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육친을 버리고 왔소. 어머니와 여동생을 말이오. 나는 이제 그들한테는 가지 않겠소. 그들과 인연을 끊고 왔소.”
“왜 그러셨어요?”
하고 소냐는 움찔해서 물었다.
(…) “지금의 나에게는 당신 한 사람뿐이오. 어서 나하고 갑시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당신을 찾아온 거요. 우리는 다 같이 저주받은 인간이오. 그러니까 나하고 같이 갑시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439쪽.
라스콜리니코프는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소냐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다 같이 저주받은 인간”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가 아는 한 자기 못지않게 깊은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소냐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소냐를 위악적으로 괴롭힌다. 그는 소냐의 방에 찾아가 그녀의 믿음을 조롱한다.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가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 신이 어디서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리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꿋꿋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믿음마저도. “어쩌면 신이란 게 이 세상엔 없는지도 모르죠.”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렇게 말하며 잔인한 쾌감을 느낀다. 소냐는 곤경에 처한 자신을 도와준 은인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충격에 빠진다.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라스콜리니코프는 갑자기 방바닥에 엎드려 소냐의 발에 키스한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나 같은 사람 앞에서?” 놀라는 그녀에게 라스콜리니코프는 쏘아붙인다. “나는 당신에게 머리를 굽힌 게 아니오. 온 인류의 고통 앞에 머리를 굽힌 거요.”
라스콜리니코프는 갑자기 격분해서 소리친다. “어떻게 그런 더럽고 천한 일과 그와는 정반대로 신성한 감정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가 말이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물속으로 뛰어들어 모든 것을 씻어버리는 편이 옳지 않을까요?” 이미 그런 생각쯤은 오래 전에 정리한 듯 보이는 소냐는 차분히 반문한다. “그럼 그들은 다 어떡하고요?” 자신만을 바라보고 사는 어머니와 동생들 때문에 소냐는 자살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버티게 하는 것은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가족과 신앙이었다.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소냐의 방에서 신약성서를 발견하고 묻는다. “이건 어디서 났소?” 소냐의 대답은 라스콜리니코프를 놀라게 한다. “리자베타가 가져다 준 거예요, 제가 부탁해서.” 자신이 도끼로 살해한 여인 리자베타가, 지금 자신이 가장 의지하고 있는 소냐에게 성경을 가져다주었다니. 라스콜리니코프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소냐에게 부탁한다. 성경을 읽어달라고. 전율과 감동에 사로잡혀 성경을 낭독하는 소냐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며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백한다. 나는 오늘 어머니와 여동생과의 인연을 끊고 왔다고.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소냐 당신뿐이라고. 광기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사람, 마지막 ‘고해의 대상’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리우스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지만 혁명가가 되느라 집안을 등진 상태라 꼬제뜨와 결혼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마리우스의 할아버지는 마리우스가 결혼을 허락받으러 오자 다짜고짜 코제뜨의 신분과 재산 수입부터 물어본다. 꼬제뜨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마리우스는 그저 ‘그녀도 나처럼 가난하다’고 말한다.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무일푼인 두 남녀가 결혼한다는 선전포고에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차라리 그 여자를 네 정부로 삼으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심한 충격을 받은 마리우스는 다시는 할아버지를 보지 않을 결심으로 집을 나와버리고 만다. 마리우스와 꼬제뜨 사이에는 수많은 장벽이 놓여 있었다. 신분의 장벽, 계급의 장벽, 그리고 장발장의 비밀이라는 가장 치명적인 장벽까지. 그러나 마리우스는 굴복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꼬제뜨를 향한 그의 눈물겨운 발걸음을 가로막지 못한다. 피비린 혁명 속에서도, 끔찍한 살인 사건 속에서도, 젊은이들의 사랑은 애절하게 피어난다.
꼬제뜨의 인품은 어디까지나 순진하고, 솔직하고, 투명하고, 깨끗하고, 천진하고, 광휘에 싸여 있었다. 꼬제뜨는 한껏 맑은 빛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4월과 새벽을 느끼게 했다. 그 눈동자에는 이슬의 정령이 맺혀 있었다. 꼬제뜨는 새벽빛이 모여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 같았다.
마리우스가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고 감탄한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 여성이란 바로 이런 과오없는 부드러운 심정의 본능을 가지고 느끼거나 이야기한다. 여성만큼 다정하고 깊이 있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존재는 또 없다. 다정함과 깊이, 이것이야말로 여성의 전부이다. 또 그것이야말로 하늘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런 완전하고 더없는 행복 속에서 두 사람의 눈에는 끊임없이 눈물이 괴었다.
-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3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