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초기 로마의 사회 구조, 종교, 가치관
로마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인의 인간 관계와 사회 관계의 성격과, 그 관계를 떠받쳐 준 종교적·윤리적 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중심에는 로마인의 가정이 있었다. 가정은 초기 국가의 근간이었고, 그것은 단순히 가족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조직되고 가족들의 수장들인 파트레스patres(가부장들)에 의해 통제되던 공동체였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가족들에 관련된 것이 국가, 즉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문자적으로 공동의 부common wealth 혹은 공동의 것)였다. 그것이 가족들의 파트레스와 밀접히 연관된 것이 국가country에 해당하는 라틴어 파트리아로 확증된다(이 단어는 ‘아버지에 속한’이란 뜻의 형용사 파트리우스patrius에서 파생했다). 로마의 종교와 법은 기본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다스린 파트레스들과 가족들의 종교적·윤리적 관행의 연장延長이다.
가족을 국가보다 중시하는 의식은 로마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적이 없었다. 이것은 로마사가 끝날 때까지 황제들이 왕조에 대해서 품었던 야심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가족은 생명체였으나, 국가는 그렇지 않았다. 시민들이 국가에 유익을 끼칠 의욕을 품은 것은 국가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 얻을 수 있는 입신 양명을 위한 것이었다. 조상들이 승인하는가의 여부가 시민적 행동을 취하는 데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로마인들이 조상들의 임재臨在에 대해 지녔던 생각은 대대로 전수된 전승들과, 로마의 가정을 장식한 데드 마스크death mask들과 흉상들에서 항상 느낄 수 있다). 반면에 가족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과 동시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 양쪽을 다 지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국가의 이익을 희생하려는 강한 유혹이 언제나 대두되었다. 그러므로 국가는 국가를 지배하던 유력한 가문들 사이에서 이익을 놓고 전투를 벌이는 전장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었다.
로마 가족의 역사적 발달. 가족에 해당하는 영어family는 그것의 모체가 된 그리스어 파밀리아familia를 번역할 때 쓰이지만, 이 두 단어는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다. 초기 로마의 가족은 일차적으로는 혈통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비록 후대의 저작들은 파밀리아라는 단어를 혈족 관계의 의미로 쓰긴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혈연이나 결혼의 유대에 의해서 연결된 개인들의 집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혈족, 입양된 식구, 노예, 피해방인 등 동거인들housemates의 집단이었다. 더욱이 가족에는 죽은 식구들의 혼령들도 포함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임재를 느끼고 살았고 그들이 가족의 안녕과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로마인들의 가족은 사람들뿐 아니라 사물들로도 구성되었다. 파밀리아라는 단어의 기원이 그 점을 분명히 말해주는데, 이 단어는 처음에는 주거지 혹은 가옥을 뜻하다가, 나중에는 가옥 공동체house-community를 뜻하게 된 듯하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법적인 의미에서 가산을 뜻하게 되었다. 사람들과 재산이 파테르 파밀리아스라 불린 가부장의 뜻에 따라 처리되었고, 그이 절대권 하에 종속되었다.
파테르 파밀리아스의 지도와 통제와 관리하에 로마인들의 가족은 노동과 재산의 공동체였을 뿐 아니라 국방과 법률과 정부의 체제, 즉 국가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최초의 로마 법은 가족을 자급자족적이고 자기충족적이고 독립된 집단과, 당시에 시행되던 경제 체계라는 좀더 큰 틀 안에서 자치로써 기능하고 국가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경제 단위로 인정했다. 가족은 종교적 조직, 즉 노상爐床 숭배와 죽은 자 숭배를 중심으로 하는 제사 공동체이기도 했다.
혈통(가계)상으로 초기 로마인의 가족은 하나의 가구(household) 안에서 함께 살고 일하는 여러 세대들로 구성된 하나의 확대된 단위였을 것이다. 이 견해는 언어학적 증거가 뒷받침하고, 비교 법학과 민속학이 정당화하고, 역사시대까지 전해 내려온 유물들이 확증하는 듯하다. 플루타르코스는 기원전 1세기 초에 마르쿠스 크라수스Marcus Crassus가 비좁은 아버지의 집에서 이미 결혼한 두 형제의 식구들과 함께 살았고, 그들 전부가 한 상에서 식사를 했다고 말한다. 한 세기 전 사람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lus도 다 성장한 열여섯 명의 남자 형제들의 일원으로서, 이들 모두가 아내들과 여러 명의 자녀들과 함께 작은 한 집에서 살면서 베이이 근처의 작은 농장에서 일했다. 이런 사례들은 분명히 초기 로마인들이 어떤 형태로 가족 생활을 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나중의 잔존 증거들이다.
초기 로마에서는 조야한 연장으로 척박한 땅을 경작하고, 가축을 키우고, 노예수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대가족을 이루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제와 인구가 불어나면서 로마인의 가족은 대체로 식구들이 모두 한 집에서 살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커졌다. 형제들과 아들들이 분가하여 새로운 가구를 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파테르 파밀리아스가 살아 있거나 정신적인 지주로 남아 있는 동안은 그들 모두가 단일 가부장 아래 한 가족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다.
씨족. 원래 로마인의 가족은 씨족gens에 속해 있었다. 겐스라는 그리스어(복수형은 gentes)는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게노스genus와 영어 킨kin과 관련되며, 이 세 단어가 모두 씨족clan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대개 공동의 가명家名과 한 사람의 남자 조상(신, 인간, 혹은 동물)에게서 같은 핏줄을 물려받았다는 믿음을 지닌 일단의 가족들을 말한다.
초기에 로마인들은 저마다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자기 개인 이름praenomen이었고 다른 하나는 씨족의 이름nomen이었다. 후대에 씨족이 규모가 커지고 가족들로 분화되면서 셋째 이름, 즉 가문명cognomen이 덧붙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세 가지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가이우스가 자기 이름이고, 율리우스는 씨족 명이고,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씨족에 속한 그의 가문 명이었다. 그러므로 겐스라는 단어는 로마인들에게 혈통의 유대로 연합된 가족들의 연합체이자, 사실상 고대의 모든 인도유럽어권 사람들 안에 유사점들을 갖고 있던 사회 조직이었다.
몇몇 현대 저자들은 로마 일대의 지역에 원래는 세 종족 - 로마 전승에 나오는 티티에스the Tities, 람네스Ramnes, 루케레스the Ruceres - 이 정착해 살았다고 주장하는데, 아마 이 주장이 옳은 듯하다. 이 종족들이 분산되면서 이들이 정착했던 지역도 파기pagi(pagus의 복수로 마을, 촌락의 뜻이다 - 역주)로 알려진 작은 농촌 행정 단위들로 세분되었다. 그 뒤로 로마인들은 농촌의 파가니pagani(pagus의 거주민, 즉 촌락민 - 역주)와 도시의 몬타니montani(일곱 언덕의 거주민들)로 구분되었다. 파구스pagus 하나마다 씨족 하나가 살았다. 씨족은 구성원들에게 사법권과 견책권을 행사했고, 자체의 영토 곧 피구스 안에서 연대감과 상부상조의 정신을 촉진했다. 도시 국가가 형성된 뒤에 씨족은 자기들의 지도자를 왕의 자문 회의인 원로원에 보냈다.
초창기에 씨족은 자체의 군대를 보유했는데, 그 고립된 잔존 흔적들이 늦게는 기원전 1세기 초까지 남아 있었다. 군대가 적국에게서 빼앗은 영토는 개별적인 가족(가문)들에게 할당되지 않고 공동 영토로 선포된 뒤 씨족들이 차지하도록 남겨졌다. 정복된 영토에 살던 주민들은 크리엔테스clientes(cliens의 복수로 피호인이라고 번역. - 역주)라 불린 종속민들로 전락했다.
훗날 기원전 5세기에 국가가 국방, 치안, 법 집행이 기능을 떠맡으면서 씨족은 지정한 정치·경제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 영향력은 주로 종교 공동체로서 그리고 같은 이름을 지닌 가문들 사이의 정신적 유대감으로 존속했다. 씨족 구조의 유용성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개별 가문의 수장들은 그것을 보호의 근원으로 여기기보다 걸리적거리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가족(가문)은 가장 중요한 집단으로 남았다.
기원전 5세기 중반 - 비록 그 이전은 아니지만 - 에는 세 가지 중요한 발전이 이미 완결돼 있었으나 이미 진행 중에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1) 씨족이 정치와 경제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2) 가문들이 여러 가구들households로 확대되었다. (3) 토지 재산이 개인 소유가 되고 강력한 파테르 파밀리아스의 수중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파테르 파밀리아스. 파테르 파밀리아스는 꼭 혈육상의 아버지이지만은 않았다. 파테르 파밀리아스라는 말은 단순히 ‘한 가구家口의 장’을 뜻할 뿐이다. 친자가 하나도 없어도, 심지어 독신이어도 괜찮았다. 유일한 자격 조건은 국가의 권위 외에 다른 어떤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다른 가족들과 국가에 대해서 법적으로 독립되고 자충족적이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법적인 의미에서 파테르 파밀리아스는 가족이었고, 그가 없이는 가족도 권속도 없었다.
가족내에서 그가 지닌 권한은 국가나 다른 어떤 사회 기관에 의해서 제한을 받지 않고 다만 일시적으로 시행된 도덕적·경제적 조건들에만 종속되었다. 따라서 가족 안에서 그는 법의 원천이었으며, 사회도 그의 명령은 법적인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했다. 그의 권위는 조상들의 관습에 근거했는데, 그 관습을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그에게만 있었다. 그는 권속의 재판관이었고, 그의 지배권은 어떠한 외부의 권위도 제재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그는 심지어 자기 아들들이나 동거인들housemates을 죽이고 고문하고 추방하고 노예로 만들 수 있었고, 가족 재산을 나누거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가부장의 절대권, 즉 파트리아 포테스타스patria potestas가 포악적이거나 압제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는 가족의 다른 식구들, 특히 성인 남자들과 가모mater familias와 상의할 의무가 있었다. 그의 기능은 가족 전체의 복리를 향상시키는 데 있었지, 그것을 남용하여 파산시키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기능의 중요한 부분은 이롭게도 작용할 수 있고 해롭게도 작용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들의 호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파테르 파밀리아스를 사제司祭로 하여, 노예를 포함한 전 가족이 조상에게 기도와 제사를 드렸다. 로마인의 조상 숭배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살아 있는 파테르 파밀리아스의 수호신genius의 숭배였는데, 가부장 곧 가족의 통일성과 영속성의 화신이었다. 그 수호신은 그이 출산력의 화신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이 지도 정신이요 그와 떼어놓을 수 없는 반려요 그의 권위와 힘의 근원이요 그를 그의 조상들과 묶어주는 띠였다. 그는 매일 가정의 노상爐床에서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노상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은 가족의 통일과 영속을 상징했다.
결혼을 통해 낳은 자녀들과 입양을 통해 얻은 자녀들이 모두 그들의 연령과 지위와 상관 없이 그의 뜻에 종속되었다. 그가 공식적으로 해방심키지 않으면, 그의 아들들은 결혼하고 자시의 가정을 꾸민 뒤에조차 그의 권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딸들도 아버지의 승낙을 받아 결혼을 하여 수권手權에의 귀입歸入, conventio in manum이 있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포테스타스(권한) 아래 남아 있었다. 남자의 계보에서는 파테르 파밀리아스가 자기 자녀들에 대해서 뿐 아니라 자기가 살아 있거나 정신적인 역량을 유지하고 있는 차후 세대들에 대해서까지도 이러한 권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파테르 파밀리아스의 이런 권위도 시민으로서, 트리부스 명부에 기재된 투표인으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그의 권리와 의무에 우선하지는 않았다. 그이 포테스타스 아래 있는 아들들도 합법적 결혼을 하고 재산을 취득할 수 있었다. 비록 초기 로마법의 관점에 볼 때 그들은 이 재산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었고, 가문의 토지에 구속력을 갖는 계약을 맺을 수도 없었고, 그들의 노동으로 벌어들인 수입을 개인 용도로 보유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법이 관습의 뒷받침을 받고 국가의 어느 기관에 의해서도 강제를 받지 않던 사회에서 파테르 파밀리아스가 행사한 권력은 그런 것이었다. 종교 계육에 힘입어 전승을 존중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태도가 대개 그의 권위 행사를 야수적 힘의 과시로 만들지 않고, ‘도덕적 명령’이 국가에 의해 ‘법적 명령’으로 대체될 때까지 유일한 정의의 집행자로 공인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더욱이 국가는 로마 가족의 가부장적·권위주의적 성격에서 혜택을 입었다. 가족의 생활은 권위에 대한 복종과 자신의 의무에 대한 수행 의지를 심어 주었다. 공공 생활의 차원에서, 왕과 훗날 공화정 정무관들은 지위에서는 파테르 파밀리아스와 비슷한 권위를 지녔다. 그들은 가족 안에서 파테르 파밀리아스가 수행했던 것과 똑같은 의무들을 서로 다른 가족들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행사했다. 그들은 하급자들로부터 똑같은 복종을 기대할 수 있었다. 전시에는 지휘관이었던 이들은 마치 파테르 파밀리아스가 자기 권위하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 그랬듯이,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들을 처형할 수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그러므로 로마 가족에 의해서 길러진 권위에 대한 복종이 국가 안에서 가족의 이익을 추구하느라 발생했던 지방 분권적 세력들을 억제하는 데 이바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