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화해하여 평화통일 이루자”
이 땅에서 태어나 구십 평생을 가정 민주화를 위한 사회학자로 살아온, 『도서관 할머니, 책 읽어주세요』(우리교육) 주인공인 이이효재 선생님이 날마다 백 번씩 속으로 외는 기도다. 항일투쟁기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과 독재사회와 민주화 과정을 겪으며 치열하게 살아온 할머니는 ‘이제 내 힘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없으니 기도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백 번도 더 하신다고 했다.
이처럼 이 땅에서 남과 북이 전쟁을 멈추고 평화롭게 살기를 간절히 빌고 빌며 살았던 사람이 또 있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그 마을 곳집 뒤, 빌뱅이 기슭 끄트머리 냇가 둔덕에 동네 청년들하고 같이 지은 작은 흙집에서 살다간 권정생이다. 그는 수많은 시와 동화와 수필 속에 남북평화와 통일을 빌고 비는 소원을 담아 넣었다.
권정생은 1938년 일본 동경 사부야 골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권유술은 거리 청소부였다. 아버지가 거리 청소를 하다가 주워온 헌 동화책을 읽으면서 자랐다. 해방이 되어 아홉 살 때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농사지을 땅 한 평 없었다. 먹고 살 길을 찾아 식구들이 흩어져야 했고, 권정생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청송군 화목 장터에 가서 살았다. 1년 동안 화목교회 주일학교와 화목초등학교를 다니다 아버지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서 초등학교를 마친다. 전쟁과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못 가고 나무장사를 하다 열여덟 살 때 부산으로 가서 재봉기 가게,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면서 문학책을 탐독한다. 그러다 열아홉에 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평생을 결핵균과 함께 살았다. 결핵이 늑막과 폐와 신장과 방광으로 퍼졌고, 옆구리에 구멍을 뚫고 오줌을 받아내는 비닐 주머니를 달고 살아야 했다.
오줌주머니를 달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힘든 일을 하기도 어려웠고, 먼 길을 다니기도 어려웠다. 일직교회 문간방에 살면서 청소하고 종치고 주일학교에서 아이한테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살았다. 너무 추워서 겨울이면 귀가 동상에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낫는 작은 방에서 살면서 항상 죽음을 마주보아야 했다. 세상에 태어났다가 그냥 죽는 게 억울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84년 『몽실 언니』(창비) 가 출판되었고, 그 인세로 마을 청년들이 임자 없는 냇가 둔덕에 작은 흙집을 지어 주었다. 그 작은 집에서 강아지와 쥐와 뱀과 새, 온갖 풀꽃과 살았다. 하루 종일 기도하고, 힘이 나면 글을 썼다.
권정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 그냥 죽는 게 억울해서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항일투쟁기와 해방과 전쟁과 독재사회와 민주화운동을 지켜보면서 하고 싶은 말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몸으로 할 수 없으니 억울해서 그 말을 동화로 쓴 것이다. 우리 겨레 이야기를, 우리 겨레가 꿈꾸어야 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아이들한테 이야기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 예수님한테 기도하면 드리던 이야기를.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1969년 월간 「기독교 교육」에서 주최한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모집에 보낸 『강아지똥』이 당선되었고, 안동군 대곡분교 교사로 근무하던 이오덕도 읽게 된다. 이오덕은 1973년 권정생을 찾아가 일직교회 문간방에서 우리 겨레 어린이 삶과 어린이문학이 나갈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밤을 지새운다. 권정생과 이오덕, 그들의 만남은 우리 어린이문학사에서 큰 사건이다. 얼마나 큰 사건인지는 그 둘이 삼십 여년 주고받은 편지모음인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한길사, 2003)를 보면 느낄 수 있다. 둘이 만나면 이야기가 끊일 줄 몰랐다. 권정생이 보건소에서 결핵 약을 받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안동군 구석구석에서 온 아주머니와 할머니들 이야기를 들었던 이야기를 하고, 이오덕이 그 이야기들을 동화로 써 보라고 권했다. 여러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모아서 한 아이가 살아온 새로운 이야기로 태어난 작품들이 『초가집 있던 마을』, 『점득이』, 『몽실 언니』다. 모두 가난한 백성들이 겪은 해방과 전쟁 이야기다. 이번 5월, 100만부 발행을 선언한 『몽실 언니』는 그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열 살 남짓한 몽실이가 겪은 전쟁은 너무나 참혹한 사건이었다. 어머니가 죽고, 새어머니도 죽고, 고모네 식구도 다 죽고, 동네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아버지는 군대에 나가 다쳐서 돌아온다. 그리고 끝내 치료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병원 문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죽는다. 몽실이는 배 다른 동생 난남이를 기르고, 씨 다른 동생 영득이와 영순이를 보살핀다. 몽실이는 그렇게 가난하고 힘든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자기를 힘들게 한 어른들까지 이해하고 용서한다. 그 어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어른들 뒤에서 더 큰 힘이 그렇게 살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더 큰 힘이란 자기들 욕심과 이익을 얻으려고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국군 중에도 나쁜 국군이 있고 착한 국군이 있고, 역시 인민군 중에서 나쁜 사람이 있고 착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람을 사람으로 만날 땐 다 착하게 사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사람의 관계를 아이들도 알기 쉽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1987년,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오덕, 백산서당)이 출판된다. 이 책에 「전래동화, 그 전통 계승 문제」라는 글이 있는데, 전래동화와 창작동화는 하나의 역사로 이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창작동화는 전래동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 문학적 세계를 창조 발전시켜 나가야 옳다고 하였다. 이 책이 나온 뒤에 작품 방향이 크게 바뀐 사람을 꼽으라면 권정생과 서정오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지역 전래동요와 옛이야기를 채록하기 시작하였고, 자기 작품 창작에 반영하였다. 권정생은 안동과 의성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던 전래동요와 옛이야기를 민들레 교회 주보인 「민들레교회 이야기」(최완택 목사)에 보내서 몇 년 동안 싣는다. 나중에 나오는 권정생 옛이야기는 대부분 이 시기에 모은 것이다. 나아가 자기 작품 창작에 반영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에 나오는 『팔푼돌이네 삼형제』(현암사, 1991),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산하, 1994), 『밥데기 죽데기』(바오로딸, 1999), 『랑랑별 때때롱』(보리, 2008) 같은 작품이 그런 경향을 대표하는 동화다. 전래동화 전통을 이어받아 새로운 창작동화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푼돌이네 삼형제』는 1950년 6.25 동란 때 놀라서 도망가 숨어살던 톳재비들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보고 ‘이제 살았다’며 고향으로 돌아와서 겪는 이야기다. 톳재비는 경북 북부지역에 부르는 도깨비다.
『팔푼돌이네 삼형제』는 6월 민주항쟁과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을 옛이야기 형식으로 펼치면서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루어 살아가는 꿈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꿈이 현실에서는 점점 멀어지는 걸 보고 끝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운다. 권정생은 ‘팔푼돌이네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언제까지 울려는지 끝이 없이 울고만 있었습니다. 아마 통일이 될 때까지 이렇게 울고만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불쌍한 팔푼돌이네를 위해서도 어서어서 통일이 되어야 할 텐데……. 정말 통일 되어야 할 텐데…….’(287쪽)라면서 끝을 맺는다. 팔푼돌이는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이고, 권정생 자신이다.
통일과 평화를 빌고 또 빌며, 울고 또 울며 기다리면 권정생은 천 년 뒤에 올 세상을 그린다. 『랑랑별 때때롱』이다. 개구쟁이 마달이와 새달이가 천년 뒤 세상인 랑랑별에 가서 때때롱과 평화롭게 산다. 그리고 랑랑별에서 보면 오백 년 옛날이고, 지구별에서 보면 오백 년 미래가 되는 보탈이네 별에 견학을 간다. 보탈이네 별은 모든 게 기계문명으로 바뀐 세상이다. 현대사회가 정신없이 달려가는 그 끝에서 만날 수 밖에 없는 세상이다. 마달이와 새달이는 다시 지구별로 돌아와 보탈이네 집이 아니라 때때롱네 집처럼 사는 삶을 실천한다. ‘아버지는 작년 여름처럼 올해도 열심히 밭에서 일하십니다. 새달이와 마달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들로 나가 아버지 일을 거들었습니다. 올해는 언덕 비탈밭을 더 일구어 일거리가 갑절이나 늘어났습니다. 뽕나무 밭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함께 밭에 나가 일을 도왔습니다.’(182쪽) 권정생은 천 년 뒤가 아니라 바로 현재 지금 이 땅에서 평화로운 삶을 가꾸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2003년 5월 17일, 그날은 경의선이 시범운행을 하는 날이었다. 꽃으로 장식한 통일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북쪽으로 달리던 때, 권정생은 병원에서 결핵균과 함께 살던 몸과 이별을 했다. 몸은 한줌 재가 되어 집 뒤 빌뱅이 언덕과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 무덤에 반반씩 뿌려졌다. 재는 바람에 날려 하늘로 숲으로 날아갔고, 다 바스러지지 않은 작은 뼛조각은 땅에 떨어져 풀뿌리 사이로 끼어들어 고요히 잠들었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를 글로 썼다. 우리 아이들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을 수많은 동시와 동화로 남겼다.
사실 그는 가난하지는 않았다. 『몽실 언니』 출판 이후로는 여러 곳에 글을 썼고, 그가 쓰는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기 때문이다. 원고료와 인세만으로도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편하고 큰 집을 새로 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작은 집, 약간의 먹을거리, 그리고 추위만 피할 수 있는 옷으로만 살았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자기가 쓴 글로 생기는 돈을 가난한 아이들, 어려운 아이들, 힘들게 사는 아이들한테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다른 세상을 여행을 떠났다. 아픈 몸을 벗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훨훨 날아다닐 거다. 그가 저 세상을 여행하다 잠시 쉴 때면 한반도를 내려다 볼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휴전선이 그대로 있단 말인가? 아니 이젠 바로 전쟁까지 하려고 해? 아이구 답답한 것들아.’ 하면서 쪼그리고 앉아 울지도 모른다. 팔푼돌이네 삼형제처럼 눈물을 펑펑 흘리며. 그런 불쌍한 권정생을 위해서라도 어서어서 통일이 되어야 할 텐데…. 남북평화가 이뤄져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