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그 노파가 뭐란 말이냐? 그는 발작적으로 흥분하여 생각했다. ‘노파에게 손을 댄 것부터가 나의 손해다. 그 노파는 문제도 아니다! 그 노파는 내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 병 때문에 죽어간 것이다. 나는 다만 어서 빨리 장애물을 뛰어넘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 어머니, 누이동생,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들인가. 그런데 나는 두 사람을 왜 미워하고 있나? 나는 둘을 미워하고 있어.(…) 어머니를 끌어안으면서 나는 생각하고 있었어. 만약 어머니가 아신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그때 모든 것을 고백해버렸어야 했던 것일까? (…) 아아, 가여운 리자베타! 왜 그 여자가 불쑥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일까! 그런데 나는 왜 이 여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것인가? 마치 죽이지 않은 것처럼.....리자베타! 소냐! 두 여자 모두 상냥한 눈을 가진 귀엽고 착한 여자들. 왜 그 여자들은 울지 않을까? 어째서 그 여자들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는 것인가? 그녀들은 모든 것을 남에게 주면서.....사랑스러운 고요한 눈으로 보고 있어. 소냐, 소냐! 조용한 소냐!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343~344쪽.
라스콜리니코프의 얼어붙은 심장을 조금씩 녹이는 것은 그를 의심하는 여러 남성들이 아니라, 아무런 원망도 아무런 권력도 없이 그를 걱정해주는 여성들, 그리고 아무런 죄 없이 죽어간 리자베타이다. 그는 범행 후 한참이 지나서야 리자베타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치 죽이지 않은 것처럼’, 그녀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리자베타와 소냐의 지극한 ‘침묵’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리자베타는 울지도 않고,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라스콜리니코프가 저지른 그 끔찍한 폭력을 견뎌냈다. 소냐 또한 다만 견디고 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도, 너무도 맑고 투명한 얼굴로 타인을 바라보는 소냐의 눈빛이 마치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라스콜리니코프를 움직인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서 자신의 자화상을 본다. 두 사람 모두 ‘나의 삶’을 빼앗겼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살인으로 모든 것을 잃었고, 그녀는 매춘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고 보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오랫동안 이성을 잃은 상태였지만, 두냐에게 흑심을 품었던 루진에 대한 그의 판단만은 정확했다. 루진은 자신의 권력과 재산으로 두냐는 물론 라스콜리니코프의 가족 전체를 쥐락펴락 하려고 했으며, 소냐를 모욕하기까지 한다. 루진은 벼락출세를 한 사람이었고, 병적으로 자존심이 강했으며, 자기 재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할 뿐 아니라, 때로는 거울 앞에 혼자 서서 자기 얼굴에 도취되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무엇보다도 숭배하는 것은 바로 온갖 부정한 방법을 통해 얻은 ‘재산’이었다. 루진은 허영과 오만으로 가득 찬 속물의 전형이다. 그는 가난하고 아름답고 교양 있는, 그러나 “평생 자기를 은인으로 생각하는 노예 같은 여자”를 꿈꾸었는데, 두냐야말로 그의 이상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루진의 오판이었다. 두냐는 결코 노예 같은 여자가 아니었으며, 어려운 처지 때문에 잠시 자존감을 잃었던 것뿐이다. 라스콜리니코프와 두냐는 꿈은커녕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했지만 부자들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다. <죄와 벌>은 이렇듯 다양한 인물군상을 보여줌으로써 당시 페테르부르크의 풍속도를 낱낱이 드러내준다.
빅토르 위고가 지닌 마음의 카메라는 놀라운 유연성과 자유로운 변신능력을 갖춘 것만 같다. 때로는 최첨단 현미경처럼 치밀하게 파리 곳곳의 풍경을 확대해서 보여주고, 때로는 거대한 망원경처럼 머나먼 시선을 던져 혁명의 열기에 휩싸인 파리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스케치해준다. 때로는 소름끼치게 정확한 투시력으로 등장인물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보여주고, 때로는 만화경처럼 다채로운 빛깔로 다양한 인물군상의 속내를 이채롭게 그려낸다. 그는 ‘불행한 계급의 증오’와 ‘안락에 대한 곤궁의 반란’이 당시 프랑스 사회의 가장 치명적인 뇌관임을 간파한다. 그리고 아무리 짓밟아도 또 다시 일어나는 민중의 분노가 지닌 기적 같은 치유의 힘을 믿었다. 장발장을 단지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불행한 인간’으로 그리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혁명의 주체’로 물들어가는 ‘또 한 사람의 민중’으로 그려낸 것이야말로 빅토르 위고가 일궈낸 불멸의 인간애였다.
고뇌는 분노를 낳고 그리고 부유한 계급이 맹목에서인지 아니면 잠이 들어서인지 어쨌든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불행한 계급의 증오는 한쪽에서 몽상하는 비통한 정신, 악질의 정신에 불을 붙여 철저하게 사회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증오로 실행하는 조사,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 그러한 난리는 이미 압제자에 대한 피압제자의 싸움이 아니고 안락에 대한 곤궁의 반란인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은 붕괴한다. (…) 18세기 말 거의 전유럽에 절박했던 그 위험을 프랑스 대혁명이, 그 거대한 성실의 행위가 한꺼번에 끊어버리고 만 것이다. 칼을 든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은 벌떡 일어나 재빠른 동작으로 단숨에 악의 문을 밀폐하고 선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대혁명은 곧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선포하고 독기를 쓸어버리고 시대를 밝혀 민중에게 왕관을 씌웠다. 대혁명은 인간에게 제2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권리를 줌으로써 인간을 재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3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