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와 다케시마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영토를 둘러싼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쿠릴 열도(치시마 열도), 독도(다케시마),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세이사 제도(시사 군도, 파라셀 제도) 등이 그 현장이다. 이 갈등은 역사, 자원,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해결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의 영토 문제
일본은 러시아, 한국, 중국, 타이완 등과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다. 하모마이 제도, 시코탄 섬, 에토로후 섬, 쿠나시리 섬의 북방 영토와 독도는 각각 러시아와 한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모두 자국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면,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센카쿠 열도는 중국과 타이완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의 추진 과정에서 고대사 왜곡 논쟁 및 이와 관련된 영토 문제 등이 불거졌다.
중국과 타이완, 베트남은 남중국해에 떠 있는 작은 산호초 섬을 둘러싸고 영토 갈등을 빚고 있다. 각국은 이 섬을 세이사 제도, 시사 군도, 파라셀 제도라고 부르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중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이 섬은 일반 주민이 거주하지 않아 섬 자체로는 거의 가치가 없다. 그러나 광대한 배타적경제수역 안에 석유를 비롯한 해양 자원이 많아서 각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영토 분쟁 중 해결된 사례도 있다. 중국과 옛 소련은 헤이룽 강(아무르 강) 지류에 있는 전바오 섬(다만스키 섬)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였다. 한때 대규모 군사 충돌로 두 나라가 핵전쟁을 포함한 전면전을 벌일 뻔했지만, 1991년에 중소국경협정이 체결되어 전바오 섬이 중국에 귀속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남은 세 섬에 관해서는 계속 협의해, 2004년에 두 나라 정상이 최종적으로 중러국경협정을 체결하고 ‘역사적 쾌거, 쌍방의 승리’라고 선언했다.
독도는 어디에 있는가
동해 가운데에 있는 독도는 동도, 서도와 작은 암초 수십 개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에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고 있어서 어족 자원이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다. 행정구역상 한국에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일본에서는 시마네 현 오키노시마 초에 속한다.
한국에서 독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은 울릉도다. 6세기 초 신라가 이 섬에 있던 우산국을 정벌했다. 울릉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여진과 왜구의 침탈을 자주 받았다. 한편 일본에서 독도와 가장 가까운 섬은 오키 제도다. 이곳은 크게 남쪽의 도우젠島前과 북쪽의 도우고島後로 나뉘며 예부터 정치범의 유형지로 알려졌다. 에도시대에는 막부의 직할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현재 시마네 현에 포함된) 마쓰에 번이 파견한 관리가 지배했다.
왜 두 나라는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할까
한국과 일본은 모두 독도를 다양한 근거로 자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한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문제들을 살펴보자.
첫째, 사료의 해석을 둘러싼 대립이다. 조선 시대 지리서인 『세종실록지리지』(1454)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첨부된 지도에서 ‘우산도’는 울릉도와 거의 같은 크기로 그려졌으며 한반도와 울릉도 사이 (울릉도 서쪽)에 자리하는 등 전혀 실재하지 않는 섬이라며 독도가 아니라고 한다.
1877년, 사마네 현이 행정구역을 획정하기 위해 ‘울릉도 외 또 다른 한 섬’을 시마네 현에 포함할지 여부를 일본 정부에 물었다. 이때 일본의 최고 권력기관이던 다이조칸大政官에서 ‘울릉도 외 또 다른 한 섬에 대해 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는 지령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또 다른 섬’이 독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일본 측은 그것이 독도를 명확하게 지칭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41호를 내려 울릉도를 울릉군으로 승격하고 ‘울릉도 전체와 죽도, 석도’를 자국의 영토를 규정했다. 한국 측은 이 칙령에 나오는 석도가 독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은 ‘석도’를 울릉도 바로 옆에 있는 ‘관음도’라고 주장한다.
둘째, 1696년 일본에 건너갔던 안용복이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다. 한국은 1696년에 안용복이 울릉도에 침범한 일본 어민들에 대한 항의로 ‘조울양도朝鬱兩島’라는 표지를 뱃머리에 달고 일본에 건너가 항의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일본 측으로부터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1696년에 에도막부가 울릉도 출어 금지를 결정한 것이 바로 그 확실한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 측은 민간인으로서 있지도 않는 관직명을 사칭한 안용복의 말은 신빙성이 낮고, 에도막부가 내린 울릉도 출어 금지 조치가 독도까지 언급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셋째, 일제강점기 전후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과 관련된 내용에 대한 대립이다. 1904년 독도 주변에서 강치를 잡던 시마네 현 오키 섬 주민 나카이 요자부로가 일본 정부에 다케시마 영토 편입 및 임대를 청원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1905년 1월 내각회의 결정으로 이 섬에 다케시마라는 정식 이름을 붙이고 시마네 현 오키도사 소관으로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시마네 현 지사는 같은 해 2월22일부로 그 내용을 고시했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당시 조치가 대한제국에 아무런 문의나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됐으며 그보다 전인 1900년에 대한제국 칙령으로 한국의 영토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시마네 현의 편입 조치는 무효라고 한다. 일본 측은 국제법상 영토 취득 요건이 해당 토지에 대한 국가의 실효적 점유라면서 영유권을 주장한다.
한국이 일본의 불법 행위를 알게 된 것은 시마네 현 고시가 있고 나서 약 1년 후인 1906년 3월 28일, 울릉도를 방문한 시마네 현 관리들이 울릉군 군수에게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 사실을 알렸을 때다. 그 뒤 이 사실은 서울의 중앙정부에 보고되었고, 대한제국 정부는 즉각 반대하고 항의했다. 하지만 당시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하고 통감부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조치에 대해 외교적 수단에 따른 공식적 항의를 제기하지는 못했다.
독도가 두 나라 사이에서 문제가 된 때
독도가 양국 간의 분쟁이 된 계기는 1951년 9월에 조인되고 1952년 4월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다. 일본은 이 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해야 할 한국의 영토에 독도가 들어 있지 않다며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국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기초 문서가 되는 연합국총사령관 각서 제677호(1946)에 독도가 들어 있었고, 비록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문에 독도가 들어가 있지 않다고 해도 독도보다 더 큰 섬들도 하나하나 적시되지는 않았다며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 한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발효되기 직전인 1952년 1월 18일에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했다. 이 선언을 한 이유는, 해양 주권의 공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로 1945년에 연합국총사령부의 총사령관이던 맥아더가 일본인의 어업 활동 구역을 획정한 제한선이 무의미해져 이를 대신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제한선인 맥아더 라인에는 독도 부근이 한국 수역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일본이 독립해 맥아더 라인이 의미를 잃었으니, 새 경계를 만든 것이다.
‘이승만 라인’으로 불리는 이 선 안에 독도가 포함되자 일본 정부는 같은 해 1월 28일,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 문서를 한국 정부에 보냈다. 이승만 라인 선포 뒤에도 일본 어민들이 동해에서 조업하자, 한국 정부는 어선을 나포하고 선원을 억류했다. 이에 대해 1954년 일본 정부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역사적 근거가 있고, 근대 국제법상 영토 취득의 요건에 합치하기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맞서 한국 정부는 독도가 역사적, 지리적으로도 ‘고유의 영토’라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제3자의 판단은 필요하지 않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두 나라 어민들은 독도를 어떻게 생각할까
1994년에 당시까지 통용되던 공해 자유의 원칙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킨 유엔 해양법 조약이 발효되었다. 연안국에 배타적경제수역을 설정해 자원 개발을 인정하는 대신 자원의 관리와 해양 오염 방지 의무를 부과한 것이다 한일 양국도 이 조약을 비준하고 신어업협정 체결을 논의했다. 그리고 서로 겹치는 배타적경제수역에 대해 한국은 독도와 시마네 현 오키 제도의 중간선을,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의 중간선을 각각 경계로 하자고 주장했다. 그 뒤 양국은 1999년 독도가 없는 것으로 가정한 해역의 중간선 부근을 잠정 수역으로 삼았다.
협정이 발표되자 이 수역에서 어업을 하던 양국 어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울릉도 어민들은 1999년 신한일어업협정에 규정된 잠정 수역 설정으로 어업 활동에 큰 지장을 받고 있다고 여긴다. 1965년 한일어업협정을 적용할 때보다 어업 활동 역역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시마네 현과 돗토리 현 어업 관계자는 잠정 수역이 공동 관리 구역이지만 한국 어선이 점거하고 있어서, 이 주변 해역이 생활의 기반인 어민들이 큰 타격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시마네 현 의회는 이런 상황에 무관심한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자신들의 섬 주변에서 왜 어업을 못 하는가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기 위해, 시마네 현에 독도(다케시마)가 편입된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한 조례를 제정했다. 2005년 3월 16일의 일이다.
미래를 향하여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병합한 지 100년이 되던 2010년 8월, 한국의 KBS와 일본의 NHK가 한일 관계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정치적 대화, 경제 교류, 역사 인식, 독도 등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두 가지 고르라고 했다.
이 조사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에서는 대다수 세대에서 ‘정치적 대화’의 비율이 높은 반면, 한국이 모든 세대는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의 해결’을 가장 많이 선택했다. 요컨대 일본은 현대적인 문제를 과제로 거론하는 반면 한국은 역사적인 과제를 중심으로 거론하기 때문에, 한일 양국이 한일 관계의 과제에 대해서도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독도에 대해 한국인들은 영토 문제만이 아니라 역사 문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은 독도를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병합한 땅으로 인식하고 있다. 1905년에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고 영국과 미국의 도움으로 승리해서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그리고 5년 뒤에는 국권을 강탈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독도는 전쟁 수행을 위해 가장 먼저 편입되고 점령된 땅이라는 인식이다. 즉 한국인들은 일본이 독도를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거 일본이 일으킨 침략 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인들은 러시아의 북방 영토 문제, 중국·타이완과의 센카쿠 열도 문제 등과 함께 독도 문제를 영토 문제로 인식한다.
그렇다면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두 나라 국민들이 독도 문제에 대해 상대편의 주장과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인들은 독도에 대해서 왜 그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지, 시마네 현은 왜 독도의 날 조례를 제정해 여론에 호소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로를 이해했다고 해도 두 나라 정부가 국가의 이해관계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합리적으로 대화해 나가면서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따라서 민간 단위에서 그 역사적 변천을 공유하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독도 문제에 대한 미래 지향적 인식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독도를 생활의 터전으로 살아온 울릉도와 오키 제도 사람들의 목소리를 포함한 지역적인 문제까지 다양한 시각에서 봐야 한다.
지도를 보자. 동해(일본해)는 아시아 대륙과 일본 열도에 둘러싸인 내해다. 수심이 깊고 해류가 순환하기 때문에 인접 국가들의 환경 보전 의식이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한일 양국은 현재의 이익뿐만 아니라 미래의 자손들을 위해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 두 나라가 진정한 이웃으로 거듭나는 것이 미래의 동아시아 안정을 위해서 중요한 과제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중심에 독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