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여성주의 관련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정의의 투사이자 민주 청년으로 보이던 운동권 선배가 뒤풀이 자리에서 “그래도 나는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이 좋더라.”라는 말을 했고 그 자리에 있던 여자 선배들이 어이없어했던 일이 있었다. 신입생이었던 나는 그저 그들의 대화를 주워듣는 수준이었는데 ‘밥’이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밥은 왜 여자가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우리 집의 남자는 부엌일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다. 자취 생활을 오래 한 탓에 그렇기도 하고 주부인 내가 요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색이 주부인 나는 기본적인 요리는 하지만, 다른 일에 비해 주방에서 보람을 느낀다거나 성취감을 느끼는 정도가 아주 약하다. 반면에 누군가 나를 위해 요리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모습은 무척 감동적이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다듬고 일일이 정성과 손길이 닿아야 하는 일이다. 모두가 흡족한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떴을 때, 쏟아지는 물소리를 배경으로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는 뒷모습이 매력적이라고 느낀 적도 있다.
현실은 위와 같은데 글을 쓸 때는 익숙한 관습, 클리셰Cliché의 남발이라는 우를 범한다. 갈등하던 가족들이 명절날 모여 커다란 교자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화해하는 장면, 아주 익숙한 그 장면 말이다. 모두 함께 밥을 먹고 정을 나눈다는 뻔한 장면은 내 작품에도 반복되는 낭만적 결말이었다.
「마, 마미, 엄마」『블루시아의 가위 바위 보』에 수록, 창비, 2004의 결말은 한 상 가득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이다. 이 작품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기획으로 창비출판사가 주관하여 여러 작가의 작품을 묶은 것이다. 애초 의뢰를 받았을 때, 흔쾌히 수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내가 한국으로 온 결혼이민여성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다문화가정이라는 말도 생기고 여러 인식의 개선이 점차 이루어졌지만 그때는 운동의 초기 단계라고나 할까. 이주여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관련 모임을 꾸리는 것부터가 필요했다. 나는 그저 일주일에 한 번 들락날락거리는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그 시민단체에서 일하던 활동가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주 여성을 피해자로 그리지 말아 달라, 우리를 그저 도움이나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리지 말아 달라. 이것이 나의 한글 공부 파트너였던 뚜엣과 티하의 당부였다. 나는 나의 멘토이자 벗이자 동료인 헤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꿈꾸는 걸 그려보자고, 당장 일어나는 일을 고발하기보다는 이런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걸 어린이들에게 알려주자고. 그래서 밝고 명랑한 이야기가 담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주여성인 엄마가 자녀의 학교에 가서 명예교사를 한다는 것은 지금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블루시아의 가위 바위 보』가 나올 당시에는 1994년 전후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온 여성들이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그녀의 자녀들이 막 학교에 입학하거나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편에서는 결혼중개업체에 의해 결혼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회문제화되기 시작했고 그들이 어린 아기들을 낳기 시작할 때였다. 이주 여성에 대해서는 ‘효도해 줄, 출산문제를 해결해 줄, 한국 사람이 다 되어 줄’이라는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되, 이주노동자인 남성에 대해서는 ‘험한 일을 대신하다가 돈이나 받고 떠나버려야 할’ 즉 언젠가 축출되고 배제되어야 할 존재로 보는 이중적인 시선이 있던 시기였다.
나는 나름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향의 이야기를 지었다고 확신하면서 『블루시아의 가위 바위 보』 에 「마, 마미, 엄마」를 써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결말은 예의 밥상 장면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붉은색 고추장 돼지불고기와 푸른 쌈 채소, 하얀 닭백숙이 꽃밭처럼 차려진 둥그런 밥상은 타자에 대한 화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서로 다른 색, 다른 취향, 다른 문화적 관습이 존중받는다는 의미를 담고자 하였다. 무슬림인 문간방의 세이네 식구들, 베트남 전쟁 참전을 과시하는 끝방 박 씨, 베트남에서 온 수연이 엄마 응웬, 모두가 어우러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밥상은 대체 누가 차렸는가?
수연이 할머니는 박 씨, 세이네, 수연 엄마 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중재하는 어른이자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는 존재처럼 보인다. 다 차려진 밥상 위에 숟가락 한 개 얹는 게 뭐 어렵냐며 모두를 끌어모은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밥상을 차리는 노동을 담당하지 않는다. 밥상은 오로지 수연 엄마 혼자서 차려야 할 일이었다.
결말을 이렇게 낸 작가는, 결국 당대의 사회통념의 한계를 못 뛰어넘은 것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이보다 앞선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 창비, 2001은 첫 장면이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진희 아버지의 모습부터 나온다. 미래에는 양성평등이 실현되고 일과 가정의 일에 남녀 구분이 없어졌다는 설정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 보니 조금 부족하다. 진희 아버지가 메뉴를 고민하고 저녁을 준비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밥상 차리는 일과는 차이가 난다. 사물인터넷이 일상화된 고도의 유비쿼터스 사회의 밥상 차리기는 재료를 주문하고 조리기의 버튼을 누르고 식탁으로 옮기는 단순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희 아버지가 안전한 먹거리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이를 통해 식량 주권 혹은 종자 전쟁의 문제에 대한 환기를 유도한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다. 진희 아버지의 행위는 좀 더 넓은 의미의 밥상 차리기를 담당하고 있다.
『투명한 아이』나무생각, 2015에도 건이 아버지가 저녁상을 차리는 장면이 나온다. 무국적 아동인 눈의 엄마가 실종되었고, 그 엄마를 찾기 위해 건이 어머니가 외출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다. 반찬을 밀폐 통에서 꺼내 접시에 옮길 줄도, 고등어 반쪽이 익으면 뒤집을 줄도 모르는 아버지의 어설픈 모습은 아버지의 밥 차리기가 일상적인 경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중증지체장애인인 고모와 건이가 있지만 이 집안의 밥상 차리기는 온전히 건이 엄마의 몫이었다.
그러나 여러 세대가 세 들어 사는 이 집으로 소외된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보듬을 수 있게 만든 사람은 건이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건이의 할아버지는 비록 돌아가고 안 계시지만 집 한 채를 물려주면서 아들에게 이런저런 책임을 물려주었다. 보람이와 무당 할매가 무작정 이 집으로 들어와 살 수 있었던 것은 건이 할아버지의 예전 행위 때문이다. 더 큰 의미의 밥상 차리기는 건이의 할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 작품은 무국적 아동을 소재로 하면서 ‘아버지’라는 상징적 이미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썼다. 어떤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고 구성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존재를 아버지와 같은, 혹은 남성적 질서를 세우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썼다. 그렇지만 건이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고모 또한 자기 삶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통해 어린이를 보호하는 존재가 꼭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님을, 오히려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어른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필명 따위를 바꾼다고 해서 다른 정체성이 씌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지만, 그런 치기 어린 시도도 필요했다. 어린이책 작가는 이름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작품으로, 더 정확히는 작품 속 캐릭터로 오래오래 기억되고 사랑받는 법이다. 아직 인생 캐릭터를 만나지 못해 지질한 작가일지 몰라도 멈추지 않고 나가는 것, 계속해서 쓰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모성 신화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필요까지는 없다. 어차피 내가 그다지 훌륭하고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진즉에 깨달았다. 버럭 성질내고 유치하고 위선적인 사람이 맞다. 그러나 잘 해보려고 애쓰고 있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험한 세상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작은 사실에 위로를 받아야겠다.
작가로서의 소명이 있고 삶의 원대한 비전이 있지만, 현실은 인세 받아 살림 꾸리기 힘든 현실에 허덕대고 있다. 이건 내가 꼭 작가라서 그런 게 아니라 맞벌이 가정의 대다수가 그렇다고 본다. 밥벌이를 꼭 어느 누군가 책임져야 하나? 잘 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 둘 다 못하면 함께 하면 된다. 밥 차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잘 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 더 좋은 건 모두가 함께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밥을 해결하려면 내키지 않는 기획동화 작업에 참여해야 할 때도 있다.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지만 충분히 익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에 들어가야 할 때도 있고, 내 의도와 다르게 편집진의 요구에 따라 수정과정을 거쳐야 할 때도 있다. 타협하지 않고 지켜내야 할 것도 있을 터인데, 나는 쉽게 타협하고 동의하는 편이다. 달마다 몸의 마법을 거스르지 못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여자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적하기보다는 대화하고 설득하고 포용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의 선택이 늘 옳았던 것은 아니고 후회되는 일도 많았지만, 나를 가로막는 것들에 맞서다가도 결국 나와 한 편이 되어온 것이 여성인 나의 삶이고 또 나의 작품이다.
『나는 수요일의 소녀입니다 ─ 평화비가 들려주는 일제 강점기 이야기』 개암나무, 2015는 저학년 아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동화시리즈로 기획된 책이었는데, 작업을 진행하기가 정말 만만치 않았다. 성폭행 피해 장면을 어떻게 어린이책에 표현할지의 문제는 둘째 치고, 이 책을 통해 대체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마음에 걸렸다. 전쟁에 내몰린 자들, 공포를 잊기 위해 미쳐 돌아가던 그 광기를 이해하는 것부터 필요했다. 왜 전쟁에는 여성 폭력이 뒤따르는지, 선량한 청년들이 왜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책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대한이 군인들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저지른 양민학살과 만행에 대해서 우리는 왜 잘 모르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역사를 소재로 한 동화, 특히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자칫 이분법적 구도로 선과 악을 가르고 편협한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시리즈라는 특성을 가진 출판물인 관계로 담고 싶은 내용을 모두 담지 못하고, 마지막 장면에 전 세계의 여성들이 할머니들과 함께 노란 나비를 들고 연대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를 했다.
자칫 어린이들이 남성 대 여성, 악 대 선, 일본 대 한국이라는 도식을 깊이 각인시킬 우려가 있는 글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두려움에 대해 고백하고, 가해자 또한 역사의 기억을 복원할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 가해자의 위치에 섰던 군인들의 두려움과 공포, 그로 인해 저지른 어리석음에 대해 솔직히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기 바란다.
「돌계단 위의 꽃잎」『박순미 미용실』에 수록, 한겨레 아이들, 2010에서 일본인 할아버지를 화자로 택한 이유는 역사를 반성하고 기억한다는 것이 결국은 평화를 위한 연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미동 비석 마을을 소재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처음 취재를 갔을 때, 인상 깊었던 사람은 대성사라는 작은 절의 보살이었다. 무속 신앙이 뒤섞인 여성들의 간절함 속에서 해원과 화해의 메시지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써내기 어려웠다.
이렇게 보면 나에게 있어 여성으로서 느끼는 문제의식은 한 번도 내 작품과 떼어 생각한 적이 없다. 여성으로서의 고된 삶을 살아내는 과정 자체가 내 글쓰기의 여정이었으며 그러한 시선을 어떻게든 담아내려고 좌충우돌 실험하고 실패하고 했던 과정이었다.
★ 이 글은 2017년 9월 2일 개최된 〈어린이문학과 여성주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발제문으로, 어린이책시민연대와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