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완전히 상반된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이죠. 모든 것을 잊고 싶을 때, 곤란하거나 어려운 문제로부터─또는 각박한 삶으로부터─벗어나고 싶을 때 음악은 완벽한 도피 수단이 됩니다. 그만큼 정서를 자극하는 예술이니까요.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할 때 기대했던 것처럼, 음악은 우리를 광란의 상태로 몰고 갈 수도 있습니다. 혹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처럼 야만이라는 극단의 감정에 이르게 할 수도 있죠.
다른 한편으로 음악을 공부하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해 배우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음악교육이란 것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다시피 하는 오늘날의 현실이 안타까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육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의 삶을 준비시키는, 즉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고 싶어 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수단입니다. 그밖의 것은 그저 쉽게 배울 수 있는 정보에 불과하죠. 음악을 잘 연주하기 위해서는 이성(머리)과 감성(가슴), 그리고 세속적인 것(배) 사이에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만약 이 세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거나 너무 과하면 그 기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죠. 아이들에게 인간이 되는 길을 보여주는 데 음악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위대한 음악 작품들, 혹은 그보다 못한 음악이라 할지라도 모든 음악은 잘 살펴보면 많은 것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4번은 세상으로부터 도피를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 음악은 도입부에서 B플랫 음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완벽한 심연을 연상시킵니다. 한 대의 플루트, 바순, 호른, 그리고 현악기들의 피치카토 ... 그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요. 이처럼 공허한 느낌의 와중에 오직 하나의 음표만이 홀로 외로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현악기들이 찾아와서 G플랫 음표를 찍습니다. 바로 그 순간, 청중들은 다른 세계로 옮겨진 듯한 착각에 빠지죠.
이런 순간이동의 느낌이 음악만의 독보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첫음을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음, 아마도 이 음은 B플랫인 모양이군." 결국 그 음표는 정말로 B플랫인 것으로 판명되지만, 두 번째 음부터 당신은 더 이상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건 G플랫 음이니까요. 바로 이 순간부터 당신은 인간 본성에 대해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B플랫 장조가 기본 조성이라면, G플랫은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음이죠. 그 음은 고정되고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아 밀실공포에 가까운 느낌을 유발합니다. 어째서일까요? 바로 그 길게 지속되는 음표들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음들 사이로 그만큼 긴 침묵이 끼어듭니다. 음악은 바닥을 치고, 그곳에서부터 베토벤은 다시 음악을 쌓아올리기 시작하며 마침내는 조성을 명확히 규정합니다.
이것은 혼돈으로부터 질서에 이르는 길, 또는 황폐함으로부터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굳이 이런 시적인 묘사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음악이란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만약 당신이 화성적으로 소속감을 느끼고 돌아갈 집이 있다고 느낀다면,─그리고 만약 작곡가로서, 그리고 음악가로서 그런 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면─그렇다면 당신은 황무지에 있는 기분, 어딘가 외딴 곳에 와 있는 느낌, 그러나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내는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은 한편으로는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삶에 관해 여타 다른 분야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죠. 음악은 말합니다. "실례지만,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입니다"라고.
- 에드워드 W. 사이드·다니엘 바렌보임, 『평행과 역설』, 노승림 옮김, 마티, 2011, 47~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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