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남지 않은 북극의 얼음에 달라붙어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북극곰을 보여주면서, 북극곰 살리는 운동에 돈을 보내라는 광고를 보신 적이 있으시죠? 혹은 멸종 호랑이를 살리는 데 돈을 내라든지요. 불쌍한 난민 소녀를 구하자는 자선단체 광고보다 북극곰과 호랑이를 살리자는 광고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도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거예요. 동물뿐 아니라, 지구 온난화가 이런 식으로 계속되면 살던 곳을 버리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에 오르게 되는 난민 인구가 2050년에는 이십억에 이르게 된다 하네요. 내전 때문에 난민이 되는 줄 만 알았는데, 이상 기후변화로 난민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나 봅니다. 난민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가깝게 느껴질 줄은 몰랐네요. 온통 화려한 색깔의 향연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라스베이거스에서 한참을 지내다 보니 자신이 관광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관광객과 난민은 정반대되는 단어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을 관광객으로 사는 사람과 난민으로 사는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다를까? 세상의 모든 것은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의 수 없는 단계의 온도를 지니죠. 마치 흑과 백 사이의 수많은 색깔이 존재하듯이. 흰색만 해도 징크 화이트, 실버 화이트, 티타니움 화이트, 플레이크 화이트, 크레미트 화이트 등등. 회색의 종류도 얼마나 다른 많은 이름들이 있는지요. 검은색도 마찬가지죠. 레드 블랙, 마르스 블랙, 아이보리 블랙, 브라운 블랙, 그린 블랙, 카본블랙 등등. 관광객과 난민 사이의 단계도, 우리들 마음의 온도도 그렇겠지요.
오늘 문득 유난히 파란 물감을 풀어헤쳐 놓은 것 같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니 살아있다는 건 색깔을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빨강, 파랑, 노랑, 연두, 보라, 초록, 흰색과 검은색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 많은 색과 색들에 둘러싸여서도 색의 소음에 괴로워하기는커녕 행복해하죠. 우울한 날일수록 순도가 높은 색깔을 칠해요. 그중에서도 노란색을요. 순도 백 프로의 완벽한 노란색, ‘카드뮴 옐로우 라이트’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색이기도 하죠. 캔버스에 하염없이 노란색을 칠하다 보면 정말 우울한 생각이 사라지곤 했답니다.
살면서 절망적인 느낌에 사로잡힐 땐, 지금 내가 난민선에서 내려 갈 곳 없는 난민이라고, 어디에 착륙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국적 없는 비행기의 조종사라고, 그런 상상을 해보기도 해요. 그보다는 모든 게 다 낫죠.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 들려와서 불행한 우리 자매는 당신의 말대로 소리 지르는 연습을 했어요. 존 레넌이 받았다는 소리를 토해냄으로써 자신 안의 우울과 슬픔을 치료하는 프라이멀 스크림 요법, 그보다 싱어송 요법이 훨씬 좋더군요.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러, 왜 다들 가수처럼 노래를 잘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친구가 보내준 약식 노래방기기를 들고 우리는 아무도 없는 사방이 툭 터진 풍경 속으로 나가 실컷 노래를 불렀답니다. 아무 노래나 실컷 부르고 나면 속이 시원해져서, 무방비의 귀에 폭격 소리처럼 들려오는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다 용서할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어쩌면 노래를 부르는 일의 시작은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었을까요? 산다는 건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산다는 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 노래를 부르는 일이 직업으로 인정받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흙바닥에 낙서를 하다가 동굴 벽에 낙서를 하다가 바위 위에 낙서를 하다가 드디어 그림을 그리는 일이 직업이 된 건 또 언제부터였을까? 작자 미상으로 남은 모든 예술작품을 사랑해요. 그에 비해 오늘의 예술은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것 같아요. 앞서가는 예술일수록 마치 마스터베이션을 하듯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만의 상처를 드러내 보이죠.
어쩌면 남의 상처에 동참하는 그림과 음악은 20세기 초로 끝난 것은 아닌지. 모든 클래식 음악회에서 아직도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음악은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슈베르트, 말러 등등 열 손가락 안쪽이죠. 미술도 마찬가지여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하는 예술로부터 이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예술로, 되돌아갈 수 없는 너무 먼 길을 지나쳐온 인류는 새로움의 이름으로 앞으로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화가라는 직업이 더 이상 필요할는지요. 이제껏 인류의 흔적으로 남은 예술품만도 너무 많은 건 아닐지. 취미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전람회를 열고 책을 발간하고 음악회를 열기도 하죠. 작자 미상의 걸작들을 볼 때마다 미안해지는 건 나뿐일까요? 예술에 대한 상행위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되겠지만, 여전히 베토벤과 쇼팽과 모차르트와 피카소와 마티스가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마지막 예술가의 이름들이 아닐까요? 이 폭염의 한낮에 당신을 향해 보내는 나의 편지는 만날 수 없어서 더 편안하고 거리가 멀어서 더 기다려지는, 작자 미상의 안부입니다. 그곳에서는 또 자살폭탄 테러로 카불 국제공항 출입 게이트에서 폭발물이 터져 14명 사망, 60명 부상이라고 뉴스에 나왔더군요. 아프가니스탄에서 올해 상반기 자살폭탄 테러로 숨진 민간인 사망자 수는 1692명으로 집계된다는 소식도 실려 있었어요. 당신이 있는 곳과 가까운 장소에서 쩍하면 일어나는 폭탄 테러는 내 꿈속에서도 수없이 일어나 늘 무사한 당신을 확인하곤 한답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거 알아요.
현실이 아닌 먼 곳에 있는 친구란 현실의 고통을 같이 느낄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위로가 되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이곳에 없는 그대가 그곳에서 나를 생각한다.” 그런 기분은 뭔가 든든한 비현실의 힘이죠. 오늘은 생텍쥐페리가 1944년 오늘 비행을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은 날이랍니다. 청소년기를 관통하며 생텍쥐페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영혼이 있을까?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화가가 되었을 거라고, 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비행사가 되었을 거라고, 아니 그 순서는 거꾸로라도 상관없다고, 상상 속의 당신, 생텍쥐페리가 속삭이네요. 오늘 당신의 비행은 순탄했나요? 문득 수술하는 일이나 비행을 하는 일이 같은 지점에서 만나지는 걸 상상합니다.
서울은 백십 년 만의 폭염이라네요. 세상에 태어나 데일 듯 뜨거운 기온의 나라들을 많이 가보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낯선 온도입니다. 사람의 체온이 다 다르듯이. 폭염의 온도가 지역마다 다를 것이어서, 그곳의 온도를 상상하기는 어렵군요. 북극의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었다 하네요. 당신이 계신 그곳은 여름에는 아주 덥고 겨울에는 아주 추운 곳이라는데, 언젠가 그곳에 가볼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사람이 날씨에 적응하는 일도 쉽지는 않네요.
날씨 좋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과 폭염과 혹한에 적응되어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성격적 변화가 자리 잡을까요? 요즘 한국의 제주도에도 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답니다. 겨울이 따뜻한 날씨 좋은 제주도가 난민들의 정착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본 일이죠. 그 가엾은 사람들을 향해 난민 반대 운동을 벌이는 야박한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를 대신해 위악을 대리해주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스치고 가네요. 오래전 독일의 공항에서 느꼈던 외국인을 향한 차가운 시선이 기억납니다. 그 삭막한 표정들에 싸한 추위를 느꼈던 기억도 생생하네요. 난민이 되어보는 상상 속에 자주 빠져봅니다. 그보다 우울한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언제 미국으로 돌아가나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어쩌면 공상과학 영화 속처럼 지구라는 고향에 살고 있는 우리가 다른 별을 향해 난민이 되어 떠나야 한다면, 우리는 어디쯤에서 만나 같이 갈 수도 있을 테지요. 우리가 작은 불씨 같은 희망을 품고 도착할 별의 이름은 행복이라거나 즐거움이라거나 약속이라거나 완성이라거나 사랑 같은, 세상의 모든 제목 중의 하나로 붙입시다. 그곳에서 난민인 우리를 받아준다면, 한 십 년 머물러도 좋으련만. 이 폭염의 더위에 떠오른 엉뚱한 생각입니다.
나의 친구여, 이 삶이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모를 난민들을 가득 태운 배라 할지라도 노를 저어 가보자구요. 오늘도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고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실의에 빠져 강물에 투신하지만, 그 모든 세상의 풍경들이 다 지구라는 난민 선에 타고 있는 우리들 생존의 풍경이겠지요. 살아남아라. 세상의 모든 소음이 너의 귀를 침식해 결국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지라도, 우울에 지지 말라. 살아남아라.
누군가 세상의 스피커에 그런 소리들을 흘려보내는 것도 같습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돌아온 이후 내 귀에 더 이상 세상의 모든 소음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라스베이거스에 두고 온 언니는 여전히 소음과 싸우는 중이랍니다. 노래를 부르면서요. 제가 좋아하는 한국의 오래된 가요 중 「종이배」라는 노래가 있어요. “파란 색종이 접어 종이배 만들어 사랑하는 님에게 내 마음 띄어볼까. 파란 색종이 접어 종이배 만들어 오지 않는 님에게 그리움 전해볼까.”
뜨거운 폭염의 밤에 당신께 종이배 한 척 띄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