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은 ‘새롭다’를 어떻게 풀이할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 본다. ‘새롭다’는 관형사인 ‘새’(「1」이미 있던 것이 아니라 처음 마련하거나 다시 생겨난. 「2」사용하거나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한.)에 접사 ‘-롭다’(‘그러함’ 또는 ‘그럴 만함’의 뜻을 더하고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가 붙은 말인데, 국어사전의 풀이는 이렇다. “「형용사」 「1」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다. 「2」전과 달리 생생하고 산뜻하게 느껴지는 맛이 있다. 「3」((일부 시간이나 수량을 나타내는 말을 주어로 하여)) 매우 절실하게 필요하거나 아쉽다.” 「1」과 「2」는 굳이 용례를 살펴보지 않아도 금세 와닿는데, 「3」의 경우는 선뜻 그 예가 떠오르지 않는다. 국어사전이 든 예는, “단돈 만 원이 새로운 형편이다.” 정말 절실하게 다가오는 예다.
국어사전의 뜻풀이에 동시를 짝지어 읽어본다.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는 동시’, ‘전과 달리 생생하고 산뜻하게 느껴지는 맛이 있는 동시’, ‘매우 절실하게 필요하거나 아쉽게 여겨져온 동시’. 이것을 다시 새로움의 세 가지 차원이란 측면으로 전환해보면, 「1」동시대성으로부터 탈주하는 동시, 「2」자기로부터 탈주하는 동시, 「3」신인의 출현으로 비로소 제출되는 동시쯤 될 것 같다. 요컨대 새로움의 세 가지 차원이란, 동시대성으로부터의 탈주와 자기로부터의 탈주라는, 이중의 배반과 파산에 더해, 새로운 신인의 출현을 일컫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2000년대 동시는 이 셋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2010년대는 동시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 실물의 증거로 삼을 만하다.
동시대성으로부터의 탈주
새로움의 첫 번째 차원은 동시대성으로부터의 탈주다.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다”고 할 만한 동시집, 그러니까 과거부터 이제까지를 통틀어 새롭다고 말할 수 있는 동시집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집》(모두 5권, 비룡소 2005~2010), 김륭의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문학동네 2009), 남호섭의 《벌에 쏘였다》(창비 2012), 박성우의 청소년시집 《난 빨강》(창비) 등이다. 이와 함께 이옥용의 《고래와 래고》(푸른책들 2008), 송찬호의 《저녁별》(문학동네 2011), 정유경의 《까만 밤》(창비 2013), 김개미의 《어이없는 놈》(문학동네 2013)을 동시대성으로부터의 탈주에 성공한 동시집으로 꼽을 수 있겠다.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집》은 그가 오랫동안 지녀왔던 동시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면화한 것으로, 이오덕이 시정신의 반대편에 놓고 신랄하게 비판한 유희정신을 그 정반대편의 자리에서 긍정적, 발전적으로 맞받아치는 가운데 생산해낸 역작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의 문제의식은, “한국의 동시들은 그동안 뜻이나 의미에 너무 치중해 시를 억압한 부분이 있었다. 언어란 것은 뜻도 있지만 소리도 있고 문자도 있다. 이번 시집에선 우리나라 동시가 갖고 있는 울타리를 깨고 동시의 영역을 개척, 확장하고 싶었다. 한시, 영시 등은 모두 운문시 전통에서 출발하는데 한글은 운문시 전통이 별로 없어 전부터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말놀이 동시는 소리 내 읽어야 하고 시의 의미에 구애받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이 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배울 수 있으려면 부모들이 먼저 의미에서 해방돼야 한다. 흥미가 배제된 교육은 문제가 있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한다.”(언론 인터뷰)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결과가 총 371편의 동시를 수록한 《말놀이 동시집》이다. 2000년대 한국 동시는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집》으로부터 ‘말과 놀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감각을 수혈 받으며 동시 부흥기의 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로부터 언어나 운율에 대한 섬세한 고려, 메시지나 의미에서 자유로운 여러 차원의 놀이 실험, 스타일에 대한 자의식이 일반화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김륭의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는 “무슨 동시가 이렇게 어렵냐고 눈살 찌푸릴 사람이 많을 것 같”(‘책머리에’)다는 시인의 예상처럼, ‘어린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작품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이 표현방법을 달리함으로써 발생하는 난해성으로, 해석이 아예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다. 김륭은 다만 “시골 할머니가 입고 있던 빨강내복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관습적인(?) 상상력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기존 동시에서는 볼 수 없는 그만의 상상력, 표현방법이 작동하는 것이며, 해석의 어려움은 그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다. 김륭 동시는 쉬운 것만이 동시의 능사는 아니며, 아무리 해묵은 생활동시적 소재라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색다른 감각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점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최승호와 다른 지점에서 실험적 동시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남호섭의 《벌에 쏘였다》는 동시에서 시로 치고 올라간 경우다. 이 동시집을 강렬하게 특징짓는 것은 다큐멘터리 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한 ‘인물 산문시’들로, 이제까지의 동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재 확장 및 형식 파괴적 실험을 집중력 있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은 동시(同時)에, 동시와 시의 경계는 어디인가에 대한 쟁점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이오덕이 말한, “동시는 먼저 시가 되어야 하고, 그 위에 다시 동시로 되어야 한다”는 동시의 장르 경계(또는 장르 규약)에 대한 검토점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동시집은 아니지만 박성우의 청소년시집 《난 빨강》을 이 자리에 함께 놓는 것은, 이 시집이 동시대적 장르 범주를 벗어나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난 빨강》은, ‘동시는 초등학생, 중학생부터는 시’라는 이제까지의 교과서적 장르 구분 및 독자 구분의 헐거운 고리를 끊고, 창작과 감상의 주체로서의 청소년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한 책이다. 그러나 동시와 청소년시, 청소년시와 시의 경계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장르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청소년화자를 직접 내세우지 않은 작품의 경우, 청소년시와 시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또한 동시 독자 연령의 하향 범주화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어, 동시의 범주 또는 독자 확장에 장애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옥용은 철학 우화적 동시의 가능성을, 송찬호는 재래의 동시 문법을 따르면서도 자기만의 방법적 실험을 담은 빼어난 작품을 다수 보여주었다. 정유경은 여성적 감성과 언어 감각의 세계를, 김개미는 개성적인 화법과 활달한 상상력을 담은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동시대성으로부터 탈주하는 동시집을 낸 시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동시 장르에 대한 남다른 문제의식을 지녔다는 점이다. ‘나’는 어떤 동시를 쓸 것인가, 우리 동시의 결핍처는 어디인가, 독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등. 이제 이러한 문제의식은 몇몇 시인의 전유를 넘어 동시단 일반의 것이 되었다. 동시가 다양해질 수밖에 없고 좋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기로부터의 탈주
새로움의 두 번째 차원은 자기로부터의 끝없는 탈주다. “전과 달리 생생하고 산뜻하게 느껴지는 맛이 있다”는 것은 이제까지 동시를 창작해온 시인이 기존의 자기 작품과 달리, 생생하고 산뜻하게 자기 갱신의 지점을 돌파해 보여주는 경우를 말한다. 이병승의 〈AK 47〉(《어린이와 문학》 2012년 10월호), 이상교의 〈아름다운 국수〉(《어린이와 문학》 2013년 1월호), 이정록의 〈생강밭 하느님〉(《저 많이 컸죠》 창비 2013), 김미희의 〈습관〉(《동시마중》 2013년 5·6월호), 김환영의 〈울 곳〉(《글과 그림》 2013년 6월호), 유강희의 ‘손바닥 동시’(《동시마중》 2013년 7·8월호), 함민복의 〈노래들은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동시마중》 2013년 9· 10월호), 김유진의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는데〉(《동시마중》 2013년 9·10월호), 박소명의 〈풍경〉(《열린아동문학》 2013년 가을호), 장옥관의 〈가지런히 옥수수〉(《문학 선》 2013년 겨울호), 김미혜의 〈누가 코끼리를 울게 했을까〉(《동시마중》 2014년 1·2월호) 등을 놓을 수 있다. 이밖에도 얼마든지 더 많은 예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은 자기로부터의 탈주 현상이 동시단 전반의 분위기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겠다. 이 가운데 이상교의 〈아름다운 국수〉를 살펴본다.
오, 미끈한 발레리나
부엌 싱크대 서랍 속에
오래 누워 있었구나.
슈즈도 신지 않은
보얀 맨발.
한 묶음 집어
손으로 톡톡 키를 맞추고
끓는 물 냄비에 넣자
스르르 미끄러져 내린다.
둥근 치마가
꽃잎처럼 펼쳐진다.
보글보글 소리에 장단 맞춰
사뿐히 뛰어오르기,
한 바퀴 빙그르르 휘돌아 멈춰 서기,
새하얀 함박웃음이
동동 떠올랐다 넘친다.
설설 끓는 물을 벗어나
체에 받쳐 찬물에 몸 헹군
새초롬
매끄럼
말끄럼
아름다운 국수!
(전문)
아름답다. 어느 하나 아귀가 어긋나는 곳 없다. 아름다운 그림이고 소리며, 그것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한 언어다. 소품의 차원을 “말끄럼” 넘어선다. 이전의 시업詩業이 이 한 편의 완성을 위하여 있는 듯 하달 정도라고 하면 원로의 시인에게 결례가 될까. 독자들은 〈아름다운 국수〉에 이르러 이상교 동시의 새로운 매력과 만나게 된다. 이것이 자기로부터의 탈주에 성공한 작품이 보여주는 놀라운 면모다.
신인의 출현에 따른 새로움
새로움의 세 번째 차원은 개성적 면모를 지닌 신인의 출현에 의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매우 절실하게 필요하거나 아쉽게 여겨져온’ 부분을 채우며 등장하는 신인의 존재. 첫 동시집을 낸 시인을 포함해서 살펴보면, 강기화, 강정규, 고영민, 김두안, 김민정, 김성민, 김창완, 김철순, 김하루, 김희정, 나비연, 문인수, 박일환, 박철, 백무산, 성명진, 성미정, 송선미, 송진권, 신민규, 안진영, 윤제림, 이상희, 이세기, 이이랑(이대흠), 이창숙, 임복순, 장동이, 장세정, 장영복, 장철문, 전명희, 정상평, 조하연, 주미경, 한혜영, 함기석, 황인숙 등이 우선 떠오른다. 이 가운데 고영민, 김두안, 김민정, 문인수, 박일환, 박철, 백무산, 송진권, 윤제림, 이상희, 이세기, 이이랑, 장철문, 한혜영, 함기석, 황인숙 등은 시단에서 유입되어 동시 쪽 시인으로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이들이며, 강정규, 문인수, 성명진, 안진영, 장영복, 조하연, 한혜영, 함기석 등은 첫 동시집을 선보인 이들이다. 또한 김철순, 박철, 성미정, 송선미, 송진권, 신민규 등은 첫 동시집 출간 계약을 마치고 출간을 준비 중인 걸로 안다. 이 많은 이름이 동시에, 한꺼번에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2010년대 중반기 동시판의 진용이 만만찮게, 새 인물의 유입을 통해 지속적으로 충원되는 가운데 속속, 차근차근 완성되어 간다는 점 아닐까. 윤제림의 〈누가 더 섭섭했을까〉를 예시해 본다.
한 골짜기에 피어 있는 양지꽃과 노랑제비꽃이
한 소년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소년이 양지꽃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 내가 좋아하는
노랑제비꽃!”
양지꽃은 온종일 섭섭했습니다.
노랑제비꽃도 온종일 섭섭했습니다.
(전문)
윤제림은 최근 출간한 《새의 얼굴》(문학동네 2013)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여섯 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지만, 동시는 《동시마중》에 두 번에 걸쳐(2012년 7·8월호, 2014년 3·4월호) 발표한 4편이 전부인 신인에 속한다. 그런데 〈누가 더 섭섭했을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자기만의 동시 스타일이 완성돼 있다는 점이다. 즉 그의 동시는 동화적 상상력에 철학 우화적 요소, 웃음과 깊이를 한꺼번에 갖추고 있다. 송진권 동시가 그런 것처럼, 이미 완성태를 띠고 있다는 뜻이다. 시단의 시인이 동시로 관심을 옮길 경우 발생할 시적 에너지, 새로운 동시의 모습을 기대케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들 신인의 발표작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새로움을 우려하기보다는
끝으로, 새로움과 관련해 장옥관이 최초로 제기한 우려의 목소리(〈동시는 시인가 동심인가〉, 《동시마중》 2014년 3·4월호)를 들어보기로 한다.
“성인시 쓰던 시인들의 동시 쓰기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창작 기법과 더불어 소재의 확대,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의 발표로 이어졌지만, 한편으로는 동시가 너무 어려워지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져왔다. 예술성을 따지게 되면 늘 독창성이 문제가 된다.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방법이라야 새로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게 관건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동심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1차 독자인 어린이와의 소통이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게 되면 시와 동시의 경계가 사라지고 아동문학의 존립 근거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이처럼 문학성의 일방적인 강조는 복어 알처럼 맹독성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동심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도 곤란하다. 지금처럼 긴장감이 없는, 자체 갱신이 없는 작품을 양산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나타날 가능성이 큰 문제를 선제적으로 짚고는 있지만 좀 일찍 말한 것이 분명하다. 많은 시인의 참여를 통해 이제야 가까스로 펼쳐지기 시작한 동시판이다. 이렇듯 우려의 마음이 앞서 움츠러들기보다는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창작 기법과 더불어 소재의 확대,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생산하려는 의지와 열정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방법이라야 새로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고민이 필요하다. 아직까지 1차 독자인 어린이와의 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한 시인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장옥관이 대표적으로 언급한 김륭 동시의 난해성은 1차 독자인 어린이에 대한 고려가 부족해서도, 동심의 요소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김륭 동시는 동시대의 어떤 작품 못지않게 어린이 독자와 동심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문제는, “긴장감이 없는, 자체 갱신이 없는 작품을 양산”하는 동시단 한쪽의 해묵은 행태들이다. 우리 동시는 여전히 허기지다. 지금까지의 성취로는 조금도 충분치 않다. 더 새롭고 다양하게,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가야 한다. 어린이 독자와 동심은 동시의 닻이다. 그것을 끊고 표류하지 않는 한 모든 시도는 환영 받아 마땅하다.
★ 이 글은 《동화 읽는 어른》(2014년 4월호)에 동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