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시간만에 한스는 배우고 읽는 일이 무엇인지 완전히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 단락과 한 마디 속에 어떤 수수께끼와 사명이 숨어 있고, 저 옛날부터 수많은 학자와 명상가와 연구자들이 그 문제와 어떻게 씨름해왔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공부하면서 그는 자신도 진리를 추구하는 그런 무리에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 진정한 학식은 하루하루 더 아름답고 어려워졌지만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맥박이 빨라지고 이상하게 기운이 펄펄 나서 승리를 향해 그를 급하게 몰아댔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맹렬하게 앞으로 나가려는 욕망이었다. 물론 그후에는 어김없이 머리가 아팠다.
-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57~58쪽.
목표를 설정하고 끊임없이 매진하는 책임감 넘치는 삶. 한스는 이런 삶이라면 자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천재적인 학습 능력을 보이던 10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훈육 받은 생활방식이었다. 하지만 단지 공부를 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용도로서가 아닌, ‘놀이’ 그 자체의 무한한 창조적 잠재력은 한스에게 심각하게 결핍된 영혼의 영양소였다. 한스는 원래 놀 줄 아는 소년이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힘차게 노동하며 신명나게 놀아가며 살아가는 명랑하고 순박한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한스의 영혼을 훌쩍 자라게 할 수 있는 이웃이자 친구이자 가족 같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교사들은 한스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유년시절을 빼앗아 가버린다. 방학 때도 공부를 하라고 압박하고, 입학시험에 이미 합격한 이후에도 선행학습에 매진하라고 종용한다. 덕분에 한스는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창백한 청년으로 성장해 간다.
한스의 아버지가 좀 더 주의깊게 아들을 지켜봤다면, ‘낚시를 그만두라’는 명령 이후 한스가 토끼장을 부숴버린 히스테리컬한 행동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이미 충분히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한스를 ‘더욱 더 채찍질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교장과 목사 또한 한스의 편중된 교육에 책임이 있었다. 한스는 건강한 육체와 따스한 관심, 아무 고민 없는 놀이가 필요한 아이였다.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한스 주변의 모든 어른들이 한스를 가르치려 하지만, 한스의 영혼을 고양시켜줄 만한 스승은 없었다. 교사는 넘쳐나지만 멘토는 없었던 것이다. 구두방 주인 플라이크만이 ‘공부만이 살 길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 ‘이 길이 아니어도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지만, 한스는 플라이크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스의 눈에 비친 플라이크는 그다지 ‘멋진 어른’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박하게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고, 화려하진 않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플라이크. 지적 허영이 강했던 한스에게 그런 ‘조용한 아름다움’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 미덕이었던 것이다.
칼 구스타프 융은 ‘개성화individuation’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내적 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개성화는 전인적인 자아상을 깨닫는 과정이다. 각자의 무의식에 잠자고 있는 수많은 열망과 상처를 전부 의식으로 통합할 때까지, 평생에 걸쳐 계속되는 내면의 사고 과정이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자신의 총체적 인간상에 대한 청사진이 있는데, 개성화란 무의식의 가능성을 최대한 의식의 수면위로 끌어올림으로써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청사진의 실현actulizing of the blueprint에 다다르는 길이다. 개성화는 ‘나는 다른 사람과 똑같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다른 사람에게 뒤질까봐,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없을까봐 조바심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로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생존과 경쟁의 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은 이 ‘개성화’의 축복을 평생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모두가 외적인 성취, 경쟁에서의 승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속에서 내면의 삶은 방치되곤 한다. 하지만 아직 발현되지 않은 무의식의 수많은 꿈들을 탐구하고, 시각화하고, 몸소 실현하려는 작업에 충실한 사람은 이 개성화 작업을 통해 풍요로운 자기 인식의 길을 닦을 수 있다. 지금 한스는 뼈아픈 성장통을 겪으며 바로 이 ‘개성화’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교사의 의무와 국가가 교사에게 맡긴 직무는 소년들의 거친 힘과 자연의 욕망을 제어해 뿌리부터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그 대신 국가가 인정하는 차분하고 절도 있는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 소년의 내면에는 거칠고 무질서하고 세련되지 못한 어떤 것이 있다. 교사는 우선 그것을 깨뜨리고, 위험한 불꽃은 끄고 밟아버려야 한다. 자연이 창조한 그대로의 인간은 예측할 수 없고 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며 위험한 존재이다. 그는 미지의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강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울창한 원시림이다. 나무를 솎아서 베고 정리해 원시림을 강제로 억제해야 하듯이 학교도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깨뜨리고 정복하고 강제로 억제해야 한다.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