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안부 전합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끄집어내어 문장으로 만드는 일은 스웨터를 뜨거나 수를 놓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술을 하는 일보다 편지를 쓰는 일이 더 어려운 내가 마치 날아오는 탁구공을 받아치듯 당신의 편지에 답장을 해온 게 신기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 튀는 탁구공이 때로는 살아있다는 느낌으로, 한 다발 꽃송이처럼 안겨 들어왔던 날들의 기억은 내게 선물이었습니다.
매일이 똑같은 그 날 중 어느 날, IS가 되어 떠난 남자친구를 찾으러 시리아의 전쟁터로 가서 막상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친구를 찾는데 동행해준 미군과 사랑에 빠졌다는 한국인 간호사 아가씨, 당신도 잘 아는 그녀가 내 방문을 두드리더군요. 나는 인공지능이 그린 초상화가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다는 당신의 글을 읽은 지 얼마 안 되어, 예상보다 사십 배 높은 한국 돈 사억 원에 경매에서 낙찰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있는 중이었어요. 난 그녀가 한동안 소식이 없어 아마 연인과 미국으로 간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그녀는 늘 그렇듯 소년같이 짧은 머리에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안녕하시냐고 인사했지만, 어딘가 무거운 슬픔의 긴 그림자를 끌고 방안으로 들어온 듯했어요. 갑자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사랑하는 연인이 죽었다 하더군요. 전쟁터에서는 흔한 일이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죽었다 생각하던 전 연인이 살아 돌아와 지금의 연인을 총으로 쏴서 한 방에 날려버렸다는군요. 이런 식의 표현이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마치 남의 일처럼 가볍게 말했어요. 전 연인으로부터 도망쳐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인사라도 하러 왔다는 그녀의 얼굴엔 슬픈 결의 같은 게 담겨있었어요. 그녀의 사랑의 긴 여정은 어디서 끝이 날지 알 수 없는 아라비안나이트 같았어요. 당신의 전화번호를 묻더군요. 순간 한 번도 당신에게 전화를 건 적이 없다는 생각이 났어요. 그 흔한 공짜 전화 한 통이면 금세 도착하는 목소리, 나는 꿈속에서도 당신의 목소리를 그리워했어요. 약간은 낮고 맑고 청량한 목소리, 여운이 길게 남는 목소리, 엉뚱하게도 당신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나는 엄청난 사연이 담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어요. 퇴각하는 IS로부터 도망쳐 숨어 있다가 그들의 사연을 들은 전 남자친구는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내 단방에 연적을 죽이고 쓰러져 뒹굴며 오열했답니다. 왜 여기까지 와서 자길 괴롭히느냐고. 같이 죽자고. 총을 들고 따라오는 그를 피해 얼마나 먼 곳까지 도망을 갔는지 모른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세상엔 사랑 같은 거 없다 하더군요.
사랑이 귀여운 마술일 때, 사랑은 아름다워요. 며칠 전에 누가 보내준 영상 중에 키가 182cm에 83kg의 남자가 아주 작은 상자 안에 몸을 구부리고 들어가 앉아있는 마술을 보았어요. 집중과 명상에 의한 고난도 마술이라는데 그보다는 극한의 상황을 극복하는 묘기였어요. 그쯤 고난도의 사랑에 이르면, 사랑은 자폭하기 일쑤죠. 사랑은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엉뚱하게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티븐 호킹의 “신은 없다. 외계 생물은 있다.”는 말이 떠올랐어요. 그건 내게 신은 죽었다는 말보다 훨씬 실감 나게 와 닿는 말이었어요. 그 말은 마치 내게 “사랑은 외계생물이다. 고로 사랑은 있다.” 이렇게 번역되어 들려왔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부러 태연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어요. 어쩌면 이곳으로 그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하루바삐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며 동료 여의사의 집에 며칠 기거하게끔 알선해 주겠다 했죠.
그녀가 돌아간 뒤 나는 한동안 당신이 목소리를 상상했어요. 아무리 상상해도 당신의 목소리는 내 귀의 입구까지 오지 못하고 맴돌다가 조금 전에 들은 그녀의 목소리로 접어들곤 했어요. “사랑 같은 거 없어요.” 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27세 그 좋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사랑은 지는 게임」으로 들려왔어요. “사랑은 지는 게임, 오- 우리는 무슨 난장판을 만든 거야? 그리고 이제는 끝이야, 사랑은 지는 게임, 사랑은 잃을 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폭발하고 말지. 나는 맹목적으로 싸웠으나 사랑은 체념하는 운명, 승산 없는 배당률에 걸지. 그리고 신들은 웃었어. 그리고 이제는 끝이야. 사랑은 지는 게임.” 문득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목소리와 그녀의 목소리와 당신의 목소리가 하나로 들리면서 사랑은 지는 게임도 아니고 사랑은 두려워서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게임이라고, 그렇게 비겁한 목소리가 당신에게 들킬까 봐 아마 한 번도 전화를 해본 적이 없는 거라고 혼잣말을 했어요. 그러면서 “당신, 당신이 없다면, 난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하고 노래한, 그토록 아름다운 젊은 날에 세상을 등진 휘트니 휴스턴의 목소리도 들려왔어요. 엉뚱하게도 마릴린 몬로가 마치 파도에 휩쓸려가는 작은 배의 난간을 붙들 듯 바람에 나부끼는 짧은 치마를 간신히 붙들고 있던 그 유명한 사진도 떠올랐어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의 치유 불가능한 고독이란 태어나기 이전의 선천성 고독과 후천적인 습관성 고독의 결합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다 갖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 오래된 습관성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혼의 상태, 점점 더 커지는 고독의 무게와 깊이, 난 그렇지 않은 당신이 좋아요.
영화 『바그다드 카페』 속의 뚱뚱한 여주인공이 좋아요. 자신의 고독 속으로 깊이 침잠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의 손끝이 세상을 향한 행복의 마술지팡이가 되어줄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존재, 그렇게 환한 햇살 같은 사람, 그럼에도 그 햇살의 균형을 간직한 그림자도 같이 지닌 사람, 당신을 지금이라도 만나러 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고독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또 무서운 것인가? 삶을 송두리째 불태우다 간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마이클 잭슨, 프레디 머큐리, 키이츠 해링, 쟝 미셸 바스키아, 체 게바라, 스티븐 호킹… 그중에서도 예외적 인물 스티븐 호킹을 떠올립니다. 다른 천재들이 타고난 천재성을 짧은 시간 안에 불사르다 홀연히 사라졌다면, 호킹의 경우는 21세에 루게릭병을 진단받고 2년 밖에 못 산다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후 병과 투쟁하며 20세기와 21세기를 거처 물리학 분야의 아이콘으로 남았습니다.
“신은 없다. 외계 생물은 있다.” 그 말을 곱씹으며 갑자기 다시 한번 외계 생물이라는 단어를 사랑이라는 말로 바꿔봅니다. 내 맘대로 생각하기를 서로의 생각을 간섭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소통 속에 꿈꾸는 ‘마음 어루만지기’, 그게 사랑이든 우정이든 그런 종류의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때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언어의 폭력, 간섭의 폭력, 너는 왜 나와 다른가에 대한 의식과 무의식의 폭력, 무관심의 폭력 등에 관해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폭력인 것 같습니다.
21살에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호킹은 자신의 삶에 대한 신의 폭력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당시 내 꿈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내 상태에 대한 진단이 내려지기까지 나는 삶에 대해 지겨워하고 있었다. 해야 할 가치 있는 어떤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내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내가 처형당하는 꿈을 꿨다. 갑자기 나는 내 사형집행이 연기된다면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으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과거보다 지금의 삶을 더 즐기게 되었다.” 실제로 그의 병은 예상과는 달리 아주 서서히 진행되었죠. 사형집행이 계속 연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까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 원시적인 형태의 외계인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며 지적 생명체의 존재 또한 가능하다. 내 생애 최고의 성공은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거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 늘 용기와 울림을 줍니다, 어쩌면 그 자신이 바로 지적인 우주 생물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문득 당신도 나도 지적인 외계 생물체라서, 이렇게 인간들끼리는 불가능한 우정이든 사랑이든 그런 교신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아닌지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면서 문득 내가 여기 왜 있을까? 너무 오래 있었던 건 아닐까?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그곳이 어떤 외계이든 좋을 것이다. 아니 이곳보다 낯선 외계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문득 젊은 날 의료봉사를 하러 갔던 먼 나라 몽골을 떠올립니다. 그 넓은 초원에서 가축을 길러 잡아먹는 몽골의 고비 유목민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은 고통스럽지 않게 양의 숨통을 끊는 방법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동물 실험을 할 때 배워야만 할 덕목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너를 죽이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살리는 거란다.” 그런,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보내는 메시지는 의사로서의 내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여기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은 당신의 친구, 이제는 나의 친구이기도 한 한국인 간호사 아가씨의 삶 속에 나도 모르게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무거운 감정들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보는 저녁입니다. 당신과 마주 앉아 이런 얘기들을 나누며 질 좋은 아프가니스탄 와인을 마시는 그런 시간을 상상해보는, 세상 어느 곳에나 찾아드는 저녁노을이 마치 지적이고 따뜻한 어느 외계 생물이 보내는 사랑의 신호처럼 느껴지는 평화로운 저녁입니다. 이곳은 지금 ‘노을’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께 눈물이 날 것 같은 이곳의 노을 한 조각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