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vs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①
개츠비 vs 블랑시: 오직 내 안에서만 일렁이는 빛을 찾아서
“사실주의는 싫어요! 난 마법을 원해요!”
“마분지 바다를 항해하는 종이 달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나를 믿어주신다면, 그건 가짜가 아니랍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중에서 블랑시의 대사
개츠비는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셔츠, 한 번도 읽지 않은 책을 펼쳐 보여 주고,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수영장에서 함께 수영하자고 초대하는 등, 자신이 소유하고 펼쳐주는 모든 것과 신기하게도 거리를 두고 서 있다.
―토니 태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존재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다. 멀리 있어야만 비로소 목마르게 반짝이는 것들. 그렇게 사라져가는 대상들을 향한 멈출 수 없는 그리움 자체가 ‘가장 나다운’ 정체성이 되어버린 사람들. 그들에게 사라져가는 저 그리움의 대상들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삶의 신화적 중심이다. 그들은 아련히 먼 곳에만 존재하는 듯 보이는 저 위태로운 환상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던진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그려낸 ‘개츠비’와 테네시 윌리엄스가 그려낸 ‘블랑시’야말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목표를 세워 대상을 어떻게든 쟁취하는 데 길들여진 사람들. 이렇게 목표지향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상이 어떻게 매 순간 다른 ‘빛’의 움직임에 반응하는지 관찰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저 목표만 성취하면 ‘게임 오버’니 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갖고 싶은 대상 주변으로 내리쬐는 빛의 찬란한 스펙트럼이 보이지 않는다. 매 순간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 속에서 대상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어떻게 바뀌는지, 이 변화무쌍한 차이를 감지해내는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날카로운 심미안을 지닌 이들은 ‘까다롭다’, ‘괴팍스럽다’는 핀잔을 들을망정, 외부에서 주입되는 대상에 대한 ‘평가’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눈에 비친 세계만을, 자신의 눈에 비친 ‘빛’의 극도로 주관적인 광채만을 보기 때문이다. 개츠비와 블랑시 역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빛의 각도에 따라서만 반응했다. 개츠비에게 그것은 데이지와 함께 나눈 잃어버린 시간들이었고, 블랑시에게 그것은 추억의 옛집 ‘벨 리브’에서만 가능했던 사랑과 행복의 나날들이었다.
그들은 사라져가는 대상을 향한 집착을 멈출 수 없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대상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저 멀리 아스라이 빛나는 그 무엇을 향한 그리움 때문에 현재의 고통을 간신히 견딜 수 있지만, 그 빛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혼신을 다해 바라보지 않으면 순식간에 꺼져버릴지도 모르는 저 가녀린 불빛을 향해 그들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모스부호를 송신한다. 사라져가는 그 빛의 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개츠비는 어두운 바다를 향해 힘껏 양팔을 뻗어서라도 ‘아주 작고 희미한 초록색 빛’을 뜨겁게 응시해야만 했고, 블랑시는 누추한 방 안을 비추는 전등 위에 알록달록한 종이갓을 씌워서라도 외부세계의 속물성과 초라함을 은폐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 안의 빛을 필사적으로 지켜낸다. 그들의 내면에 간직된 아름다움은 세상 밖의 어둠과 부딪치는 순간 산산이 깨어지기 쉬운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 안에서만 밝게 타오르는 빛, 타인에게 설명하기 힘든 빛,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는 빛. 그러나 그 빛이 없다면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런 빛이 개츠비와 블랑시를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그들은 타인에게 공적인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그 은밀한 빛의 진원지를 향해 인생 전체를 던져버린다. 그 안타까운 빛의 진원지는
어디였을까. 그토록 소중한 빛을 마음에 품은 그들에게 왜 ‘찬란한 몰락’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50피트 떨어진 곳에 한 인물이 내 이웃의 대저택의 그늘에서 나타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서 은빛 후추 같은 별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느긋한 움직임과 잔디밭에 발을 딛고 선 안정된 자세가 우리 고장의 하늘에서 자기 몫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려고 밖으로 나온 개츠비 씨 자신이라는 걸 시사하고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 하지만 나는 말을 걸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그가 혼자 있는 게 만족스럽다는 암시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기이한 자세로 어두운 바다를 향해 팔을 쭉 뻗었던 것이다. 그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가 떨고 있었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무심결에 나도 바다 쪽을 힐끗 보았지만, 아마도 부두의 끝에 있는 듯한 단 하나의 아주 작고 멀리 떨어진 초록색 불빛 외에는 아무것도 분간해낼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개츠비를 보았을 때 그는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스콧 피츠제럴드, 이만식 옮김, 『위대한 개츠비』,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100~1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