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등에 대고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쳐들어보니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고, 그 배는 다시 활 모양으로 휜 각질의 칸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불은 금방이라도 주르륵 미끄러질 듯 둥그런 언덕 같은 배 위에 가까스로 덮여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애처롭게 버둥거리며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일까?’ 그는 생각했다. 꿈은 아니었다.
-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변신』, 문학동네, 2005, 7쪽.
한없이 비좁고 막다른 골목들로만 이루어진 세계. 탈출의 액션도, 저항의 몸부림도 없이, 그저 한없이 기다리고, 한없이 지체하는 기이한 사람들. 절망에 안주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희망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사람들. 카프카의 인물들과 카뮈의 인물들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그들은 피터팬처럼 꿈과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로 우리를 안내하지도 않고, 제인 에어처럼 희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살아있다는 일의 기쁨을 느끼게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M. 버터플라이나 보바리 부인처럼 관능적인 매력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매력적이다. 희망도 없고, 사랑이나 우정조차도 잘 느끼지 못하는 그들이, 이상하게도 매력적이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매력은 우선 구원을 믿지 않는 용기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다. 그들은 정말 소름 끼치게도, 어떤 구원도 어떤 희망도 믿지 않는다.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절망에 안주하지도 않는다. 절망(+)과 희망(-) 사이의 정확한 ‘제로(0)’ 지점에서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세상의 중력을 견디고 있다.
사실 이들의 매력은 그들이 견디고 있는 끝없는 ‘불안’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변신』의 그레고르는 잠자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일해 왔으면서도, 끊임없이 직장과 가족 양쪽의 눈치를 보며 불안해한다. 『이방인』의 뫼르소 또한 불안한 주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어떤 의례적 제스처도 취하지 않기에,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소설의 첫 대목은 언제 읽어도 충격적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장례식 내내 어떤 슬픔의 제스처도 취하지 않는 그에게 독자들은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기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아, 그래. 꼭 남들이 원하는 대로, 슬픔의 제스처를 규범적으로 취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알베르 카뮈 |
그들의 세 번째 매력. 그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도망치지만 어쩔 수 없이 ‘유폐’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들은 상황에, 운명에, 관계에, 꼼짝없이 갇혀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끝내 도망치지 못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정말 한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매일매일 다시, 또다시 산꼭대기로 옮기는 시시포스가 따로 없다. 카프카는 말했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 과연 그렇다. 『변신』과 『이방인』은 도끼가 되어, 망치가 되어, 얼어붙은 우리의 가슴을 산산 조각낸다. 아니, 그런 소설들이 있어, 내 가슴이 이미 오래전부터 얼어붙어 있었음을 거꾸로 깨닫게 된다. 카프카는 한 권의 책이 우리로 하여금 강한 충격을 느끼게 하지 못하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느냐고 말한다. 정말 그의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적이다. 카프카의 말대로 그의 소설은 언제 읽어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멀쩡한 사람이 벌레가 되다니. 함축적인 상징도 깨어날 수 있는 꿈도 아닌, 실제상황이다. 『이방인』은 또 어떤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끼지 않는 아들이라니. 게다가 모친상 때문에 휴가를 주면서도 별로 내켜 하지 않는 직장 상사에게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쩌면 ‘벌레’가 되기 이전부터, 어머니가 사망하기 이전부터, 죽음과 같은, 아니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닐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은 알제에서 80 킬로미터 떨어진 마렝고에 있다. 2시에 버스를 타면, 오후 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밤샘을 할 수 있고, 내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 나는 사장에게 이틀 동안의 휴가를 청했는데 그는 이유가 이유니만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이방인』, 민음사, 2011, 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