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제 지배인님께서 네 방으로 들어가셔도 되겠지?
조급해진 아버지가 그렇게 묻고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안돼요.”
그레고르가 말했다. 왼쪽 옆방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오른쪽 옆방에서는 여동생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대체 왜 여동생은 다른 식구들이 있는 쪽으로 가지 않는 걸까? (…) 그런데 왜 우는 걸까? 그가 일어나지도 않고 지배인을 방에 들이지도 않아서? 아니면 그가 직장을 잃게 될까 봐? 그러고 나면 사장이 다시 묵은 빚 독촉으로 부모님을 못살게 굴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 염려는 지금으로선 쓸데없는 걱정이다. 아직은 그레고르가 여기에 있고, 가족을 저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하지만 나중에 적당한 핑계로 둘러댈 수 있을 이런 사소한 결례 때문에 그가 당장 해고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변신』, 문학동네, 2005, 24쪽.
오늘은 비록 출근을 못했지만, 내일은 출근할 수 있을 거야. 난 절대로 해고되지 않을 거야. 그러려면 이런 모습을 지배인에게 들켜서는 안 돼. 벌레가 되어버려서 무섭고 걱정스럽기보다는, 해고될까 봐,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그레고르 잠자. 그만큼 그는 심각한 일 중독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에 대한 그의 부담 또한 일종의 중독이다. ‘저 사람은 내가 없으면 안 될 거야’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사람에게 희생하는 사람들은 결국 처참하게 버려지곤 한다. 인간은 중독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적응의 동물이기도 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식의 논리는 행복한 긍정은 아니지만 잔인한 적응의 논리다. 그레고르가 더는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가족들은 처음에는 충격을 받지만 점점 그 상황에 익숙해지게 된다. 그레고르 잠자는 ‘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가족들은 결코 버텨내지 못할 거야’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삶 자체를 잃어버렸다. 그는 여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낼 생각은 하면서도, 자신은 ‘아버지의 빚’을 갚은 후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는 ‘내가 보호하고 당신들은 내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에 중독된 것이다.
중독이 너무 심각할 때는 중독 자체가 뿌리 깊은 정체성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중독에서 해방된 그의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가족관계의 희생양이 된 자신의 역할에 중독된 그레고르 잠자. 출근 하지 않는 그레고르, 일을 하지 않는 그레고르, 가족을 부양하지 않는 그레고르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내가 없으면 가족들은 결코 버텨내지 못할 거라는 믿음이 그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던 셈이다. 중독은 이미 그의 정체성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미 그레고르의 자아는 없고 그레고르의 노동, 그레고르의 임금, 그레고르의 생존만이 있었다. 그레고르는 그레고르 자신이기보다 ‘잠자’ 가족의 가장이었던 것이다. ‘벌레의 언어’가 전해질 수만 있다면, 그레고르는 여동생에게 말하고 싶다. 얘야, 난 아직 네 오빠야. 나 여기 있어. 난 가족을 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나를 버리지 말아주렴.
『이방인』의 뫼르소는 침묵에 중독되어 있다. 그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감정과 표현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기 때문에, 표현이 약한 사람은 감정 또한 무뎌지게 된다. 꼭 큰 소리로 절규하지 않아도, 꼭 눈물 뚝뚝 흘리며 울지 않아도, 감정에는 제 나름의 출구가 필요하다. 뫼르소에게는 바로 그 감정의 출구가 극도로 결핍되어 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너무 빨리 장례식을 마치고, 너무 빨리 일상으로 복귀하며,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싫어 늘 가던 식당에도 가지 않은 채 끼니를 거르기까지 한다. 그는 모든 것을 망각할 수 있는 곳, 즉 여자친구 마리의 품속으로 숨어버린다. 물론 마리와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꼭 ‘이야기’하지 않아도, 어떤 코드로든 감정을 표현할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한다. 소름 끼치는 무감각으로. 소름 끼치는 무의미로. 그는 생에 대면한다. 무섭도록 잔인한 용기다. 어떻게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존재를,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그는 바로 생의 무의미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지지 마리가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따라가서 팔로 허리를 감고 같이 헤엄을 쳤다. (…) 나는, 저녁에 영화 구경 가지 않겠느냐고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웃으면서 페르낭델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둘이 옷을 다 입었을 때, 내가 검은 넥타이를 맨 것을 보고 마리는 매우 놀라는 표정이 되면서, 상을 당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가 죽었다고 대답했다. 언제 그런 일을 겪었는지 알고 싶어 하기에, 나는 “어제.”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흠칫 뒤로 물러섰으나, 아무런 나무람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런 소리를 사장에게도 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해본댔자 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이란 조금은 잘못이 있게 마련이니까.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이방인』, 민음사, 2011, 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