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케플러나 뉴턴의 발견이 어느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예를 들면 한 사람, 열 사람 백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이 방해한다면, 그리고 그 많은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발견을 이룩하지 못할 때, 이런 경우 뉴턴은 자기 발견을 전 인류에 보급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을 해치울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할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 예를 들어 건설자나 입법자를 보더라도 태고적부터 오늘날까지 리쿠르고스, 솔로몬, 마호메트, 나폴레옹 같은 사람은 모두가 하나같이 새 법률을 반포하고 그 법률에 의해, 종래 사회가 신봉해오던 구법을 파괴한 그 하나만으로 범죄자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될 경우에 처하면, 무고한 피도 있고 옛 질서를 위해 흘린 비장한 피도 있지만,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제까지의 인류를 위한 건설자나 은인들은 모두가 도살자입니다.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343~344쪽.
살인을 저지르기 전, 라스콜리니코프의 글이 잡지에 실린 적이 있다. 그 글의 논지는 이렇다. 세상은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나뉘고, 비범한 사람들은 만약 자신의 드높은 이상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방해가 될 때는 얼마든지 그들을 짓밟고 해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위대한 점이 있거나 남보다 약간이라도 뛰어난 점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약간 색다른 말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기가 타고난 그 천성 때문에 범죄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범죄자가 되지 않고 남을 뛰어넘기란 어려우니까요.” 라스콜리니코프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두 종류로 나뉜다. 첫째, 제 1의 종족. ‘자기 자신과 같은 존재를 번식시키는 일 이외에는 아무 능력도 갖지 못한 저급한 종족’, 즉 평범한 사람. 둘째, 제 2의 종족. 그들은 ‘순수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지닌 새로운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천분을 가진 사람들’이다. 제1의 종족이 제도와 법률에 대한 복종을 받아들인다면, 제2의 종족은 ‘법을 초월하는 사람들’, 즉 창조자이거나 파괴자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구분을 하면서 은연중에 자신이 ‘제2의 종족’임을, 즉 법을 초월해도 좋은 종족임을 암시한다. 법을 초월하는 사람들은, 법을 위반하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고, 어떤 대단한 법에도 속박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믿는 사람들이다. 치기 어린 라스콜리니코프가 폭력적인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긴 하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정말로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아니 예전보다 더욱 교묘하게 떳떳하게, 이 세상의 지배자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인까지 저질러 자신의 비뚤어진 신념을 실천하려던 라스콜리니코프의 ‘악마적 실험’은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구원받지만, 이 무서운 청년 엘리트가 바라본 세상의 잔인한 작동원리는 지금까지도 소름끼치게 들어맞고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세상을 두 종류의 종족으로 나눔으로써, 복종과 지배를 어쩔 수 없이 견디는 사람들의 엄청난 희생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다른 관점에서 ‘법을 초월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세상을 내려다보며 법을 초월하는 사람들에게 집중한다면, 빅토르 위고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법을 초월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빅토르 위고의 눈에 비친 ‘법을 초월하는 사람들’은 ‘은어를 쓰는 사람들’이다. 범죄자들, 낙오자들, 부랑자들, 죄수들, 창녀들, 거지들……. 그 모든 음지에서 서식하는 사람들의 은어를, 그 끔찍한 밑바닥까지 파고드는 것이 빅토르 위고의 전략이다. 그럼으로써 장발장 개인의 어둠이 ‘한 사람의 불행’이 아니라 당대를 살았던 모든 ‘가련한 사람들의 불행’과 거대한 인연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음을 밝혀낸다. 그는 어둡고 더럽고 은밀한 언어의 지옥, 즉 집단적 은어에 대한 집요하고도 애정 어린 탐구를 통해 지배계급의 억압과 폭력을 폭로한다. 그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 온갖 비밀스런 은어를 쓰는 사람들을 향해, 연구와 분석의 자세가 아닌 사랑과 공감의 자세로 다가간다.
인간은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이 아니다.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다. 사실이 하나의 중심이고 사상이 또 하나의 중심이다.
은어는 뭔가 나쁜 일을 하기 위해 변장하는 하나의 탈의실일 뿐이다. 언어는 거기서 언어라는 가면과 비유라는 누더기를 걸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언어는 무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일단 그렇게 바뀌면 이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정말 프랑스어인가? 인류의 위대한 국어인가? (…) 한 마디 한 마디 그 의미는 다 알 수 없어도 뭔가 등골이 오싹해지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언뜻 인간의 말소리 같이 들리나 사실은 인간의 말소리보다는 짐승들의 외침에 더 가까운 소리다. 이것이 바로 은어이다. 그 한 마디 한 마디는 지극히 추하고 뭔가 알 수 없는 묘한 짐승의 성질을 띠고 있다. 그것은 어둠 속에 깃드는 불가해한 것이다. (…) 불행 속은 어둡지만 죄악 속은 더욱 캄캄하다. 그 두 개의 어둠이 서로 융합되어 은어를 만드는 것이다.
-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316~13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