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페어 레이디」 vs 『전원교향악』 4회
‘자선’은 가까이, ‘사랑’은 멀리
여자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고 싶어 하고 남자도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하죠. 그리고 각자 상대를 잘못된 길로 끌고 가려 한답니다. 한 사람은 북쪽으로 가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은 남쪽으로 가길 원하죠. 결과는 둘 다 동쪽으로 가게 된다는 거죠. 둘 다 동풍을 싫어하는데도 말이지요. (…) 그래서 나는 확고한 독신주의가 된 거죠. (…) 난 수십 명의 미국 백만장자의 딸들에게 제대로 영어를 말하는 법을 가르쳐 왔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들이죠. 하지만 난 단련이 되었어요. 그들은 내게 나무토막이나 다름없어요.
-버나드 쇼, 김소임 옮김, 『피그말리온』, 열린책들, 2011, 36쪽.
히긴스에게 사랑이란 인식의 오류로 인한 거대한 착각이다. 히긴스의 애정관은 명쾌하다. 남자는 북쪽으로, 여자는 남쪽으로 가고 싶지만, 결국 둘 다 싫어하는 동쪽으로 가버리는 게 사랑이라고. 히긴스는 자신의 음성학 레슨에서 아름다운 숙녀들을 무수히 만나 봤지만, 그녀들은 자신에게 ‘나무토막’과 다름없었다고 선언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여성 혐오증에 시달리는 피그말리온처럼, 히긴스는 ‘현실 속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여성을 결코 찾을 수 없다’고 믿는다. 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은 여성은 안 믿되 사랑은 믿는다. 그러나 히긴스는 여성을 못 믿을 뿐 아니라 사랑은 더더욱 못 믿는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살고 있는 눈부신 이상형을 조각상으로 표현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제발 ‘진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매일매일 그녀를 쓰다듬고 키스하고 껴안는다. 피그말리온과 달리 히긴스는 진정 사랑스런 여성이 눈앞에 있어도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다.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틈만 나면 면박을 주고 모욕하기까지 한다.
피그말리온이 사랑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간절한 기도를 바치는 것과 달리, 히긴스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히긴스는 자신의 음성학 수업으로 하루가 다르게 숙녀가 되어가는 일라이자를 보며 자부심을 느낀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보며 ‘자신의 솜씨’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던 바로 그녀가 눈앞에 서 있다는 것에 황홀해한다. 히긴스는 일라이자를 ‘그것’으로 바라보지만,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를 ‘그대’로 바라본다. 『피그말리온』에서 히긴스의 사랑이 오직 ‘학문’을 향해서만 작동하는 반면, 『전원교향악』에서 목사님의 사랑은 오직 ‘신’을 향해 움직인다. 목사님에게 신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것이지만, 인간들끼리 ‘지지고 볶는’ 현실적 사랑은 그만큼 위대하지 않다. 그는 다섯 명의 자녀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과 길 잃은 맹인 소녀에게 ‘좋은 스승’이 되는 것을 병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길은 너무도 멀고 험하다.
목사님의 지극한 선행은 신의 사랑을 받을지는 몰라도 가족의 사랑을 얻기는 어렵다. 정작 예고도 없이 갑자기 다가온 불청객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하는 것은 아내다. 눈먼 소녀 제르트뤼드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가족들이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제르트뤼드를 멀리했지만 조금씩 그녀를 따스하게 보살피기 시작한다.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목사님의 ‘길 잃은 아이 구하기 프로젝트’는 결코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맹인일 뿐 아니라 아무도 그녀에게 ‘웃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어떤 표정도 지을 줄 모르는 제르트뤼드. 모든 것에 무관심한 그녀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그를 괴롭힌다. 나는 이 아이를 도대체 ‘숙녀’로 만들 수 있기는 한 걸까. 그녀의 완강한 무관심과 적대감 앞에서 그는 자신의 열정을 후회하기까지 한다. 그는 신의 사랑을 인간의 사랑으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인간의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이렇게 고뇌를 거듭하는 동안 제르트뤼드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사랑스러운 존재로 변모해 간다.
물론 나는 제르트뤼드의 교육에 대해 완전한 한 편의 소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하게 나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 애의 무관심하고 둔한 표정,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애의 완전한 무표정은 나의 열의를 송두리째 얼어붙게 만들어버렸다. (…) 우리가 조금이라도 주의를 끌어보려고 하면 그 애는 동물처럼 신음소리를 내거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애의 그런 불만스러운 태도는 식사 때에만 사라졌는데, 내가 직접 퍼주는 음식에 짐승처럼 탐욕스럽게 달려드는 게 보고 있기가 아주 민망할 정도였다. 사랑이 사랑에 보답하는 것과는 반대로 나는 그 영혼의 완강하나 거절 앞에서 차츰 혐오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앙드레 지드, 김중현 옮김, 『전원교향악』,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36~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