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콜리니코프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대로 문지방에 우뚝 서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긴 의자에 걸터앉은 채 한 시간 반이나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는 어째서 그것이 그녀들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다른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 로쟈가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말하는 투로 봐서는 확실히 열 때문에 정신조차 가누지 못하는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그가 ‘오늘 도망쳤다’는 애기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은 너무나 놀라 어이없어 했다. 아아, 그 애는 어찌 되었을까? 두 사람은 울었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한 시간 반 동안에 두 사람은 십자가로 괴로움을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감격어린 환희의 부르짖음이 라스콜리니코프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사람처럼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레 엄습한 견딜 수 없는 의식이 벼락처럼 그를 때렸다. 그도 어머니와 누이를 안으려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머니와 누이는 그를 꼭 껴안고 키스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 한 걸음 디딘 순간, 그대로 허우적거리며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256~7쪽.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의 욕구가 탄생하는 지점, 죄의 욕망이 발화하는 지점, 죄의 열망이 실현되는 지점을 소름끼치게 묘사한다. 그리고 죄의 증거를 은폐하려는 열망, 죄를 고백하려는 열망, 그리고 죄 자체를 부정하고 은폐하려는 자기기만의 열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소냐의 가족을 돕기로 한 순간, 라스콜리니코프는 신이 자신에게 뻗치는 구원의 손길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 그는 자신의 죄를 마음 깊이 받아들일 준비는 되지 않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러버린 그는 어떻게든 죄의 기억 자체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통해 살인의 기억을 씻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러한 희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누군가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인해 또 한 번 무너지고 만다. 그의 초라한 방 안에는 그의 불안한 눈빛, 그의 조급한 숨소리, 그의 위태로운 몸짓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두 사람이 와 있다. 바로 어머니와 누이였다.
이 가난한 고학생 라스콜리니코프를 신주단지처럼 애지중지하며 노심초사해 온 어머니, 그리고 오빠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희생까지 감수하려는 두냐. 그녀들은 라스콜리니코프를 보자마자 그의 상태가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한다. 무슨 일인지는 전혀 모르지만, ‘우리의 로쟈(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가 더 이상 예전의 로쟈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다 묻어두고 도망가고 싶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힘을 얻고 싶었다. 이제 ‘진짜 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내 아들이 누군가를 죽였다니.’ ‘내 오빠가 누군가를 죽였다, 그것도 두 명씩이나.’ 이 사실을 알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두 사람이 밀어닥친 것이다. 로쟈를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이 두 여인들은, 이미 절망적으로 치닫고 있는 그의 영혼 깊숙한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그가 지켜야 할 모든 것이었으며, 지금까지 가난과 고통을 견뎌오게 한 삶의 버팀목이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을 포옹하려는 두 사람의 몸짓 앞에서 선뜻 ‘옛날처럼’ 그녀들을 와락 안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난 예전의 로쟈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들의 해맑은 영혼을 거울삼아 아프게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 심리의 관점에서 죄의 기원을 파헤친다면, 빅토르 위고는 정치와 계급의 관점에서 죄의 기원을 파헤친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장발장 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자체이기도 하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 연루된 모든 계급들을 대변하는 개성 넘치는 인물들을 작품 곳곳에 등장시켜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눈빛으로 당대 프랑스 사회의 계급 갈등과 혁명의 발생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죄의 기원을 진정으로 성찰하지 않고, 형벌의 관점에서만 ‘죄인’을 처벌하려는 사법 권력의 악습을 비판하는 대목들도 감동적이다. 죄짓는 사람들만을 처벌하려 하고 죄를 양산시키는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는 사법 권력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레미제라블>의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비판은 통렬하고 장엄하다. 부르주아지가 진보와 혁명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이제 겨우 의자에 걸터앉을 여유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의자에 앉아 너무도 편안하게 쉬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 의자의 영원한 주인이 되려하는 부르주아는 결코 세상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막 ‘편안한 의자’를 차지한 부르주아는 결코 혁명을 기뻐할 수 없었다.
1830년 혁명은 중단된 혁명이다. 진보는 중도에서 그치고 정의는 거의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논리는 ‘거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태양이 촛불을 모르는 것처럼. 그러면 혁명을 중단시키는 건 누군가? 다름 아닌 부르주아지이다. 왜 그런가? 부르주아지 자체가 이미 만족할 만한 이익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욕망을 가졌으나 오늘은 이미 충족되었고 내일은 포만감을 느낄 것이다. (…) 부르주아지를 하나의 사회 계급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 부르주아지란 단순히 국민 속에서 만족해하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란 이제 겨우 의자에 걸터앉을 여유를 가진 사람이다. 의자는 사회계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너무 성급히 편안해지려는 생각 때문에 곧잘 인류의 진행마저도 정지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부르주아지가 곧잘 저지르는 과오였다.-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1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