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동밝맑도서관 개관 전날에 강연했던 오다 다카시 교수의 저작 선집 출판에 부쳐 밝맑도서관 홍순명 대표께서 강연 소감을 정리하여 보내신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밝맑도서관 소식지 14호에 실린 것을 전재하여 게재합니다.
교육, 무기사회無機社會에서 유기사회有機社會로
역사의 반성과 민중의 발견
2011년 10월 21일에 귀한 손님이 홍동을 방문하셨습니다. 오다 다카시 선생입니다. 이번 방문은 대동문화대학의 오바나 기요시尾花淸 교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마나 교수와 함께 이전에 전공부 학생들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여러모로 신세를 졌던 소마 마유미相馬眞由美 님이 동행했습니다. 오다 선생은 일본의 진보적 교육계를 대표하는 회장이지만 민중 교육에 관심이 깊으시고 평생 관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평소 교육은 국경을 넘어 세계 평화를 목표로 해야 하고, 연구실은 현장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다 선생이 거동도 불편하신데 이런 벽촌까지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강연에 앞서, 모리 야스유키森康行 감독이 제작한 오다 다카시 선생의 교육기록 영화 〈희미한 빛을 향해〉상영을 했습니다. 지역에 정착한 하세가와 기세이와 조대성 씨가 한글로 더빙해서 내용 전달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영화 가운데 오다 선생이 2차 대전 기간 중, 농촌, 노동자와 사병생활을 같이 한 경험이 평생에 걸친 학문과 실천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해설이 있었습니다. ‘무겁고 긴 억압과 슬픔을 견딘 생활 속에서 축적된, 실제 상황 속에서 사물 자체와 마주치면서 그것과 어울리는 법을 몸 안에 새겨 넣은 민중 지혜의 크고 풍부함, 이 문화의 두꺼운 층에 학문도 예술도 포함되어 사회 전체가 떠받쳐지고 있다. 거기 비하면 오랜 학교생활을 통과한 사회의 상층부는 이런 민중 생활의 현실과 동떨어져 관념적이고 헛된 지식으로 피치자 위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大田堯「生命のきずな」偕成社, 32쪽을 이어붙임)
이와 같이 선생이 민중과 생활한 경험은 ‘러시아의 구원은 민중에서 온다’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그 민중과의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무지하다고 얕잡아보는 그들 속에서 오다 선생은 생활력과 지혜와 함께 사회 에너지의 원천을 발견한 것입니다. 민중의 눈으로 보면 엘리트는 민중 위에서 지시하고 어깨에 힘을 줄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공복公僕으로 민중을 섬기고 배우고 존경해야 할 것이고 공부는 보통의 직업이나 인생과 동떨어진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선생은 민중과의 만남으로 이렇게 교육의 본질에 대하여 평생 물으면서 줄列 밖에 있는 민중을 교육의 중심으로 끌어안으셨던 것입니다.
강연 장소는 풀무학교 50주년을 맞아 세운, 지역과 학교가 같이 쓰는 홍동밝맑도서관 1층이었습니다. 지역 교사들과 주민들이 주로 참석하였습니다. 선생은 먼저 오래전부터 과거 일본의 잘못된 역사에 대하여 남과 북 양쪽에 가서 사과를 하려 하였으나, 현재로는 그럴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죽기 전에 가능한 한쪽이라도 사죄를 하기 위하여 왔다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습니다. 선생은 서서 강연을 했는데, 나중에 동행한 이들에게 선생이 사죄하는 입장으로 선 자세를 고수하였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선생은 “사죄라 해도 말로만 하는 외교적 사과도 있지만 잘못의 원인을 교육적으로 알고 해결하지 않으면 같은 일이 되풀이되어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교육이 자체의 논리에 서서 정치나 경제의 동화 대상이 되면 안 된다는 다음의 말로 이어갔습니다.
교육은 개성과 영혼을 자라게 하는 것
선생은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개성이 있고 영혼이 있다, 교육의 원어인 educate도 개성과 영혼을 자라게 한다는 의미다, 사람은 모두 개성이 다른데 똑같이 동화同化시키는 것은 교육의 원리가 아니다, 참교육은 외부의 힘으로 동화시키기보다 학습으로 개성과 영혼, 생명력이 자라도록 도와서, 개성 있는 다른 사람을 돌보고 배려하면서 영혼이 있는 인간적인 평화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 교육은 돈과 물건보다 생명과 유대, 서로 울림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동화를 주도하고 지시하는 일은 교육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 과거 일본은 그 동화정책으로 식민지 한국만 아니라 일본 국민에도 큰 피해를 끼쳤다, 더욱이 한국에서는 통치민의 정신까지 동화시키려고 한 점에서 죄질이 나쁜 식민정책을 폈다. 종전 후의 일본은 개성 교육을 한때 추진하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또 국가에서 탄압하고 경제성장의 맹신에 사로잡혀 교육의 본질에서 떠났다, 모든 사람이 자기 개성에 맞는 학습을 받을 권리가 있는데 국가 권력이나 시장경제가 자기 이익을 위하여 일방적, 조직적으로 동화 복종시켜서 일본 교육을 복합골절複合骨折을 시키고 사회는 산산조각이 났다. 돈과 물건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과 생명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수단과 목적을 뒤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교육을 통하여 가르쳐야 한다고 차근차근 설명하였습니다. 생애에 걸친 탐구와 실천을 바탕으로 깊은 이야기를 쉬운 말로 하는 ‘심입이어深入易語’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은 ‘온 세계를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가장 작은 사람에 한 것은 내게 한 것이다.’라고 하여 온 세계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작은 사람의 인격을 하나님의 수준까지 격상시키는 성서의 사상과도 맞는 말입니다. 인권의 존중은 다른 사람의 인권 존중의 근거이므로 더불어 사는 공생사회의 논리입니다. 그것은 어느 나라 교육법이나 대전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교육의 기본에 돌아가, 돈과 경쟁의 가치에서 인간과 공생의 가치로 중심을 이동시켜, 학교와 접근성이 높은 마을에서 공생 사회를 만들어가는 움직임에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의 복합 골절
일본 교육의 복합골절처럼 한국에서도 식민지 교육으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개인 이야기지만 ‘국민학교’시절 교무실 입구에는 ‘성전완수 귀축미영鬼畜米英(미국과 영국은 귀신과 짐승이다)’이라는 현판이나, 교실 앞쪽에 일장기日章旗(일본 국기)와 천황이 사는 황궁 사진이 걸려 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학생에게도 황국신민 서서皇國臣民 誓詞(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와 백성의 맹세)를 외게 하였고 ‘젊은 피가 끓는 예과련予科練(예과 연습생, 해군 소년항공병)의, 일곱 단추에는 벚꽃이 빛난다.’, ‘천황이 하사하신 담배를 받아들고서, 내일은 죽으리라, 작정한 밤엔...’, ‘이겼다, 일본 결단코 이겼다. 미국, 영국 이제는 격멸이다.’, ‘아버지여, 당신은 강하셨어요. 철모도 타들어 가는 염천에 적들의 시신과 함께 누우며...’ 등 군가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다가 나이가 차면 국가의 명령으로 군대에 나가 총칼을 들고 국가와 정의의 이름으로 살인을 강요받았을 것입니다.
오다 선생이 지적한대로 일본 국민이 받은 군국주의 동화 교육에 한국 국민은 혼이 빼앗긴 노예의 굴욕과 고통이 추가된 식민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홍성에는 식민통치 기간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라는 독립운동가면서 불교 승려 시인이 있었는데, 그가 쓴 시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 꺼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이유를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자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분격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님의 沈默」韓龍雲 1927 滙東書館)
‘당신’이란 시인이 구원을 발견한 초월자로 생각되지만, 그가 이 시를 쓴 것은 식민지 초기지만 이미 백성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집이 없어 해외로 떠돌고 민권이 짓밟히는 절망 상태였습니다. 식민지 통치는 진전하여 이름과 말을 빼앗고 나중에는 혼에 해당하는 역사와 문화까지 동화교육으로 빼앗아갔습니다. 그런 사정은 전쟁이 끝난 것을 일본은 종전이라 하고 한국은 해방이라고 부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거국적으로 해방의 감격 가운데 식민지 교육을 제대로 청산, 반성 못한 체 분단의 냉혹한 현실이 엄습하였습니다. 동아시아 현대의 역사에서 제정신을 잃고 미친 시대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동양 침략과 15년 전쟁에 이어, 한국은 동족끼리 골육상잔骨肉相殘(가까운 혈족끼리 서로 해치고 죽임)한 한국전쟁과 뒤따른 군사문화, 중국의 문화혁명이 그것입니다. 그 뒤 성장경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교육현장을 덮은 것은 일본과 상황이 같습니다. 시장경제나 군사문화가 파생시킨 재벌중심경제체제, 경제 지상주의, 권위주의, 군사대결주의, 치열한 경쟁주의, 지역주의, 사회 격차, 환경파괴, 색깔론 등은 그 자체도 그렇지만 교육 현장에 끼친 ‘동화’의 영향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먼 원인으로 유교 이데올로기의 역기능인 수도권 집중, 노동경시, 소수의 지도자급 입신출세 사상도 이런 상황에 겹쳐있습니다.
한국은 사중四重의 복합골절을 겪은 것입니다. 한국전쟁과 그에 뒤따른 군사문화는 식민지 통치에서 선이 이어져 있지만, 민족끼리 미워하고 전쟁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동족의 책임이고 죄악이었으며, 우리 몸의 상처이므로 치료는 교육을 비롯한 우리 자생력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돈과 권력의 논리가 교육을 어지럽혔듯이 한국 사회도 교육 왜곡의 피해가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친구들을 배제하는 입시경쟁에 날이 지고 새며 지치고 자살률이 높습니다. 한국 교육은 교육의 본질에 비추어 이런 상황을 개선할 에너지가 나올 만큼 자체 반성을 하고 있을까요? 한국의 교육 현실에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 깊이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
오다 선생은 더불어 사는 교육을 일관해서 주장하면서, 특히 전후 일본 사회에서 이에나가재판家永裁判으로 불리는, 사회과 일본역사 교과서 검정을 둘러싸고 국가주의를 내세워 평화, 민주주의 정신의 꼭지를 따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대하여, 국민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성임을 고발하고 증언하면서 법정에서 30년 분투하신 결과 승소를 이끌어내셨습니다. 선생의 주장과 실천이 일치하는 양심적 교육자의 모습을 존경합니다. 지금도 평화와 민주정신에 어긋나는 세력은 아시아 상공을 구름처럼 덮고 집요하게 교권을 장악하려 하고 있습니다. 강연을 들으면서 교육이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아시아 교육자들이 여러 부문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과제도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여러 지역에는 도깨비 방망이 민화가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소년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팔아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를 해서 지게에 받쳐놓고 보니까 둘레의 깨금나무에 열매가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열매를 모으다 보니, 날이 저물었습니다. 어슴푸레 먼 곳을 보니 숲 속에 기와집 추녀 끝이 보였습니다. 더듬더듬 찾아가보니, 이끼 낀 옛집이라, 소년은 마루 밑에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잠결에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도깨비들이 모여 “먹을 것 나와라, 뚝딱” 하면서, 방망이를 휘둘러 탁자를 치니까 곧 먹을 것이 상 위에 수북이 쌓여서 모두 먹고 마시면서 떠들썩하였습니다. 소년도 배가 고파서 호주머니에서 깨금을 하나 꺼내어 오도독 깨물었습니다. 도깨비들은 깜짝 놀라 먹을 것과 도깨비 방망이를 그대로 두고 허둥지둥 어둠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소년은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그 방망이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웃집 욕심쟁이가 그 소문을 듣고 깨금을 나무에서 쥐어뜯어 그 집에 숨어들었습니다. 오도독 하고 깨물었더니 도깨비들은 ‘오라 네놈이 방망이를 훔친 놈이로구나.’ 하고 두들겨 팼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민화에서는 소년이 도깨비 방망이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행복하게 산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했을까요? 도깨비 방망이는 마음먹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쓰여, 축복도 되고 재앙도 되지 않았을까요? 소년은 시간이 지니면서 게으르게 되어, 자기는 놀면서 마을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그러다 보면 마을 사람과 일체감이 없어지면서, 이상한 분위기가 되어, 방망이를 빼앗으려, 또는 빼앗기지 않으려 형제간에, 나아가 온 마을에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방망이를 차지한 사람은 그걸 지키려고 힘센 종을 두고 벼슬아치와 결탁할 수도 있겠지요. 결국, 방망이를 마을 공동사회에서 관리하거나 소년을 쫓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이 도깨비 방망이를 가져도 문제지만 거대한 국가 권력과 돈과 배움이 있는 사람들이 똘똘 뭉쳐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생깁니다. 진실이 아닌 거짓말을 하고 사회적 약자를 짓누르고 환경을 망가뜨리면서 나라 사이에 긴장을 일으키고 전쟁도 불사합니다.
물론 인류의 보편적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단위국가가 자기 나라와 다른 나라에 대하여 맡겨진 위대한 역할과 사명이 있습니다. 일찍이 동경대학의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忠雄(1893-1961) 교수는 1937년 노구교 사건盧溝橋事件(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양국군대의 충돌사건) 직후 국가의 보편적 목표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지키는 정의고, 국제간에는 평화라고 하고, 국가가 그 목표를 위반했을 때는 국민 중에서 비판이 나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가 권력은 국내 정의와 세계 평화의 일부로 그 기능이 작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평화 속에는 인권과 환경, 생명 존중도 들어있습니다. 보편 원칙에 어긋나는 편협한 국가주의는 배타주의에 갇혀, 교육을 장악하고 언론을 지배하여 인권을 억누르고 외부의 위협에 국민의 눈을 돌리게 합니다. 건전한 시민사회가 시민운동이나 민주적인 투표로 그 독주를 견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가 그 목표에 충실할 수 있도록 양심적인 시민이나 바른 언론, 시민단체, 자주적인 교육, 국가 간 시민사회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오다 선생의 메시지로 받아들였습니다.
한일 두 나라 교육자의 연대
예전에는 충효사상이라 하여 정부나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을 애국과 동일시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 왕정은 사라졌고 모든 권력이 모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민주주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국이 역사적으로 그렇게 되었지만 지나치리만큼 국가 모델로 삼는 미국에서 정작 배워야 할 것은 건국 초기 독립선언서(1776)에 나타난 이런 주권재민의 사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자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하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셨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로 믿는다. 만약 어떤 정부가 모든 사람의 이 권리를 파괴하면 그런 정부를 변경, 파괴해서 모든 사람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이룰 새 정부를 세우는 것이 국민의 권리고 진리다.
이 선언에 있는 대로, 정부는 모든 사람(all men, 국민 nationals가 아님)의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를 진리로 알고 그를 실현하기 위해서 있지, 특정한 정부의 목적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있지 않다는 인권 사상이 민주주의 정신의 핵심입니다.
여담인지 모르나, 한국에서도 요즘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의 교육을 많이 가서 시찰을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학생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이웃의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도록 모든 교사와 교육시설과 사회가 뒷받침하여, 교육과 사회가 건강한 데 주목하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에 그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다 선생은 농업에 무기농업(보통 비료 농약을 치는 화학 농업이라 부름)과 유기농업이 있듯이, 교육에도 무기교육과 유기교육이 있다고 재미난 표현을 했습니다. 유기교육은 ‘생명을 중시하고 서로의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돈과 물건에 매이지 않는 사회’라고 했습니다. 그런 원리로 사회를 만드는 교육이 유기교육이라고 한 것입니다.
풀무학교는 ‘더불어 사는 평민’을 학교의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자연을 포함해 모든 생명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관계가 교육의 내용이고 살아가는 생활양식이고 그것이 학교와 관계를 갖는 마을 만들기의 바탕이고 중심이고 목표라는 뜻입니다. 학교 교육 정신이 겉으로 나타난 마을 만들기는 학교의 생활권인 농촌지역에서 소농의 협력으로 유기순환농업을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마을 만들기는 농업이나 경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 산업, 복지, 문화, 의료, 생활정치가 서로 겹치고 녹아들어 생명과 평화 실현의 수단이 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가 마을과 나라를 넘어 아시아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평민’이란 피압박자면서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나, 정치사회적으로 자유의 확대과정에서 압박자에 대한 세력으로 이름 붙인 시민 대신 교양과 실제적 능력이 있고 정신적으로 자각한 민중, 시민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풀무학교는 한국에서는 대안학교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제도학교에서도 교육을 개선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교사, 행정가, 학자들이 있습니다. 대안학교도 제도학교도 자기 역할을 하면서 교육의 본질, 기본에 돌아가도록 협력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홍동밝맑도서관은 주민이 세운, 지역과 학교가 공유하는 도서관이지만, 지역을 동심원으로 평화스러운 동아시아 시대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으로 <평화 사상과 정신을 기르는 홍동밝맑도서관>이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아시아의 평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간판 아래 <6·15 남북평화공동선언과 평화헌법 9조 지지구역>이라는 표찰을 붙였습니다. 그 도서관 개관식 전야에 오다 선생이 오셔서 의미 있는 강연을 해주셨습니다.
선생은 “우리들은 실제로는 약하고, 불완전하며, 죄가 깊은 생물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생을 이렇게 큰 목표와 연결하여 서로 격려하는 것은 매우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위 책 162쪽)이라고 저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선생이 애용하시는 ‘마주 울림’, ‘유대’, ‘관계’는 ‘돈 사회’, ‘인공사회’에서 ‘관계의 세계’ 즉 ‘생명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거기 「희미한 빛을 향해」의 목표가 있다고 배찰됩니다. 이런 선생의 사상은, 성서에서 예수가 “나는 세상의 빛이고 생명이다”라고 한, 종교의 경계에 들어섰다는 것이 내 나름대로의 소감입니다.
다음날 30분의 여유를 남기고, 오다 선생은 숙소가 있는 홍성읍에서 8킬로미터 떨어진 홍동까지 택시로 오셔서 마지막 작별을 하였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사회 현실을 만든 교육을 반성하고 어디까지나 학생의 유일한 인권을 존중하고, 그 인권의 존중 위에서 더불어 사는 평화스러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두 나라 교육자의 연대를 말 없는 가운데 확인하면서 선생과 나는 굳게 포옹하였습니다. 선생은 일본의 대학자시고 나는 한국의 작은 시골교사지만, 서로의 뜻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울림이 전해진 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