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방에서 돈벌이의 필요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레고르는 문에서 떨어져나와 그 옆에 놓인 서늘한 가죽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너무나 부끄럽고 서글픈 나머지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던 것이다. (…) 그레고르가 변신한 지 이미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 여동생은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오는 바람에 그레고르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꼼짝 않고 창가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딱 알맞았다. (…) 그녀는 단지 들어오지 않은 것만이 아니라 기겁을 하고 놀라 뒤로 물러서면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레고르가 몰래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물어버리려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레고르는 후다닥 소파 밑으로 몸을 숨겼다.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변신』, 문학동네, 2005, 61~65쪽.
벌레가 되어서도 그레고르는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한다.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은 가족들을 돌봐야 할 아무런 도덕적 책무가 없는데도 어이없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다. 게다가 가족들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완전히 무력하지 않다. 아버지에게는 그레고르 모르게 모아놓은 재산도 있다. 아버지가 그레고르에게 그 사실을 미리 알렸다면, 그레고르의 부담감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아들에게 모든 생계를 다 떠맡기고 다른 가족이 모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그 아들에게 너무 큰 부담이라는 것을, 정작 당사자인 그레고르는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순간에도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가족들을 더 도와줄 수 없음을, 재능 있는 여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을 탓하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그레고르에게는 어떤 자유도 없었다. 그 자유 없음을 그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기적인 아들이 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레고르의 진짜 슬픔은 그렇게 아끼던 여동생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동생은 그레고르의 먹거리를 챙겨주고, 방을 청소해주기는 하지만, 정작 그레고르의 ‘변신한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나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가도, 여동생이 자신과 ‘마주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그레고르는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단지 외모만이 변했을 뿐인데, 인생, 관계, 세상 전체가 모두 변해버린다. 그의 외모보다 더 심각한 변화는 바로 관계의 변화였던 것이다.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아들이자 다정한 오빠이자 선량한 영업사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단지 외모가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온 세상이 꺼리는 무서운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는 것,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뒤에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적인 행위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커다란 벌레가 창밖을 내다보는 ‘끔찍한 모습’을 여동생에게 들킨 뒤로, 그는 이 사소한 자유마저 마음껏 누릴 수 없게 된다. 그는 이렇게 ‘벌레의 삶’에 조금씩 익숙해진다. 어떤 사람과도 ‘시선’을 마주칠 수 없게 됨으로써.
한편, 뫼르소는 친구 레몽의 사적인 원한관계 속에 잘못 끼어들었다가 마침내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레몽은 우여곡절 끝에 아랍인들에게 원한을 사게 되는데, 그들과의 패싸움에 뫼르소는 우연히 가담하게 된 것이다. 마침 레이몽이 준 총을 가지고 있던 뫼르소는 운 나쁘게도 이전의 패싸움에서 만난 적이 있는 아랍인을 독대하게 된다. 문맥을 잘 살펴보면, 아랍인이 뫼르소를 향해서 칼을 먼저 뽑았음을, 그러니까 아랍인을 향해 총을 쏴버린 뫼르소의 행동 자체가 정당방위의 소지가 다분함을 알 수 있다. 그는 ‘태양 때문’이라고 진술하지만,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비웃음을 사지만, 그 태양은 그에게 단순한 태양이 아니라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으로 느껴진다. 그날의 끔찍한 태양은, 누구에게도 슬픔을 표현할 수 없었던 뫼르소에게는, 세상이 끝난 것만 같은데 이제는 아무에게도 기댈 곳이 없다는 절망감을 닮은 태양이 아니었을까.
뫼르소의 우발적인 살인은, 친구 레몽의 원수를 대신 갚아준다는 식의 대의명분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에게는 우연히 권총이 쥐어졌고, 자신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는 아랍인과 눈알을 찌르는 듯한 끔찍한 태양광선 때문에 그 순간 정신착란에 가까운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온 세상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듯한 공포를 느낀 것은 아닐까. 뫼르소는 자신의 신체를 향한 분명한 위협을 느꼈으며, 작열하는 태양 빛에 칼끝의 날카로운 금속성이 더해져 그는 더 심각한 위험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심리상태’고 어디까지가 ‘팩트’인지를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살인이 어떤 대의명분도 없다는 것이다. 뫼르소 자신도 살인에 대해 어떤 해명도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우발적 살인의 치명적인 딜레마였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특히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빛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ᄋᆜ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이방인』, 민음사, 2011, 69~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