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작 이 나무에 목을 매지 않았을까? 한스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결심이 섰고, 죽음은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 의사를 만날 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자, 두고 보세요!’
운명은 한스가 그의 어두운 결심을 마음껏 즐기게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그가 날마다 죽음의 잔에서 의욕과 살아갈 힘 몇 방울을 마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불구가 된 이 젊은이는 어쩌면 하찮은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우선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가야 했다. (…)
아, 피곤해.
아, 지쳤어.
지갑에 한푼도 없는데
배낭에도 없네.
-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142쪽.
하일너와 헤어지고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한스는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이제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살게 된다. 공부와 우정, 그에게 가장 소중했던 두 가지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한스는 삶의 목표를 완전히 잃고 방황한다. 급기야 자살까지 생각했던 한스에게 뜻밖에 구원의 손길이 다가온다. 바로 첫사랑이었다. 에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 만점인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에마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한스를 거침없이 유혹하고, 어린 시절부터 에마를 동경했던 한스는 마법에 걸린 듯 사랑에 빠진다. 에마와의 첫 키스는 한스에게 강렬한 상흔을 남긴다. 그것은 환희어린 상처였고, 비애 섞인 희열이었다. 에마와의 키스는 유년기와의 완전한 작별을 의미했고, 다시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즐겁고 행복했건만 이제 그것들은 까마득히 멀어지고 한없이 낯설어졌다. 그는 절망한 나머지 거칠거칠한 가문비나무에 기대 흐느껴 울고 말았다. 그러자 비록 한순간이지만 위로받고 구원받은 느낌이 들었다.”(183쪽)
한스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자신의 슬픔과 온전히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자기의 슬픔을 남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완전히 솔직해지는 순간이었다. 사랑을 시작하자, 한스는 이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학자의 길을 완전히 접고, 기계공이 되기로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 급작스러웠지만, 한스에게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한스는 어린 시절 친구 아우구스트에게 찾아가 기술을 배우기로 한다. 그는 결정한다. 창백한 학문의 세계에서 건장한 남성들의 노동의 세계로 이동하기로. 에마를 위해 더 멋진 남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자살충동으로 무너져가는 한스를 잠시 일으켜 세운 것 같았다. 하지만 에마는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않고 작별인사도 하지 않은 채 한스를 떠나버린다. 그녀는 그를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분노에 찬 고통과 이제 막 눈뜬 채워지지 못한 사랑의 힘이 음울한 아픔이 되어” 그를 괴롭힌다. 가슴 아픈 첫사랑이 막 시작되자마자 서둘러 끝나버린 것이다. 그가 하일너 이후로 가장 깊은 애착을 느낀 대상은 에마였지만 그녀는 그렇게 떠나버린다. 한스가 사랑을 쏟으려는 대상은 하나같이 그를 떠나버린다. “손에 넣고 싶은 삶의 모든 것과 매력이 에마와 함께 다가왔다가 심술궂게 다시 미끄러져 사라진 느낌이었다.”(192쪽)
남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상적 여성상, 아니마는 흔히 첫사랑의 경험을 통해 최초로 드러나곤 한다. 융은 남성 안의 여성성, 아니마의 발전에는 4단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1단계는 야생적이고 모성적인 여성상, 즉 이브의 이미지다. 2단계는 낭만적이고 탐미적인 여성상, 헬레네와 같은 여성상이다. 마릴린 먼로와 같은 유혹적인 여성상, 대중문화에서 가장 선호하는 팜므 파탈적인 여성상이 바로 2단계의 전형이다. 3단계는 마리아의 여성성, 즉 에로스적인 사랑을 신성한 헌신으로까지 고양한 여성성이다. 육체적 사랑을 넘어 정신적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여성이 바로 이러한 단계를 뜻한다. 4단계는 가장 성스럽고 숭고한 여성상으로서 지혜의 여신 아테네와 같은 여성성이다. 예술가에게 창조성의 원천이 되어주는 ‘뮤즈’가 바로 이런 여성이다. (대릴 샤프, 류가미 옮김, <생의 절반에서 융을 만나다>, 북북서, 2009 참고.)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의 아니마에게 보호받고, 10대나 20대에는 2단계의 유혹적인 아니마에 마음을 빼앗기던 남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3단계와 4단계의 여성성을 갈망하게 되고, 여성과 관능적 사랑만이 아닌 우정과 지혜, 예술과 창조의 열정을 공유하게 됨으로써 진정한 개성화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행운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정신의 모험이다. 안타깝게도 3단계와 4단계의 성숙한 여인상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한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에마는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여성이었던 것이다.
옛날엔 1년 내내 매달마다 뭔가를 애타게 기다렸다. 건초를 만들 때를 기다리고, 토끼풀을 벨 때를 기다리고, 그해 처음으로 낚시를 하러 가거나 가재 잡을 때를 기다리고, 맥주원료인 홉을 수확할 때를 기다렸다. 또 자두나무를 흔들어 자두를 딸 때를 기다리고, 감자를 수확하고 모닥불을 피워 감자 줄기를 태울 때를 기다리고, 곡식 타작이 시작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기분 좋은 일요일과 휴일을 기다렸다. 옛날에는 신비스러운 마법의 힘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이 아주 많았다. (…) 유년시절을 도둑맞은 그의 마음은 갑자기 봇물처럼 터진 그리움을 느끼며, 아름다웠던 아스라한 시절로 다시 도망쳐서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추억의 숲속을 헤매고 다녔다.
-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15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