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이란 무엇인가? ‘명상’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를 떠오르게 한다. 요가, 단학, 기도, 선, 좌망 등등. 데카르트의 대표적 철학 저서 한 권은 그 제목이 ‘Meditatio'인데, 이것은 흔히 ’성찰‘이라고 번역되지만 ’명상‘과 다르지 않다. 진지한 철학적 사색 또한 명상에 속한다. 그렇다면 명상이란 무엇인가?
진리의 인식이 곧 명상인가? 그러나 모든 진리의 인식이 다 명상인 것은 아니다. 미적분 원리에 대한 수학자의 사유나 우주 원리에 대한 물리학자의 사유 역시 진리에 대한 사유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명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간 자신이 아닌 인간 바깥의 대상을 거리를 두고 객관화의 방식으로 고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 자신에 대한 사유나 통찰이 명상인가? 그러나 이것도 정확한 규정은 아니다. 의학이나 심리학 또는 철학적 인간학 등도 인간에 대한 사유이지만 명상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학이나 심리학 등은 경험적 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된 논의이기에 제외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명상이란 비과학적 자기 인식을 뜻하는가? 말하자면 다소 몽상적이고 환상적인 사유이면 곧 명상인가? 그러나 그런 것은 주관적 상상 또는 몽상이라고 말하지 명상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명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찾아 명상하는가? 일상적인 감각을 통한 경험적 인식도 아니고, 이성 활동을 통한 객관적인 과학적 사유도 아니며, 그렇다고 허구적 상상도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사유,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명상을 통해 우리가 찾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로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의 「길」)
무엇인가를,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읽어버리고 산다는 그런 상실감이 없다면, 명상이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꼭 찾아야만 한다는 절박감, 바로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라는 그런 절박감이 없다면, 명상이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느 순간엔가 그 잃어버린 것을 내가 다시 되찾게 되리라는 믿음, 그래서 내 삶이 부끄럽지 않게 되리라는 그런 희망이 없다면, 명상이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길은 길로 이어져 있지만 담으로 막혀 있음에 숨 막혀 하면서, 그 담 너머를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담 너머 저편에서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잃어버린 것, 그렇지만 내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 그래서 내가 찾을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명상은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수행의 길이다. 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내가 나를 갖고 있지 않다는, 내가 나를 알지 못한다는 그런 느낌을 말한다. 내가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며, 더 큰 나 또는 본래의 나는 내 등 뒤에 감추어져 있다는 그런 느낌이다. 나를 빠져나가 내가 잃어버렸으나, 담 저편에서 나를 부르는 나, 그 나에 의해서 명상이 시작된다.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나, 그 나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나는 내가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 나는 나 이상이라는 것, 인간이 인간 이상이라는 것, 그 자각이 곧 명상의 시작이다.
의식상으로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리라는 것은 사실 이미 일상에서도 얻어질 수 있는 느낌이다. 저녁 노을을 바라보다 문득 그 빛 속에 빨려 들어가 망아를 겪고 나면, 내가 아는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갑자기 파도처럼 슬픔이 밀려온다거나 근거 없이 화가 치민다거나 감당하기 힘든 욕망이나 좌절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경우도 그렇다. 또는 술에 취해 맨 정신으로는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나 행동을 해놓고 술 깨고 나면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든가 아니면 밤의 꿈속에서 평상시와 달리 극도로 괴로워한다거나 행복해한다거나 하는 경우들도 그렇다. 그러므로 ‘내가 나 이상’이라는 것이 꼭 더 큰 가치의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모르는 나 이상의 그 무엇은 신성神性일 수도 있지만 물성物性이거나 동물성일 수도 있다. 혹은 그것들은 사실 심층에서 서로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가 모두 원자적으로 고립된 의식의 섬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나 이상’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런 예감을 갖게 한다.
내가 나 이상이라는 것, 인간이 인간 이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단지 자연과 분리되고 타인과 분리되고 신과 분리된 존재, 그저 우주 만물 중의 한 개체, 전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그런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체 존재는 그 근원에 있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 하나의 근원이 바로 만물 안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그런 생각이 마음속에 밀려올 때, 명상이 시작된다. 명상이란 바로 내 안에서 나를 살게 하는 그 근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나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명상을 통해 우주와 자연과 신과 하나가 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아와 세계와의 근원적 합일, 인간과 신과의 궁극적 합일을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 명상의 궁극 지향점이다. 그러므로 명상에서 나를 찾는다는 것은 곧 우주와 하나된 나를 찾는다는 것이고, 결국은 근원적 하나를 찾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수행을 통해 이전까지의 제한된 경험적 나를 초월하는 체험은 모두 명상에 속한다. 그렇지만 일상적인 나의 분별적 에고의 틀을 벗어나되, 타력에 의한 것은 명상에 속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술이나 마약 또는 최면술에 의한 망아 상태는 명상이 아니다. 스스로의 정신력에 의해 에고를 벗어나 신과 하나 되고 자연과 하나 되고 우주와 하나 되는 초월의 경험이 곧 명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