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아버지”하고 여동생은 말을 하기 시작하기 위해서 손으로 식탁을 두드렸다. “이럴 순 없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잘 모르실지 몰라도 전 알아요. 이런 괴물에게 내 오빠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요. 제가 단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저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저것을 돌보고 도 참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지요. 우리를 조금이라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저 애 말이 꼭 맞아.” 아버지가 혼잣말을 했다. 아직도 충분히 숨을 쉬지 못하는 어머니가 눈을 사납게 흘기면서 내민 손에다 쿨룩쿨룩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 “우리는 저것에서 벗어나야 해요.” 여동생은 오로지 아버지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기침하느라 얘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것이 두 분 모두를 돌아가시게 할 거예요. 저에겐 그렇게 되는 게 뻔히 보여요. 우리는 전부 힘들여 일을 해야만 하는데, 집에서 저런 끝없는 두통거리를 감당할 수는 없어요. 더 이상 그럴 수 없어요.” 그리고 그녀가 너무 심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녀의 눈물이 어머니의 얼굴로 흘러내렸다.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변신』, 문학동네, 2005, 115쪽.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완전히 절망하여 모든 삶의 의지를 포기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어머니가 그의 끔찍한 전신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혼절하던 순간? 아니면, 아버지가 그레고르의 등에 사과를 난타하여, 그의 등에 사과가 박힌 순간? 자신을 낳아준 존재들이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은 물론 충격적이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레고르가 진정으로 모든 희망을 내려놓은 순간은, 여동생이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이다. 여동생은 그레고르가 가족 중에 가장 아끼던 존재였다. 그레고르가 부모님에게 느낀 감정이 의무감이었다면, 여동생에게 느낀 감정은 애틋함이었다.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부채를 탕감하느라 그토록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여동생을 음악학교를 보내기 위해 따로 돈을 모으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여동생은 벌레가 된 몸으로도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기 위해 필사적으로 문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오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여동생은 그레고르가 뻔히 듣고 있는 걸 알면서도 단호히 선언하고 만다. “이런 괴물에게 내 오빠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요.” 여동생에게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오빠가 아닌 ‘괴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그레고르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했지만, 그녀 역시 때로는 기절하고 때로는 기침을 하면서, 이 처치곤란한 상황을 회피한다. 여동생은 오빠를 부정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혐오하며, 어머니는 아들을 꺼림으로써, 그는 영원히 가족 삼각형으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 여동생은 단호하게 선언한다. “우리는 저것에서 벗어나야 해요.” 이 순간 아들도, 오빠도, 그도 아닌, ‘저것’으로 전락해버린 그레고르는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레고르의 몸은 때로는 ‘벌레의 삶’을 긍정했다. 가구를 다 치워버린다면, 자신은 자유롭게 펄펄 기어 다닐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원죄의 상징처럼 날카롭게 번득이는 사과로 흠씬 온몸을 두들겨 맞고, 여동생이 ‘저 벌레는 우리 가족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레고르는 이제야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버린 것이다. 그레고르는 그때부터 음식을 거부한 채 납작하게 말라가고, 어느 날 완전히 호흡을 멈춰버리고 만다. 그는 영원히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인간세계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
한편, 판사는 물론, 검사, 변호사, 증인, 신문기자 등 그 누구에게도 ‘잘 보이지’ 못했던 뫼르소는 끝내 사형을 선고받고 만다. 그는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안전한 사람’으로 비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뫼르소를 ‘왠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극히 위험한 사람’으로 규정한다. 아무도 면회 오지 않고, 아무도 그를 걱정하지 않는 차가운 감옥 속에서 그는 오히려 자신의 의식이 거울처럼 맑아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는 상고도 거부한 채, 사제의 면회조차 거부한 채, 침착하게 마지막을 준비한다. 그는 누구에게도 구원을 바라지 않음으로써, 그를 지배하는 모든 권력의 시선으로부터 눈부시게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잔인하지만 아름다운 평화로 인해 그는 구원된다. 사제가 “당신은 아무 희망도 없이, 죽으면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뫼르소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사제는 뫼르소를 불쌍히 여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사제는 인간들의 심판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심판이 전부라는 논리로 뫼르소를 설득하려 하지만 뫼르소는 동의하지 않는다.
뫼르소는 인간들의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지만, 뫼르소는 재판이라는 제도 자체를 홀로 재판하고 있는 고독한 개인이기도 하다. “나는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피고 자신조차 이해하거나 설명하지 못하는 죄를 제멋대로 규정하고 재판하고 매듭짓는 수많은 권력의 시선들. 그 따가운 시선들 속에서 뫼르소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겨지고 만다. 죄인을 종교의 이름으로 구원하려는 사제의 눈빛이야말로 마지막으로 뫼르소를 괴롭히는 또 다른 권력이다.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제의 확언, 나는 당신의 편이며 당신의 마음은 눈이 멀어서 내 마음을 보지 못하는 거라는 주장, 당신을 위해 기도드리겠다는 의지까지, 뫼르소에게는 그 모두가 고통일 뿐이다. 뫼르소는 독자에게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난제를 던진다.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는가.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는가. 우리가 평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수많은 보이지 않는 권력의 칼날 앞에 우리의 삶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가. 뫼르소는 비록 의연히 죽음을 맞지만, 독자의 가슴 속에서는 뫼르소의 삶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물음표로 변하여 가슴 속에 아프게 박힌다. 우리는 누군가의 죄를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 단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단죄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 세상 모든 제도의 ‘옳음’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권리는, 주체는 어디 있는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었다.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이방인』, 민음사, 2011, 135~1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