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밥과 선이가 인천 공항에 착륙했을 때, 선이를 똑 닮은 서른 남짓한 여자가 공항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마도 선이의 동생인 듯 했다. 선이는 바오밥을 동생에게 소개하며 마치 어릴 적 죽은 오빠를 똑 닮았다고 말했다. 선이의 동생은 그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환한 웃음이 바오밥에게 먼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의 웃음, 여동생의 웃음, 양어머니의 웃음, 엘리노어의 웃음, 아프리카 쉬리의 아이들의 웃음, 그리고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자기 자신의 웃음. 바오밥은 오랜만에 환한 얼굴로 함빡 웃었다.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사는 선이의 집은 공항에서 멀지않은 인천에 있었다. 그 집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라는 선이 자매와 함께 집으로 가는 바오밥의 가슴은 내내 두근거렸다. 마치 친어머니를 찾아 먼 길을 돌아온 방탕아의 기분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 동안 뭐 그리 잘못한 일이 많았던 걸까? 세 사람이 인천 시내의 작은 단독주택에 도착했을 때, 선이 동생이 초인종을 누르자 곱게 늙은 키 작은 여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바오밥은 하마터면 ‘어머니’ 하며 그녀를 껴안을 뻔 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 넷은 그날 저녁 가족처럼 화목했다. 다음 날 아침 선이의 어머니는 바오밥을 위해 진수성찬을 차려주었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맛있는 밥상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아마 바오밥의 돌잔치 밥상이 그랬을까? 가난했던 바오밥의 집에서 그런 밥상을 차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꿈속에서 받아본 밥상 같았다. 바오밥은 가시를 떼어내고 생선의 살을 골라 밥 위에 얹어주는 선이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만 봐도 배가 불렀다. 아침상을 무른 뒤 그는 선이 세 모녀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설핏 잠이 들었다. 시차 탓이기도 했지만 온 세상을 돌아온지라 너무 피곤했다. 피곤하기에는 너무 절실한 만남인지라 세 모녀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서 사무엘의 믿기지 않는 죽음은 아직도 증명된 사실이 아닌 듯 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정한 사위 사무엘 대신 딸과 동행한 바오밥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바오밥은 반수면 상태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어릴 적 살던 집이 꿈속에 나타났다. 할머니랑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그 외에도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이 형제였는지 사촌들이었는지 외삼촌이나 이모들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그저 한 방에 오글오글 모여 이불을 끌어당기느라 여념이 없던 추운 겨울이 떠올랐다. 그 옛날 한국의 겨울은 추웠다. 코흘리개들이 흘리는 콧물이 고드름처럼 얼어붙을 정도였다. 바오밥은 그렇게 기억했다. 하얀 얼굴에 고운 자태를 지닌 어머니는 늘 기침을 했다. 어쩌면 폐결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로도 바오밥은 겨울이면 어머니가 각혈을 하던 기억이 꿈처럼 스쳐지나가곤 했다.
꿈속에서 어머니가 각혈을 한다. 그 선홍색 피는 참 고운 색깔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피흘리다 죽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할머니는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힘들어서 바오밥을 입양 단체에 보냈을지 모른다. 마치 “잘 가라. 잘 가라.” 하며 물 위에 띄어 보내는 소원을 담은 종이배처럼. 바오밥은 언제나 모든 걸 이해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할머니, 그냥 하얀 백합 같은 얼굴로 기억되는 어머니, 꼬물대던 아이들 중에서 선이를 닮은 걸로 기억되는 여동생, 그들을 꿈속에서라도 찾아보고 싶었다. 어쩌면 꿈이 아닐지도 몰랐다. 바오밥은 한국 텔레비전에 가족을 찾으러 출연했다. 어릴 적 헤어진 가족을 찾는 프로그램이었다. 바오밥의 여동생이라고 말하는 젊은 여인이 방청객 속에 나와 있었다. 바오밥과 젊은 여인은 서로 상봉하며 껴안았다. 그녀는 선이와 똑같이 닮아있었다. 어쩌면 선이가 아닐까? 젊은 여인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주고 간 바오밥의 어릴 적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게 나란 말인가? 바오밥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니 그가 누구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여동생이라는 여인이 선이를 똑같이 닮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어쩌면 선이는 바오밥이의 진짜 동생일지도 몰랐다. 꿈속에서도 바오밥은 그게 현실이 아니길 빌었다. 사랑하는 선이가 동생일 리야.
꿈속의 장면은 갑자기 바뀌어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헤어진 전처 엘리노어가 우산을 펼쳐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제야 오냐며 비를 흠뻑 맞은 바오밥에게 우산을 씌어주는 엘리노어의 옆모습은 이상하게도 선이처럼 보였다. 우산을 같이 쓰고 들어간 집은 시카고에 있는 양부모의 집이었다. 양부모가 인자한 웃음으로 바오밥을 맞아주었다. 바오밥이 너무나 사랑하던 개 라이카가 뛰어나와 온 얼굴을 핥아댔다. 바오밥은 정말 오랜만에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