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같은 아이들과 같은 학교 출신끼리 어울리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은 새 친구를 찾아 나섰다. 다양성을 찾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비밀스런 충동을 따라 도시 아이들은 농촌 아이들과 어울리고, 알프스 고산지대 아이들은 저지대 지역 아이들과 어울렸다. 젊은이들은 마음을 못 정하고 계속 더듬으며 찾아다녔다. 모두 똑같다는 의식과 혼자 있으려는 욕망이 같이 나타났다. 아이의 잠에서 깨어난 많은 소년들이 처음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키우기 시작했다. 애정과 질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하고 사소한 장면들을 연출했고, 그것이 깊은 우정으로 발전하거나 반감 섞인 뚜렷한 적개심으로 발전해서, 산책을 같이 하는 다정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심하게 싸우고 주먹질을 하면서 끝나기도 했다.-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83쪽.
한스만이 혹독한 개성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아이들도 자신의 내면세계를 가꾸느라 저마다 노력하고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규범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욕망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저마다 취미생활을 즐기거나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는 친구를 만난다. 보통 아이들처럼 여자친구를 사귀거나 술을 마실 수 없는 이 아이들은 절제와 금욕의 가치를 일찍부터 내면화한 아이들이다. 그리하여 이 아이들에게는 ‘우정’이 그 모든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로 떠오르게 된다. 사춘기는 ‘다른 아이들과 나는 다르다’는 자의식과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공동체의식이 함께 강해지는 시기다. 한스의 동급생들은 대부분 그 두 가지 충동을 겉으로는 잘 제어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커다란 고민거리들이 숨겨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스는 유독 ‘다른 아이들과 나는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커다란 아픔을 느낀다. 한스는 ‘최고가 되고 싶다’는 열망과 ‘아름답고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다’는 열망 사이의 균형감각을 찾지 못한다.
억압당한 무의식의 그림자는 의식을 향해 대가를 요구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꿈, 사랑, 열정을 억압하면, 무의식은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어떤 형태로든 의식을 향해 메시지를 보낸다. 무의식이 의식을 향해 보내는 메시지가 절박해질수록 그것은 다양한 신경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끔찍한 악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고, 즐거운 취미나 오락거리를 찾지도 못한 한스는 점점 짙은 외로움을 느낀다. 헤르만 헤세는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한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애타게 그리운 그 우정의 나라가 한스를 잡아끌었지만 수줍음이 가로막았다”고. 한스는 “어머니 없이 엄격하게 자랐기 때문에 남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기대는 능력이 위축되어버린 것”이라고.
남에게 먼저 다가가 다정하게 기대는 능력. 그것은 자신의 아니마, 즉 무의식의 여성성과 대화하는 능력과도 관련된다. 아니마는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타인과 진정으로 관계를 맺고 진심을 털어놓고 싶은 욕망과 관련이 있다.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정신의 능력’에 속한다. 즉 자신의 아니마와 만날 수 있는 능력, 무의식의 그림자를 통합하는 능력이다. 한스는 자신의 아니마와 만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스와 깊은 우정을 나누고 싶어하는 하일너야말로 한스의 잃어버린 아니마를 상기시키는 존재다. 하일너의 갑작스런 키스는 한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은 ‘네 안의 또 다른 너’와 만나보라는 무의식의 메시지를 실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헤르만 하일너가 천천히 팔을 뻗어 한스의 어깨를 잡더니 얼굴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갑자기 하일너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 것을 느끼고 한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생소한 압박감에 심장이 세차게 방망이질했다. 이렇게 어두운 복도에 같이 있고, 갑자기 입을 맞추다니, 왠지 모험적이고 새롭고 어쩌면 위험하기까지 한 것 같았다. 퍼뜩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에 생각이 미쳤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아까 하일너가 눈물을 보인 것보다 이 키스가 훨씬 더 우스꽝스럽고 치욕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