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이야 소냐, 이러쿵저러쿵하는 그따위 이론을 무시하고 죽이고 싶었어. 나를 위해서, 나 한사람을 위해서 죽이고 싶었던 거야! 이 점에선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어머니를 도와주고 싶어서 노파를 죽인 게 아냐. 전혀 당치 않은 소리지! 돈과 권력을 손에 넣고 인류의 은인이 되기 위해 죽인 것도 아냐. 터무니없지! 나는 그저 죽였을 뿐이야. 나를 위해서, 나 하나만을 위해 죽인 거야. (…) 소냐, 내가 그 여자를 죽였을 때 필요로 했던 것은 돈이 아니었어. 돈보다 오히려 다른 그 무엇이 필요했어. 이제는 그게 무엇인지를 완전히 알았어. (…) 내가 그때 한시라도 빨리 알고 싶었던 것은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냐, 아니 인간이냐 하는 점이었어. 나는 짓밟고 넘어설 수 있는가, 아니 할 수 없는가? 일부러 허리를 굽혀 주울 것인가, 아니 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겁에 질려 떨기만 하는 벌레인가, 아니 사람을 죽일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565쪽.
우리는 각종 범죄의 원인을 유형화시킨 전형적인 답변들을 알고 있다. 생계형 범죄부터 시작해서, 인종이나 집단 간의 증오 범죄, 사이코패스의 병리적 범죄, 원인을 설명하기 힘든 우발적인 범죄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런 규격화된 답변이 과연 ‘범죄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을까. <죄와 벌>은 한 인간이 선량한 시민에서 위험한 범죄자로 변모해가는 과정, 그리고 그 최악의 범죄자가 다시 이전보다 오히려 훨씬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죄와 벌>은 역사상 가장 기나긴, ‘범죄자의 자술서’일지도 모른다. 물론 라스콜리니코프 1인칭의 독백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다채로운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범죄자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을 둘러싼 모든 인물들의 세세한 심리묘사까지도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엄청난 해방감과 미칠 듯한 불안감을 동시에 맛본다. 이윽고 그는 깨닫는다. 죄 자체의 고백보다도 ‘죄를 저지른 이유’를 고백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그는 마침내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고 만다. 자신은 일찍이 논문에서 묘사한 것처럼 나폴레옹이나 시저 같은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만을 바라보고 사는 불쌍한 어머니와 두냐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을 위해, 나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 그 노파를 죽이고 말았다고. 소냐는 엄청난 충격 속에서도 라스콜리니코프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를 말없이 끌어안고 키스해준다. 소냐의 믿을 수 없는 따스함 앞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더욱 괴로워진다.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두렵고, 감옥에 가게 된다는 것도 괴롭지만, 누군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더욱 괴로워진다.
그가 소냐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면 면회는 와주겠어?” 소냐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네, 물론 가겠어요!” 소냐의 거짓 없는 사랑에 감명 받은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와중에도 사랑받는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것을, 그 행복이 자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잃을 것은 오직 ‘자유’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진짜 소중한 것, 잃어버려야 할 것이 또 있다는 것을 깨닫자 더욱 가슴이 찢어졌던 것이다. 감옥에 가게 된다면, 모든 것을 자백한다면, 소냐의 사랑을 잃어버릴까봐. 사랑받는 것, 그 모든 끔찍한 악행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괴로웠던 것이다.
드디어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뿐 아니라 경찰에도 자수을 하고 결국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게 된다. 두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면서. “나 때문에 울 건 없다. 살인자이긴 하지만 나는 평생을 두고 용기 있고 성실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겠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백방으로 그의 감형을 위해 노력한 결과, 그는 8년형을 언도 받고 시베리아의 감옥으로 가게 된다. 그는 철저히 홀로 있을 줄로만 알았던 곳에서, 더없이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소냐가 그 머나먼 시베리아 감옥까지 라스콜리니코프를 따라간 것이다. 온갖 삯바느질을 도맡아 하며 라스콜리니코프를 뒷바라지 하는 소냐의 모습에 죄수들까지 감명 받는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죄수들은 모두 모자를 벗고 절을 할 정도였다. “소피야 세묘노브나, 당신은 우리의 어머니야. 상냥하고 인정 많은 어머니야.”
끊임없이 우울증에 시달리던 라스콜리니코프 또한 마침내 소냐의 진심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소냐가 심한 몸살 때문에 며칠 그를 면회 오지 못하자, 그는 소냐가 자기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다. “두 사람을 부활시킨 것은 사랑이었다. 서로의 마음속에 다른 또 한쪽의 마음을 위해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를 돕기 위해 소냐는 ‘황색감찰’(창녀의 표시)의 저주에서 풀려나고, 소냐의 꾸밈없는 헌신을 통해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 것이다.
장발장은 꼬제뜨와 마리우스를 맺어주고,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며 종적을 감추어버린다. 그러나 그 전에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힘겹게 밝힌다. 자신은 ‘포슐르방’이 아니라 장발장이라고.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한 남자, 평생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살아온 탈옥수라고. 자베르마저 장발장을 놓아주고 자살해버렸지만, 장발장은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평생 그를 괴롭히던 자베르도 없고, 수색을 당하거나 추적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왜 장발장은 고백을 해버린 것일까. 장발장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스스로를 가두는 거대한 감옥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추적당하고, 자기 자신에게 수사를 받고, 스스로를 체포하고, 스스로를 처형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마리우스를 구해내고, 이제 기력이 쇠하여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장발장에게 꼬제뜨와 마리우스 부부가 찾아온다. 마지막으로 꼬제뜨를 볼 수 있게 되자 장발장은 힘을 내어 고백한다.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무서운 것은 진정으로 살지 못한 것이야.”
장발장은 처음으로 꼬제뜨의 아름다운 어머니 팡띤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 어머니는 팡띤느라고 했다. 그 이름을 단단히 외워 두어라, 팡띤느란다.” “지금 네가 행복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네 어머니는 불행 속에서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라는 거다.” “자, 너희들, 나는 이제 가련다. 언제까지나 서로 깊이 사랑해라. 서로 사랑한다는 것, 이 세상에 그 외의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단다.” 장발장의 끔찍한 어둠은 그의 영혼을 파괴했지만, 꼬제뜨는 물론 마리우스, 그리고 가난과 비참으로 죽어가던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장발장은 꼬제뜨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별을 빛나게 하기 위해, 자기는 처참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영혼 또한 구한 것이다. 장발장은 위대한 혁명가나 존경받는 성인군자는 아니었지만, 혁명을 꿈꾸며 피 흘리다 죽어간 젊은이들을 구하려 목숨을 바쳤고,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사람들,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죽어가는 팡띤느를 구함으로써 숨은 성자가 되었다. <레미제라블>과 <죄와 벌>이 불멸의 고전으로 남은 이유는, 걷잡을 수 없이 자신의 삶을 망쳐버린 주인공들이 ‘두 번째 인생’만은 제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너무도 아름답게 그려냈기 때문은 아닐까. 용서나 구원은 타인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아픔이 없다면, 타인의 보살핌과 눈물과 공감이 없다면, 스스로를 용서하고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조차 찾아오지 않는다. 장발장과 라스콜리니코프는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 나 보다 더 고통 받는 사람들’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기적을 증명한 불멸의 인간형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왜 고백을 하느냐고 그대는 물었소. 고발을 당한 것도, 수색을 당하는 것도, 추적을 당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하고 말이오. 아니오! 나는 고발되어 있소! 그렇고말고! 수사도 받고 있소! 추적도 당하고 있소! 누구에게! 바로 나한테서요. 나의 도망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오. 나는 스스로를 끌어내고, 스스로를 경찰에 끌고 가고, 스스로를 체포하고, 스스로를 처형하는 거요. (…) 의무는 그것을 깊이 깨달은 사람에게 보답을 하오. 왜냐하면 의무는 사람을 지옥으로 떨어뜨리지만, 사람은 거기서 자기 옆에 신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오. 사람은 자신의 창자를 찢는 동시에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가 있는 것이오.
-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838~18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