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B가 연주하는 슈만의 음악으로 ‘프루스트 헤어’의 아침은 시작된다. 그건 남편이 즐겨듣는 음악 중의 하나다. 사실 남편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다. 가정환경 탓에 재주 있는 그의 손은 피아노에서 타인들의 머리칼로 그 장소를 옮겼다. 그는 매일 남들의 머리칼 위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남편의 손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머리를 자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미미한 슬픔을 느낀다. 이루지 못한 꿈은 이루지 못해서 도리어 행복할 수도 있을까? 타인의 연주를 감상하는 일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유독 B가 연주하는 슈만의 피아노곡을 자주 듣는 까닭은 그가 자신의 어릴 적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B의 연주를 남편은 빠짐없이 들었다. 그리고는 남편이 들었던 연주마다 왜 그가 단 한 번도 관객의 앵콜 요청을 받아주지 않는 건지 의아해했다. 세상의 많은 저명한 연주자들은 관객의 호응에 앵콜 연주를 하는 게 일반화되어 있어서 남편은 더욱 궁금해졌다. 남편은 외딴 섬의 주민들을 위해 무상으로 연주를 해주기도 하는 B씨의 흔적을 따라 섬에 가서 연주를 듣기도 했다. 바다 앞에서 그의 연주를 듣는데 남편은 눈물이 났다고 했다. 섬에서도 그는 주민들의 앵콜을 받아주지 않고 냉정하게 일어나서 사라졌다고 했다. 팬들에게 앵콜 연주는 작은 선물이다. 선물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다큐 프로그램에서 보니, 캐나다 이누이트족 인디언들에게는 더 큰 선물을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남들이 이길 수 없는 제일 큰 선물을 하는 사람이 추장으로 추대된다. 이럴 때 공동체란 선물을 통해 결합된 사이이다. 추장으로 추대되는 능력은 울림이 있는 말을 잘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선물을 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상대에게 준 선물을 거절한다는 건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주었다는 생각과 받았다는 생각 없이 주고받는 선물, 상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선물이 되는 사람, 인디언의 선물은 내게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생각나게 한다. 남편에게 B씨의 연주는 그냥 그가 세상에 존재함으로 선물이 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남편은 그가 앵콜 연주를 해주지 않는 단호함도 다른 종류의 선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체념을 가르치는 선물, 혹은 과식을 하지 말라는 선물, 사실 어디선가 적당한 곳에서 맺고 끊는 기술은 살아가면서 필요한 지혜이기도 하다. 그렇게 치면 세상에 선물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사장 언니의 애인이었던 지금의 남편과 마음이 맞아 그녀를 배신한 뒤, 그녀는 돈이 아주 많은, 인색하지도 않고 마음씨가 아주 착한 사람을 만나 귀부인이 되었다. 나와 남편이 그녀에게 제대로 선물을 한 셈이다. 사장 언니와 나는 한 달에 한 번쯤 시내 최고의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나 수다도 떨고 비싼 와인도 한 병 나누어 마신다. 어쩌면 그녀는 남편 말고는 내 가장 친한 벗이다. 세상의 모든 관계들이 이런 식으로 풀린다면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일 것이다. 부모 덕도 형제 덕도 없었던 나는 타인 덕이 많은 편이다. 누가 ‘타인은 지옥’이라 했던가? 검색을 해보니 그렇게 말한 건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다. 하지만 내게 타인은 기댈 언덕이었다. 넉넉한 어깨를 기대라고 내주던 고마운 타인들을 떠올린다.
남편과 나는 가끔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나 슈만의 피아노곡들을 들으며 사랑을 나눈다. 마음을 비우고 음악을 자세히 들으며 몸의 감각을 살려내는 일은 어쩌면 명상에 가까운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남편은 잘 맞는 상대다. 사람에 따라서는 섹스조차 사실은 상당히 정신적인 운동이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뜨거운 것과는 사뭇 다른 은은한 열정의 상태를 백 살까지 유지할 수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미용실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프루스트 헤어, 우리 미용실의 시계는 멈춘 채 늘 11시를 가리킨다. 남편도 나도 정지한 시간을 좋아한다. 미친 듯이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를 잠시 잊어버리고 정지한 시계를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남편에게 안길 때, 그는 미친 듯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정지한 시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늘 열한시로 맞춰져 있는 정지한 시계, 손님들도 정지한 시간에 익숙해져 그러려니 한다.
“머리할 때만이라도 시간을 잊으세요.”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말한다. 그들은 알아들었다는 듯 정지한 시곗바늘을 흘낏 쳐다보고 만다. 나는 염색하는 걸 좋아한다. 손님의 머리칼에 염색약을 천천히 바르고 그 머리칼의 색깔들이 변하는 걸 보는 건 마술처럼 유쾌한 일이다. 검은색, 색, 빨간색, 보라색으로 변하는 머리칼들을 바라보며 나는 초등학교 시절의 미술 시간을 생각한다. 집에서 물감 사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해 미술 시간마다 친구들의 물감을 빌려 썼다. 가난한 내 물감은 나도 모르게 근사한 그림으로 변했고, 아이들은 내게 대신 그려달라고 줄을 서기 일쑤였다. 중학교 시절 어느 미술 수업시간, 그날은 자화상을 그리는 날이었다. 나는 ‘자화상, 빨강머리 앤’이라는 제목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 시절 『빨강머리 앤』을 읽으며, 딱 나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똑같이 그려달라고 조르는 반 아이들에게 각자 다른 색 머리를 그려주었다. 그 그림들은 선생님들과 전교생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공동작인 듯 다 같이 우리가 졸업한 이후에도 학교 복도 정중앙에 오래도록 걸려있었다.
손님들의 머리염색을 할 때마다 중학교 시절의 미술 시간처럼, 사람마다 다 다르게 갖가지 색깔로 물들이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자신을 ‘빨강머리 앤’이라고 불러 달라는 나이 든 소녀 단골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녀는 늘 빨갛게 염색을 한다. 오래전 지하철역의 긴 계단을 올라가면서 멀찌감치 앞서서 올라가는 빨간 머리를 한 그녀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늦은 시간에 꿈처럼 스친 그녀와 지금 거울 앞에 앉은 그녀가 같은 사람이 틀림없다는 나의 확신은 아마 맞을 것이다. 내게는 살짝 미래를 예언하는 작은 능력이 있다.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유명한 사주명리학자였고, 외가 쪽으로는 먼 조상 중에 유명한 박수무당도 있다고 들었다. 꿈이 기막히게 맞는다든지 살짝 타인의 앞날을 엿보는 정도의 능력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칼 위에서 춤을 추지 않으면 온몸이 아픈 사람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저 평범하고 즐겁게 남편이랑 오손도손 살고 싶다. 남편과 내가 사장 언니를 배신했을 때도 나는 그녀가 착하고 돈 많은 제 짝을 만날 거라는 예언을 했다. 예언은 적중했고, 그 뒤 사장 언니는 뭐가 먹고 싶은지 뭐가 입고 싶은지 그게 뭐라도 다 사주는 나의 영원한 팬이 되었다. 다시 단골손님 ‘빨강머리 앤’ 이야기로 돌아가, 오래전 내 앞에서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던 짧은 단발에 빨간 염색을 한 여자의 뒷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든지 나는 그녀가 내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쫓아갔다. 잠시 사장 언니의 전화를 받는 사이 그녀는 거짓말처럼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나의 전생이거나 미래 생을 보는 것 같은 특별한 기분이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그녀의 뒤를 계속 밟는 꿈을 꾸었다. 계단 대신 에스컬레이터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나는 그녀를 놓칠세라 정신없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갔다. 그 에스컬레이터는 계속 올라만 갈 뿐 내려가는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확 뒤를 돌아보는데 그 모습은 바로 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빨강머리 앤’, 그녀가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조금 자란 단발머리를 더 짧게 자르고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듬성듬성 드러나는 검은 머리칼을 빈칸을 채우듯 빨갛게 염색을 할 때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다. 조용한 동네라 나이 든 분들이 거의 평범한 흑갈색 머리염색을 하는지라, 나는 가끔 설레는 마음으로 미술 시간을 기다리듯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에게 권유하고 싶다. 다음엔 노랑, 다음엔 초록, 또 그다음엔 보라색으로 머리염색을 하면 어떻겠냐고. 마치 내 중학교 시절의 자화상처럼, 빨갛게 노랗게 초록으로 보라로 세상을 ‘빨강머리 앤’의 아바타들로 빼곡하게 채우는 거다. 그녀는 마치 내 마음을 들은 듯 “이번엔 밝은 노란 색으로 염색을 한 번 해볼까?” 하고 말한다. ‘프루스트 헤어’의 시간은 여전히 열한시다. 오전인지 오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