속한 처리와 전환 능력으로 체스 게임에서 카스파로프Kasparov, 러시아의 체스 세계 챔피언: 옮긴이 같은 사람을 꺾은 일을 두고 컴퓨터가 사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컴퓨터에 예상치 못한 내용, 예컨대 "랠프, 돌아와. 그냥 뾰루지였어."라는 문구를 촬영한 사진을 입력했을 때 컴퓨터가 그것을 읽고 이야기를 추론한 다음 스스로 농담이라고 인지하고 웃는다면 비로소 컴퓨터가 사유할 줄 안다고 믿을 것이다.
인간 행동을 진화적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유전적 결정론에 빠지지는 않는다. 물론 스프레이 페인팅은 진화의 소산이 아니다. 하지만 말의 예술, 미술, 음악, 키네틱 아트kinetic art, 모빌처럼 움직임을 이용한 예술: 옮긴이 등 각종 예술에 참여하고 반응하려는 충동은 인간 문화 전반에 걸쳐 존재하며,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정상적인 어린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했거나 전혀 새로운 것을 고안했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몫이다. 그렇게 복잡한 행동, 때로는 시간과 자원의 면에서 값비싼 데다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명시적인 이득도 거의 없는 행동이 어떻게 인류 전체에 널리 퍼졌을까?
이 책 《이야기의 기원》의 주요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생명을 설명하는 가장 넓은 맥락에서 진화를 끌어들여 픽션(나아가 예술 일반)을 설명한다. 둘째, 현대의 학술적 문학 연구에서 지난 수십 년간 문학의 즐거움, 삶, 예술을―의도적으로―질식시켰던 사유와 실천의 오류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1부에서는 진화와 인간 본성을 도입하고, 2부에서는 예술 일반을 설명하고, 3부에서는 생물학적 적응으로 픽션 예술을 설명한다. 4부와 5부는 서로 다른 이야기의 '기원'을 말해주는 두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다룬다. 하나는 가장 크게 성공한 고대의 이야기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보는 역사적 기원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이를 위한 가장 위대한 스토리텔러의 아름다운 작품 《호턴이 듣고 있어!Horton Hears a Who!》에서 보는 개별적 기원이다. 마지막으로 결론과 발문에서는 문학과 삶을 이해하기 위한 생물문화적 관점의 여러 가지 의미를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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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은 있는가?
햄릿은 엘시노어덴마크의 도시 헬싱괴르: 옮긴이의 배우들에게 과장된 연기를 하지 말라고 말한다. "연극의 목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본성을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본성이란 곧 인간 본성이다. 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라고 말하듯이, 사람들은 예전부터 문학이 본성, 특히 인간 본성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옛날'이라 하면 플라톤이 인간의 삶을 모방하는 문학의 힘을 마땅치 않게 여겼던 것,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의 모방 능력에 감탄한 것, 스탕달이 소설을 도로변의 거울에 비유한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적어도 대학의 문학 학과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 본성의 관념은 인간 본질을 믿는 '본질주의'라는 이유로 거부된다. 현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는 인간 본성이란 없고, 다만 지역 문화의 구성체만 있을 따름이다. 달리 생각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와 우리가 하는 것을 변화시키려는 희망을 위협하게 된다.
이런 태도는 혼란스럽다. 보편적인 인간 본성을 거부하고 지역 문화적 차이만 내세우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 본성에 관한 하나의 주장이다. 즉 그것은 인간의 정신과 행동이 전적으로 문화에 의존하며, 오직 인간만이 그렇다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우리의 정신과 행동은 항상 본성과 양육, 유전자와 환경문화적 환경을 포함한다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 주장은 다른 종에 관해서도 착각하고 있다. 문화를 가진 다른 종, 적어도 침팬지는 야생에서 관찰되는 각 집단마다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지역 문화가 없으면 생존하지 못한다. 일상적인 차원에서도 우리가 다른 인간들과 함께하려면 인간 본성에 관한 암묵적인 이론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개나 쥐나 침팬지처럼 여기지 않는다. 이를 드러낸 모습도 로트바일러와 미소 짓는 인간의 얼굴은 전혀 의미가 다르다.
문학 학과의 많은 사람이 인간 본성을 설명하는 진화의 힘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 본성의 관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에 비해, 인류학에서 종교와 사회학까지 다른 분야의 많은 사람은 최근 우리 종을 형성한 먼 과거가 우리의 현재와 가까운 과거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정신의 진화적 측면은 우리가 좋아하는 화석 기록으로는 알 수 없을지라도 종, 문화, 삶의 단계에 관련된 여러 가지 원천에서 증거가 수집되었다. 진화론, 동물과 인간의 유아, 아이, 성인을 대상으로 한 관찰과 실험, 게임이론, 인공지능, 컴퓨터 시뮬레이션, 임상심리학과 인지심리학, 신경영상 등 다방면에서 우리의 정신과 행동은 진화를 통해 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지역 문화가 우리를 형성하기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서로 공통점이 많았던 것이다.
증거를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우리의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 보노보(피그미침팬지), 기타 유인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신체적 진화를 인정하는 사람들도 인간의 정신과 행동을 우리의 먼 과거가 만들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진다. 나는 그 거부감의 배후에 있는 오해와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한다.
인간의 차이
인간 본성의 진화적 견해는 주로 '보편성', 즉 우리 두뇌와 행동의 공통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간의 커다란 문화적 차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차이는 《종의 기원》이 출판된 지 한 세기 반이 지나는 동안 다양한 형태로 과장되었다. 우선 인종주의가 그랬고 그다음에는 반인종주의 노선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후반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극성에 달했을 무렵, 다윈주의와 특히 '적자생존'(원래는 다윈의 용어가 아니었다)의 관념은 사회다윈주의자들에게 채택되어 강자가 승리한다는 생각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경쟁에서의 성공은 곧 우월함을 '증명'한다는 논리였다. 그들은 이런 논리를 토대로 인종적 차이의 '과학'을 정당화했는데, 말할 것도 없이 당시에는 유럽의 인종적 우월함을 뜻했다. 그 결과는 '인간에 대한 오판'이었다. 결국 그것은 '인종적' 차이를 바탕으로 특정한 인종이 우월하고 다른 인종들은 저열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계획이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현대의 진화적 접근은 그런 계획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확연히 눈에 띄는 차이가 있는데도 모든 인간이 유전적으로 특이할 만큼 단일한 종에 속한다는 것은 과학으로 증명되었다(세계 각지에서 인간 세 명을 선택해 유전자를 조사해보면 그 차이는 점점 줄어드는 아프리카 서식지의 침팬지 세 마리의 차이보다도 작다). 인종 간의 차이보다 지역의 동질적 인구 내의 편차가 더 클 정도다. 20세기 인종주의가 가져온 끔찍한 비극을 잘 알고 있는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은 '인류의 심리적 통일성'을 강조하며, 인간 정신들 간의 차이보다 공통점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서구가 정한 기준에 따라 모든 민족을 판단해야 한다는 19세기 서구의 가정은 20세기 초에 들어 문화인류학자들에게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차이가 생물학적 차이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그 차이가 우월함이나 저열함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문화인류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인간 본성이 문화의 압력을 받아 신축성 있게 변형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20세기 초에 인류학자들은 문화의 힘과 다양성을 주장했지만, 아무리 인간 행동이 거의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다고 말해도 그들이 실제로 관찰한 행동들은 서로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예를 들어 어떤 인간 문화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영장류 친척의 "사회 체계와 조금이라도 비교될 만한" 것은 없다. 생리학은 인간과 유인원이 성사회적 체계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 자란 수컷 침팬지가 자기 집단 내의 암컷과 짝짓기를 하려 할 때, 그 커다란 고환은 수컷들의 성적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말해준다. 우리와 매우 가까운 또 다른 종인 보노보 사회에서는 암컷끼리 열렬한 짝짓기가 빈번하게 일어난 결과 암컷의 음핵이 커질 뿐 아니라 암컷 동맹이 세력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다. 고릴라의 경우 나이 든 수컷이 모든 암컷을 성적으로 지배하고 어떤 수컷도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데, 이렇게 수컷들의 노골적인 성적 경쟁이 없기 때문에 고릴라 수컷은 덩치가 큰 데 비해 고환은 아주 작다.
1960년대 후반에 인간의 차이에 관한 인류학자들의 주장은 인간과학만이 아니라 인문학에도 침투하기 시작했다. 서구적 의미를 가진 인간 본성의 헤게모니를 거부하는 것은 마치 도덕적 성전인 듯했다. 예를 들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프티부르주아 문화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신비화"를 비판했다. 많은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는 인간 본성을 거부하고 '본질주의'를 성토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일부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다양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느라 인간의 보편성을 간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연장선에서 어느 사모아의 학자는 자신의 민족에 관해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문헌을 남긴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를 개탄했다. 그녀는 "우리와 다른 인류의 동질성을 제거했다. …… 우리는 당신네들과 다르지 않다." 차이만 인정하고 공통성을 거부하면 인간 본성에 관한 서구의 편협한 기준을 거부하는 고결한 동기를 훼손하게 된다. 가나 태생의 미국 철학자인 크와메 앤서니 아피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의 인종에 속한다"는 생각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의 존재, 인간의 정의에 각별한 관심을 품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인간 본성에 관한 서구의 가정을 비판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바르트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확장하고 이후 교조화된 인류학적 비판은 너무 근시안적이었고 불충분했다. 구조주의와 거기서 갈라진 다소 반항적인 사조가 20세기 초에 사회과학이 정립한 방향을 계승하는 동안 자연과학은 반대 방향을 취해 처음으로 진화, 인간과 동물의 인지와 행동이라는 맥락에서 인간 본성을 이해하려는 포괄적인 과학적 시도에 나섰다. 인간 본성에 관한 서구의 부르주아적 가정을 비판하는 최선의 방식은 인간 본성의 존재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과학의 엄격한 실험을 이용해 인간을 다른 종들에 비추어 조사하고, 수렵-채집 무리에서 현대 산업국가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그 역사와 예술, 특히 구술문학의 예술을 연구하고, 인간의 보편성과 특수성, 유사성과 차이를 함께 탐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진화적 과거를 고려해 인간 본성을 탐구하면, 문화적 차이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오로지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으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문화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인간이 문화적으로 다른 이유가 인간이 문화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라는 말은 순환논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우리 문화' 혹은 '그들의 문화'라는 견지에서 남녀 행동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인간 문화만이 아니라 수백 종의 동물에게도 그와 비슷한 체계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의 진화적 설명은 사회성, 사회적 학습의 이점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여러 종에게서 나타나며, 그 정점은 인간 특유의 문화 감수성이다. 인간 문화의 차이는 정신이 진화한 덕분에 가능해졌다. 정신의 복잡한 구성이 공유되지 않았다면 문화도 존재할 수 없었다. 그 공유된 설계 때문에 여러 문화에 걸친 보편성이 생겨난 것이다. 거기에 인간 본성이 있다.
생물학적 혹은 유전적 결정론
진화된 인간 본성의 관념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정신과 행위가 생물학적으로나 유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런 우려는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를 만큼 큰 잘못이고 엉터리다.
우리가 다른 종의 생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유전적 결정론'이라고 해보자. 이 사실은 우리의 자유를 제약할까? 우리가 지금과 같은 고유한 개체로, 형제나 부모와 닮거나 닮지 않은 존재로, 우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존재로 태어난 것도 '유전적 결정론'이라고 해보자. 이것은 달갑지 않은 일일까? 유전자가 우리를 형성한다는 관념은 우리가 환경의 산물이라는 관념에 비해서는 덜 결정론적이다. 왜냐하면 성적 번식에서 유전자 재조합이 복합하고 우연적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예측 불가능한 변형의 산물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제약의 요소라기보다는 가능성의 요소로 봐야 한다. 조절유전자regulatory gene, 다른 유전자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유전자: 옮긴이에서 한 번만 돌연변이가 일어나도 우리의 신경세포는 침팬지보다 몇 배나 많은 세포분열을 일으키며, 우리의 두뇌는 침팬지의 두뇌보다 세포 수가 몇 배나 많아진다. 영장류 계열의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 모방이나 공감을 유도하는 두뇌 속의 신경세포: 옮긴이는 특히 인간에게서 엄청나게 확산되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거울처럼 비추는 강렬한 감정으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정서적 연관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가 다른 포유류와 달리 네 다리가 아니라 두 다리로 걷도록 결정한다. 우리는 뱀처럼 미끄러지거나 제비처럼 날 수 없다. 하지만 유전자가 우리에게 걷도록 결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걷는 것까지 유전자의 지시를 받는 걸까? 우리는 뛰지 않고 걷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르자 앞다리가 자유로워져 석기를 제작하고 나중에는 컴퓨터 게임까지 만들어 놀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두 다리로 걷지만, 그 사실이 우리가 깡충 뛰거나 서핑을 하거나 스키를 타지 못하도록 막지는 않는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인간 본성의 진화를 받아들이면 유전적 결정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치부한다. 유전자가 "항상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지능이 없는 유기체나 단세포 유기체에서도 유전자는 상황에 맞는 조건적 규칙에 따른다. 낮은 지능을 가진 생물도 그럴진대 지능이 높은 생물은 말할 것도 없다. 유전자는 환경의 역할을 부인하는 요소가 아니라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추출하는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
도킨스는 성욕이 유전자에서 나온다고 추측하지만 우리는 보통 사회적으로 필요할 경우 성욕을 억제할 수 있다. 우리는 "통계적으로 유전자가 인간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선뜻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유전자의 영향력이 다른 영향력에 의해 변경되거나 무화되거나 취소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감정이입의 능력이나 억제하고 숙고하는 능력 같은 다른 유전적 능력도 가지고 있다. 재닛 래드클리프 리처즈Janet Radcliffe Richards는 이렇게 설명한다. "진화심리학은 우리 성격의 다양한 측면이 유전자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감정이 자제하거나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특정한 성향의 기원과 깊이를 말하는 것일 뿐 병리적 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생물학적 견해에 따르면 개인은 진화를 통해 적응력을 가지게 된 자유로운 행위자다. 개인은 장소와 시간의 수동적 산물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전략적으로 선택할 줄 아는 존재다.
본성 대 문화?
인간 본성의 생물문화적 개념은 사회적·문화적 측면을 배제하거나 경시하지 않는다. 생물학을 사회나 문화와 대립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사회성은 사회적 동물들에게 서로 어울리라고 권장하는 유전자를 통해 생물종 안에서만 생겨나기 때문에 생물학에 속한다. 문화는 사회적인 것 안에서만 생겨나므로 이것 역시 생물학에 속한다. 문화는 지역적 관습과 유행까지 포함하는 행동의 비유전적 전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지난 수십 년간 포유류와 조류의 여러 사회적 종들에게서도 발견되었다.
인간이 진화를 통해 특유의 문화적 능력을 얻어낸 이유는 문화가 유전자보다 더 신속하게 환경에 적응하는 길로 안내해주었기 때문이다. 유전적 변화가 인구에 확산되려면 보통 여러 세대의 기간이 필요하지만, 문화는 유리한 요소를 한 세대 안에도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고 이후 세대에 전승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 본성에 관한 탐구에서 '생물문화적'이라는 말과 '진화적'이라는 말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한다. 진화를 통해 형성된 인간 본성을 탐구하려면 생물학과 문화를 함께 고찰해야 한다.
본성 대 훈육?
우리의 정신이 진화의 기획을 반영한다고 해서 본성만 중요하고 훈육의 여지는 전혀 없다거나, 유전자가 전부이고 환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복잡한 생물학적 사고에서는 그런 대립을 철저히 불신한다. 생물학자들은 표현형phenotype, 유기체 전체이 유전자형genotype, 각 세포 DNA의 유전적 비결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복합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본성 '대' 자연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이를테면 본성 x퍼센트가 훈육 y퍼센트보다 100만큼 적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x와 y가 함께 작용하며, 훈육의 입력에 따라 본성이 활성화되는 관계다.
정의로운 본성
생물학이 인간 생활의 토대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인간 도덕의 모델을 강요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원이 있다고 해서 특별한 목적이 미리 예정되어 있을 이유는 없다. 생물학은 늘 수많은 다양한 모델을 제공하며, 문화는 생물학의 일부분으로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기적인 본성
유전자를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생식을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면으로만 번식한다는 점에 있다. 유전자는 상호작용하는 다른 유기체의 이익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관장하는 유기체의 이익도 항상 돌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전자는 유기체 전체가 건강하고, 해당 유전자의 상당수나 전부를 가진 개체들의 집단 전체가 성공할 경우 이익을 얻는다. 도킨스는 잘 알려진 자신의 첫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제목을 '협력적 유전자The Cooperative Gene'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인상적인 느낌은 덜하겠지만.
진화를 인간 행동에 적용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자칫 이기심과 경쟁이 강조되고 이타심과 협력이 위축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사회생물학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협력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협력과 경쟁의 복잡한 조화다. 실제로 진화심리학과 진화경제학은 다른 심리학이나 경제학보다 관대함, 신뢰, 공정함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본성 대 자유
인간 본성에 관한 진화적인 견해는 자유를 위협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우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우리의 정신을 틀에 짜 맞추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정신을 빈 서판으로 여기는 문화적 구성주의는 '독재자의 꿈'이다. 만약 우리가 전적으로 사회에 의해 구성된다면 그 사회는 우리를 노예와 노예주로 만들 것이며, 이후 우리는 사회적으로 본성이 구성될 것이므로 그것에 반대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고정불변의 본성
진화론은 종들이 항상적인 변화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진화를 인간 본성에 적용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묘하게도 진화를 고정불변으로 여긴다. 다윈과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의 중요한 발견은 종들이 엄격히 고정된 게 아니라 늘 변화한다는 것이었다. 환경이 안정적일 때는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환경이 불안정할 때는 빠르다. 진화를 통해 유기체는 급속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성적 번식, 신경계, 적응을 위한 지능, 사회적 학습, 문화 등 다양한 방식을 발전시켰다. 생물학자 데이비드 슬론 윌슨David Sloan Wilson은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경우 문화의 독특한 역할로 인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아직 진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진화를 하이퍼드라이브hyperdrive, 과학소설에 나오는 빛보다 빠른 이동 방식: 옮긴이로 경험한다.
인간을 교육의 산물로만 보면 문화적 수단으로 인간을 쉽게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환경에서 생겨난 특성은 거의 되돌릴 수 없다. 한 번 구운 감자를 원래 상태로 돌려놓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계가 담론이나 텍스트라고 보는 20세기 후반의 인문학자들은―전문적 텍스트 독해자들에게는 위안이 되겠지만―세계를 다르게 독해하는 것만으로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언어 바깥의 세계도 분명히 존재하며, 그 세계는 실질적인 사회 변화를 요구한다.
진화적 견해는 지식에 의거한 사회 변화를 허용한다. 생물학적 환경을 이해하고 어떤 원인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면, 환경을 변화시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진다. '조건적' 환경이 '조건적'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그에 맞는 환경을 만들어 우리가 선호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오언 존스Owen Jones는 인간 행동을 변화시키는 지레를 법칙에 비유하고, 그 지레가 힘을 쓰기 위해 필요한 받침점을 인간 본성에 관한 지식에 비유한다.
본성과 권력
어떤 사람들은 '자연,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자연의 냉혹함을 표현한 테니슨의 시구: 옮긴이이라는 견해가 권력과 계급을 안정시켰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진화인류학과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인간과 다른 포유류의 중요한 차이는 인간이 지배를 거부하는 데 협력함으로써 지배의 충동을 통제하는 방식을 개발했다는 데 있다. 이 능력이 인간의 고유한 협력을 낳았다. 다층적 선택이론(제4장 참조)은 집단 내 적응성의 차이를 최소화한 집단이 다른 집단들과 더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본성 대 인간의 고유성?
인간은 언어, 선진 기술,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삶을 진화의 견지에서 본다면, 인간과 다른 생물학적 세계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 진화는 사회적 감정이나 실질적 차이와 같은 중요한 측면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과 상당한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진화는 무기 화합물에서 생명체로, 무핵 세포(박테리아)에서 핵 세포(동물, 식물, 균 등 진핵 세포)로, 단세포 유기체에서 다세포 유기체로, 개별 유기체에서 사회로 여러 차례 중대한 변화를 거쳤다. 각 단계마다 새로운 협력의 형태가 등장했고, 근본적으로 새롭고 더 복잡한 가능성이 생겨났다. 지금의 생물학자들은 인간 문화를 가능케 한 협력을 진화상으로 가장 최근의 주요한 변화라고 본다.
본성과 지식
상당수 인문학자들이 인간 본성의 진화적 설명을 거부하는 부분적인 이유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소박한 경험론을 전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은 지식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문화적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따라서 특정한 문화의 관점에서만 '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시각은 인간 지식을 왜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지, 나아가 그 설명을 왜 문화 구성주의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지 말해주는 쉬운 사례다. 일상적 경험에서 정신은 투명해 보인다. 이 점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정신은 온전한 한 덩이로 보이고 우리가 현실과 직접 접촉하도록 해주는 듯하지만, 실은 모종의 하위 경로를 갖고 있다. 그 경로는 대단히 빠르고도 자동적으로 결과를 전달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처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바깥을 내다보고 쉽게 공간과 사물의 세계와 거기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를 파악한다. 이럴 때 우리의 눈은 세계에 직접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듯하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은 그런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 문화적 경험을 통해 보라고 학습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민족들은 색깔을 표현하는 단어가 둘밖에 없다(밝음과 어둠 혹은 흑과 백). 또한 그림에 원근법을 이용할 줄 모르는 문화권도 많다. 그래서 색깔과 원근법은 임의적이고 인습적인 것이라고 주장된다. 20세기 중반, 서구 문화에 노출되지 않은 부족민들은 서구적 의미의 '인습'(원근법, 흑백) 때문에 사진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는 인간 본성을 부정하는 전형적인 모욕이며 불쾌한 주장이다. 실은 비둘기도 사진을 해석할 수 있으며, 인간과 자신들의 차이를 식별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언어가 제각기 달라도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며, 각각의 색상들이 어떤 색으로 이루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각은 모든 공간, 운동, 형태, 외양, 색깔을 정신에 직접적이거나 투명한 방식으로 전달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인간의 시각은 과거의 독선적인 가정과 달리 여타의 감각들보다 더 섬세하지 않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만이 색깔을 보는 시각을 가졌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우리는 벌처럼 자외선을 보지 못하고, 살무사처럼 적외선을 보지도 못하며, 일부 나방처럼 밤에 색깔을 보지도 못하고, 새와 곤충, 심지어 식물처럼 빛을 편광시키는 능력도 없다. 인간의 3색 시각은 많은 종들의 2색 시각보다 낫지만, 비둘기는 다색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시각은 비록 많은 잠재적 정보를 놓치지만,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작동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50개가량의 다양한 두뇌 영역을 이용해 시각 정보를 복잡한 실시간 감각으로 만들어낸다. 모서리, 운동의 속도와 방향, 무생물의 운동 등에 반응하는 전문화된 세포들도 있으며, 인간의 얼굴이나 특정한 각도와 표면에 반응해 두뇌의 감정선인 편도체를 통해 자동으로 감정적 판단을 이끌어내는 세포들도 있다. 낮과 밤의 시각 체계가 다르고, 장소와 대상의 시각 체계도 다르며, 무의식적 조기경보 시각 체계와 의식적 시각 체계도 다르다.
사회적 인지나 사회적 감정과 같은 인간 정신과 본성의 다른 여러 측면에서도 그렇듯이, 우리는 직접적 성찰이나 지역 문화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게 뭔지 안다고 가정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대체로 본성은 시각과 정신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 과학이 없이는 알기 어렵다. 그 점은 민족적·문화적 기원과 무관하게 정상적인 인간 정신의 경우 다 똑같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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