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언어혁명과 국민의 형성
지금까지 16세기에 이르러 속어로 쓰인 과학서가 등장했다는 점이 학문 세계에서는 매우 중대한 변화였음을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는 기존의 ‘국어’를 사용해 집필됐다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의미에 그치는 게 아니다. 실제로는 그 과정을 통해 원래 민중의 대화체 언어였던 속어가 어휘를 풍부하게 더해 가며 사상과 학문의 기술에도 적합하게 성숙되었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문법의 정비나 철자법의 확정을 통해 표준화가 이뤄졌다. 이것은 ‘국어’로서 자리 잡을 요건을 갖춘 언어가 형성돼 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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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변화, 즉 지역적으로 사용되던 구어였던 속어 방언 가운데 하나가 다른 방언들을 압도하는 유력 언어로 규범화되고, 이것이 나아가 문법적으로 정비되고 표준화돼 ‘국어’로 성장하고, 동시에 어휘가 풍부해져 복잡한 사상 표현에 적합하도록 정제되며, 결국 절대적으로 라틴어만 사용하던 영역에까지 통용되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언어혁명이라고 할 만큼 근본적인 변화였다. 16세기 문화혁명에는 이 언어혁명이 수반됐던 것이다.
이 언어혁명에는 몇몇 요인이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인쇄 서적의 출현이고, 둘째는 종교개혁,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민국가의 형성이 내셔널리즘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첫째 원인부터 차례차례 살펴보자.
국어 형성에서 인쇄 서적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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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유럽에 도시가 등장한 12·13세기에 시작된다. 이 시대에 상업이 발전하고 지배 기구가 복잡해지면서 상업과 행정 언어에 문자언어로서 속어가 침투했다는 점은 이미 살펴봤다. 나아가 이때쯤이 되어 몇몇 도시에 대학들이 설립됐다. 대학은 당시 재발견된 그리스 철학과 과학 -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윤리학 -을 그리스도교 신학에 접목시킴으로써 스콜라학, 나아가 스콜라 문화(즉 학교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대학에서 배우는 학생이나 오로지 전문 지식을 가르치면서 생활하는 ‘지식인’처럼 종전의 유럽에선 보지 못했던 사회계층이 등장했다. 새롭게 등장한 이들 학생과 재속在俗 지시인 또한 문자 문화의 중요한 일익을 형성하게 됐다. 그리고 대학은 말할 것도 없이 서적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이런 변화에 의해 문자 문화가 수도원의 테두리 속에 갇혀 있었던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책의 역사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이때에 이르러 수도원이 필사본 제작을 독점하던 시대는 끝나고, 이른바 필사본의 ‘세속화 시대’가 시작됐다. 13세기에는 대학과 제휴한 민간의 공방에서 필사본 제작이 이뤄지게 되면서 서적 간행이 크게 늘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시대에는 서적이 아지 고급품이요 사치품이었다. 대학 교육에서 하는 강의와 토론도 주로 구두로 이뤄지고 있었으며, 독서는 대개 다수의 앞에서 하는 낭독의 형식을 취했다. ‘문자 문화’라고 해도 ‘구전 문화’를 보완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16세기가 돼 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바꾼 요인의 하나는 15세기 인쇄 서적의 출현이었다. 인쇄술의 발명은 15세기 중반이었는데, 중세 말기 유럽에 전파된 제지 기술의 기반 위에서 서적의 인쇄 출판이 기업화됐다. 그리고 이는 15세기 말까지 불과 반세기 동안 놀랄 만한 속도로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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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쇄 기술(하드웨어)의 출현이 서적 문화(소프트웨어)의 내실에 직접 변화를 일으켰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 나온 인쇄물 가운데 많은 부분은 종전처럼 라틴어로 된 종교 서적이었다. 이 분야의 역사 연구서에 따르면, 전체의 약 45%가 종교 서적이었다. 그 외에 문학서 30%, 법률서 10%, 교과서 10% 정도의 비중이었다. 그리고 1500년 이전에 간행된 서적 전체의 80% 가까이를 라틴어 서적이 차지하고 있었다. 요컨대 인쇄 서적의 대부분은 종전의 필사본에 대한 대체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적의 형태도 필사본을 충실히 복원하는 식으로 돼 있었다. 인쇄본의 요람기에는 고급 미술품과 같은 중세의 아름다운 필사본에 얼마나 가깝게 만드느냐가 중요시됐다. 따라서 책의 대량생산 능력은 중시되지 않았다. 서적 출판은 여전히 중세 서적 문화의 연장선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량생산 능력이야말로 인쇄술이 지닌 진정한 위력임을 결국엔 여러 사람들이 인식하게 됐다. 이에 따라 문자 문화가 대중에게도 개방돼 갔다. 인쇄의 진정한 위력은 16세기에 이르러 현실로 나타났다. 필사본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많은 부수를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서적은 새로운 대량 독자를 창출하게 됐다. 인쇄본은 1520~1540년 종래의 필사본을 본뜬 사본이라는 모텔로부터 탈피해 갔다. 특히 1530년대부터 속어로 된 출판물이 증가하기 시작해 1540년대에는 속어와 라틴어의 비율이 확연하게 역전됐다. 인쇄업자가 서적을 생산할 때 상정하는 독자의 층과 수가 본질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쇄 출판업은 원래 발단부터 시장원리에 지배된 근대적 산업으로 형성됐다. 당연히 출판업자는 “본질적으로는 이윤을 목적으로” 서적을 생산하고 “확실하게 팔리는 작품을 탐욕스럽게 찾아다녔다”고 한다. 때문에 독자 수가 많은 속어 서적의 출판에 가속도가 붙었다. 반면 독자 수가 한정된 라틴어 서적은 기피 대상이 되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라틴어로 쓰인 서적이라도 수요가 있을 것 같으면 줄줄이 각국어로 번역돼 출판됐다. 학술서의 경우도 그렇다…
… 인쇄술은 “국어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국어의 형성과 그 고정화 과정에서 본질적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과 성서의 속어화
이 시기에 속어의 국어화가 일제히 진행된 또 다른 큰 요인은 종교개혁, 특히 성서의 국역 작업에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1522년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해 9월 비텐베르크의 인쇄업자의 협조로 이를 출판했다. 초판은 3,000부 인쇄됐는데, 일치감치 같은 해 12월 제2판이 나왔다. 그 뒤 11년간 고지독일어로 14회, 저지독일어로 7회 중판을 냈다. 루터가 살아 있는 동안 모두 10만 부 이상 인쇄됐다고 한다. 루터는 나아가 『구약성서』도 독일어로 번역했다. 1534년엔 신약과 구약의 완역본이 나와 1622년까지 85판을 헤아렸다. 놀랄 만한 숫자다. 그것도 판을 거듭했던 데 그치지 않고, 계속 개정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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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와 국어의 형성(프로테스탄트 국가들)
종교개혁의 정치적 의미는 초월적인 교황 권력으로부터 국가권력이 자립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중세 유럽에는 이교도에 둘러싸인 단일한 그리스도교 사회라는 귀속 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유럽의 해외 진출과 이슬람 사회의 후퇴에 따라 그런 의식은 엷어지는 대신, 이미 개별 국가에 대한 귀속 의식이 높아지고 있었다. 1492년 그리스도교의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도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같은 해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발견한 것이 그 같은 전환점을 상징한다.
이미 1520년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교도 귀족들에게 보내는 연설』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세속의 권력자는 상대방이 교황이든 주교든 사제든 상관없이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교황은 황제에 대해 어떠한 권력도 지녀서는 안 된다.…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가 담긴 과거의 솔리타에Solitae 조항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리고 루터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에게, 특히 역사적으로 찬미할 만한 고귀한 성품과 변치 않는 신심과 성실함을 지닌 독일 국민에게…”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루터는 교황청을 공격할 때는 음으로 양으로 독일인의 민족적 감정에 호소했던 것이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정치적으로는 교황권에 대한 국가주권의 투쟁으로서 내셔널리즘을 조장했다. 이것은 또한 각국에서 국어 형성을 촉진시킨 요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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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와 국어의 형성(카톨릭 제국)
주권국가의 확립 움직임과 이에 상응해 진행된 국어의 형성은 가톨릭 세력이 강하고 민중의 언어가 라틴계 로망스어였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에서도 명백히 나타났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국어의 형성이 위로부터의 주도로 추진됐다. 실제 “프랑스의 역대 군주들은 번역을 장려했고 국내 통일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도 라틴어를 대신해 프랑스어를 사용하도록 적극 노력했다.” 이것은 이전에 언급했듯이, 일 드 프랑스 지방의 방언인 프랑시안어가 프랑스어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었다. 이 움직임은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5) 때 현저하게 나타난다. 프랑수아 1세가 1539년 서명한 ‘빌레르코트레 칙령’의 제110~111조는 “모든 판결문 그리고 모든 소송 절차는 … ‘모국어인 프랑스어’만으로 작성되고 공포되고 교부되어야 한다”고 돼 있다. 이는 국왕의 판결문에서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추방하려는 의도였다. 기본적으로는 프랑스어(프랑시안어)를 국가 공용어로 선언한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법률과 행정 분야에서 프랑스어가 라틴어를 대체하면서 공용어로 자리 잡는 단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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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와 과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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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연구에 속어가 사용되기에 이른 것은 언어적 차원에서 본다면 단순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이것은 속어가 여러 분야의 전문용어나 라틴어 또는 외국어에서 어휘를 빌려 와 표현을 풍부하게 만들고, 학문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다듬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된 속어는 규범화와 표준화를 통해 국어로 승화되었다. 이는 유럽의 언어와 문화에서 나타난 근본적 변화였다. 또한 문자 문화를 많은 계층에 전파시켜 학문의 기반을 비약적으로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6세기 문화혁명은 그 시기의 언어혁명과 평생을 이루며 진행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