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대신 필명을 썼던 적이 있다. 안○문은 1996년 「동쪽나라 아동문학상」 당선 소감과 함께 당해 잡지에 작품 발표를 하면서 겨우 딱 한 번만 써먹은 이름이다. 20년 전 그때의 이야기부터 말머리를 풀어 보겠다.
작가 지망생 시절, 글이 안 풀린다 싶으면 이미 작가가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때는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보다는 그저 작가라는 타이틀을 다는 것 자체가 근사하게 보였다. 어릴 적 내가 만화책에서 흔히 접한 작가의 이미지는 빵떡 모자를 눌러 쓰고, ─ 남자라면 파이프 담배를 하나쯤 물고 여자라면 블랙커피 한 잔이 앞에 놓여있겠지? ─ 머리칼을 쥐어뜯는 사람이었다. 고뇌에 찬 몸부림으로 원고지로 종이 돌멩이를 만들어 바닥에 던지는 사람 말이다. 습작 시절 내가 그린 작가의 이미지는 이보다는 조금 달랐다.
함께 동화를 쓰고 합평 모임을 가진 동료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었고 나보다 연배가 높았다. 그렇지만 언젠가 등단이라는 걸 했을 때, 내가 여성 작가인 것을 밝히기 싫었던 이유가 뭘까? 아마도 내 안에 잠재된 질투와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십 대 끝자락, 취업도 못 하고 배도 고팠던 내게 그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아동문학은 여자들이 쓰기 쉬운 장르일 거야. 네 주위를 봐. 중산층 고학력 여성들이잖아. 적당히 애 키워놔서 여유도 있고 세상에 대한 따스한 시선도 있고 돈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는 책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야. 여고 시절 꿈 많던 문학소녀의 기질을 잊지 않고 다시금 꿈을 펼쳐보겠다는 사람들, 그나마 소설이나 시는 어려울 것 같고 만만한 아동문학으로 갈아타 볼까 하는 사람들, 듣도 보도 못한 지방 잡지에 추천받았다고 그 잡지를 무더기로 구입해서는 호기롭게도 책을 돌리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매우 좋아하며 잘 따랐지만 속으로는 별로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들은 매우 선한 아주머니들이었으므로. 그렇지만 그들과 내가 한 묶음으로 엮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진 젊은 청년 지식인의 이미지를 갖고 싶었다는 편이 더 솔직하다.
그래서였는지 막상 등단이라는 걸 하고 보니 필명을 쓰고 싶었다. 굳이 내가 여성이라는 걸 작품도 읽지 않은 예비 독자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지적으로 보이고 근사한 이름, 여성 작가라는 꼬리표에 붙을지도 모를 나약하고 미미한 이미지를 지워줄 이름이 갖고 싶었다. 그런데 내 이름 석 자는 너무 평범하고 여성스러웠다. 소녀 취향의 문학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줄 이름,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 혹은 문학세계를 드러내고 빛내줄 이름, 유약하고 소박한 세계를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고 항변할 이름이 필요했다. 오만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이런 뜻 저런 뜻 거창한 의미를 갖다 붙인 이름을 지었다 지웠다 하길 반복했다. 겨우 정한 이름이 ○문. 안○문이라는 딱 한 번밖에 써보지 못한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딱 한 번 쓰고 폐기한 이유는 내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그런 옷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우습고 자기 부정적인 행위였다. 당시 나는 결혼 날짜를 잡아놓은 상태였고 내 필명은 결혼예정자의 아명이었다. 남성성의 가명을 덧입어 부정적이라고 여긴 내 여성성을 감추려던 행위는 결국 남자의 그늘 아래로 숨는 것에 불과했다. 사랑에 눈멀어 자발적으로 뒤집어쓴 콩깍지 탓이 아니다. 내 인식의 한계가 그까지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쓴 동화작품이 『너 먼저 울지 마』사계절, 1999(2015년 『날아라, 짤뚝이』로 개정되었다. 이후 인용은 『날아라, 짤뚝이』사계절, 2015 ─ 편집자 주)이다.
주인공 이름 짤뚝이를 지을 때 나름대로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느라 애를 썼다. 출간된 지 20년이 됐지만 지금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가 강연에 가면 이 책을 읽고 질문하는 친구들이 있다. “주인공 이름이 왜 짤뚝이지요?”라고 물을 때마다 제일 처음 작품구상을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짤뚝이는 다리를 다쳤어요. 그래서 다른 참새처럼 총총 뛰지 못하고 짤뚝짤뚝 다리를 절어요.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에 이름이 짤뚝이가 된 건 아니에요. 책에는 친구들이 짤뚝이가 걷는 모습을 보고 놀리느라 그런 이름을 얻게 되지만 작가인 나는 미리 주인공 이름을 정해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잖아요? 우리나라 전통 탈놀이 등장인물 중에 말뚝이라고 있어요. 말뚝이는 지체 높은 양반의 종으로 등장해요. 그런데 이 양반의 잘못을 꼬집고 놀리고 웃음거리로 만들지요. 말뚝이는 강인한 정신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가진 사람이에요. 나는 짤뚝이가 약하고 작은 막내인 데다 암컷 참새지만, 게다가 다리가 불편한 인물이지만 용기와 지혜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내 생애 첫 책의 주인공 짤뚝이와 나를 동일시하고 있었다. 작가의 자전적 체험이 글로 나오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은 특히 더 그랬다. 당시에는 미처 못 깨달았지만, 그때 나의 한계 혹은 사고의 수준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만 보아도 그런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물론 이제 와서 20년 전 내가 지은 등장인물 이름이 잘못되었고 다 고쳐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쓰라고 해도 이렇게밖에 쓸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당시의 나라면 더더욱 그렇게밖에 쓸 수 없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었고.
남성형 등장인물인 큰수리와 작은수리는 짤뚝이의 오빠들이다. 작고 보잘것없으며 흔하디흔한 참새에게 ‘수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다소 과장되다. 수리는 독수리, 참수리, 솔개처럼 부리가 날카로운 큰 새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지만 강인한 힘을 상징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이름을 붙였다. 짤뚝이라는 이름에 비해 거창하고 빛나는 이름이다.
짤뚝이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이자 짝짓기 혹은 결혼 약속을 하는 인물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세계 혹은 세상을 뜻하는 ‘누리’에 훤하다, 넓다는 의미를 이어 붙여 훤누리가 탄생했다. 남성형 등장인물의 이름은 하나같이 거대 서사를 이야기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훤누리, 큰수리, 작은수리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초라한 짤뚝이의 이름이지만, 주인공의 면모가 오히려 돋보이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중요한 조력자이자 주인공에게 삶의 지혜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참대할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참대할배는 해리포터의 덤블도어 교장 선생님처럼 나이 많은, 지혜로운 스승의 역할을 담당한다. 대나무 중에서도 굵고 큰 참대를 이름에 끌어 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익숙한 남성 중심의 서사 관습대로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현자의 이미지를 그대로 답습하는 공식에 충실했다. 어쩌면 지혜로운 노파, 신과 소통하는 영적 능력이 있는 할머니 이미지, 혹은 다른 어떤 것도 가능했을 텐데 그런 구상은 애초에 떠올리지 못했다.
이름을 가지고 여성주의를 고민한다는 게 남들 눈에는 별 볼 일 없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가 적합한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인물이 살아 숨 쉬게 된다. 걸맞지 않는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은 스토리의 부속품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삐꺽거린다.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 여러 중요한 요소가 있겠지만 주요 캐릭터에게 무의미한 명명이 이뤄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였을까. 내 아이들 이름은 의도적으로 최대한 중성적 느낌이 나는 이름을 지었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지은 아이들 이름은 ○인, ○암, ○후이다. 중성적 이름을 지어 성별로부터 오는 차별을 겪지 않게 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여쁘거나 귀여운 공주님’의 탄생을 축하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친척들의 실망과 낙담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겪은 둘째 딸의 서러움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고, 몸의 감옥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일생의 반 이상을 한 달에 며칠씩이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괴롭다. 그러나 신의 섭리는 그렇지 않은 것을 어찌한담. 나는 세 번의 출산 때마다 공주의 탄생을 축하받았으니까.
짤뚝이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겠다. 추운 겨울, 참새들의 먹이 활동은 매우 어려워진다. 몹시 추운 날에는 차라리 나뭇가지에 잠자코 앉아 햇볕을 쬐며 몸에 있는 양분을 아끼는 편이 낫다. 짤뚝이는 햇볕을 쬐다 참대할배와 대화를 나눈다. 참대할배는 어린 짤뚝이에게 삶의 진실을 가르쳐 주는 인물이다. 그는 둥지란 새끼를 낳아 기르려고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며, 혹시 엄마를 만나더라도 엄마와 아기가 아니라 어른 참새 대 어른 참새로서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63쪽)
참대할배는 짤뚝이에게 독립적인 삶을 꾸리고 스스로 성장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참대할배가 말하는 성장의 본질은 결국 ‘엄마 되기’이다. 참대할배는 짤뚝이에게 “이 겨울이 지나고 새 봄이 돌아오면, 튼튼하고 지혜로운 참새만 살아남을 거야. 넌 그중에서 가장 믿음직한 놈과 짝을 지으렴. 함께 둥지를 짓고 알을 낳고….”라며 행복한 꿈을 꾸듯 이야기한다. 이 말은 제대로 된 독립과 성장은 수컷 참새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짤뚝이는 화들짝 놀라며 혼자 살 거라고 선언하지만 이것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다. 미혼 대신 비혼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옭아맨 콤플렉스 때문에 자신을 비하하고 있으며 그 결과 비자발적으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참새의 한살이를 인간의 일생, 특히 여성의 일생에 그대로 대입하자는 것이 작품의 의도가 아닌 것은 당연하다. 그보다는 자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 없는 모습을 통해 미성숙과 유치함을 보여주려던 것이다. 짤뚝이는 인간 아이에게 사로잡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는 시련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해 한층 더 성장하는 기회를 가지게 된 이후에야 훤누리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저 젊고 듬직한 수컷에게 이끌린 것이 아니라 함께 고난을 이겨낸 동반자를 통해 서로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성장의 상징이 ‘결혼’이었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답하기 어렵다. 인류의 오랜 스토리텔링 역사의 무한 변주라고나 할까. 공주는 용감한 왕자를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패턴대로 말이다. 단지 짤뚝이 공주가 주인공이었고 스스로 용감했다는, 아주 작지만 위대한 한 걸음이 있었노라고 쳐주길 바란다.
사실 엄마가 되는 일은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 아기가 이게 뭐야 하고 물을 때, 나는 이 세상이 온통 신비와 환희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2009년을 전후로 동네 도서관에서 학부모 관련 강의와 어린이 독서모임을 진행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 살던 동네와 달리 유난히 교육열이 높은 이 동네 엄마들은 한마디로 ‘아픈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들의 마음과 정신이 아픈 이유는 모두 다 ‘내 자식’ 때문이었다. 엄마가 된 여성은 자신과 아이의 문제를 절대 떼놓고 생각하지 못했다.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족쇄를 채우는 우를 범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엄마’라는 이름에는 위대한 모성의 신화가 덧씌워진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헬리콥터 맘’이니 ‘맘충’이니 하는 혐오 발언까지 나온다. ‘헬리콥터 맘’이라는 말은 사회현상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는 척하지만 바탕에는 극성스러운 여자, 자기 자식만 감싸서 아이 앞길을 가로막는 어리석은 여자라는 부정적 인식이 깔린 말이다.
『엄마는 학교 매니저』주니어김영사, 2014는 “이게 다 너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독하고 제어하는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자는 것에서 출발했다. 작품의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은 동네 사람들 속에 많고도 많았다. 신문기사를 뒤지고 해외 사례를 찾고 심리학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성들이 짊어진 고통의 무게가 느껴졌다.
애초에 어린이가 주인공인 이야기, 어린이 스스로가 문제에 부딪히고 그것을 극복해가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초고를 써놓고 보니 주인공인 범수의 이야기보다는 범수 엄마와 범수 아빠가 혹독한 경쟁 사회 속에서 어떻게 버텨나가는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얼마나 고군분투하는지 제시하는 장면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뿐 아니라 범수가 좋아하는 여자 어린이인 수경이도 마찬가지였다. 수경이의 내면을 보여주기보다는 수경이 엄마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훨씬 더 크게 표현되어버렸다.
집필 동기 자체가 동네 엄마들과 만나면서 느꼈던 문제들을 써보고 싶다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쓸 책의 독자는 어린이이기 때문에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풀어내야 했다. 어린이들은 어른의 변명을 듣기 위해 나의 책을 집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범수 엄마는 엘리트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마다하고 자녀 양육을 위해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 자기관리에 철저하며 가정에도 충실하다. 게다가 가사일과 병행하기 위해 새로운 공예기술을 배워 작은 가게를 꾸리고 있는, 그야말로 슈퍼 우먼이다.
이런 범수 엄마를 바라보는 같은 처지의 여성, 즉 수경 엄마의 시선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전업주부인 자신에 비해 그녀는 너무 완벽하다. 내 아이의 학습이나 교내 대회를 위해 팀을 꾸리고 각종 정보를 얻으려면 그 엄마와 친해져야 한다. 하지만 은근한 경쟁심에서 오는 심리적 피로와 나는 왜 뒤처지는 것일까 하는 자괴감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이런 불안과 피로와 자괴감은 자기 아이에게 더 집착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무언가 부족한 어머니로 느끼게 만든다.
나는 초고를 쓰면서 나와 같은 처지의 여성들, 특히 자녀를 키우며 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끔 되는 그들의 마음에 공감했다. 아기를 낳자마자 내 집 문을 두드리던 유아학습교구 판매원들, 온갖 육아서적과 정보들, 그리고 학교 입학 후에 밀려드는 교육 정보와 자녀교육 지침서들은 우리를 한없이 작게 만든다. 왜 자기 자식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우는 애 하나 달래지 못하며, 종일 집에 있으며 대체 무엇을 해놨는지 알 수 없냐고 윽박지르는 무수한 목소리들 앞에서 여성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엄마는 학교 매니저』의 남성 어른은 범수 아빠와 범수의 큰아버지가 등장한다. 범수의 큰아버지는 범수의 사촌 동생이자 동급생이며 주체적이고 당당한 성격의 솔지의 아버지이다. 솔지를 통해 바람직한 여성상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 보니 솔지의 부모님, 즉 범수의 큰집 어른들은 자녀들을 대하는 태도가 너그럽고 상대적으로 편안한 가정의 모습으로 그렸다.
반면 주인공 범수의 집은 매사 똑 부러지는 성격에 완벽한 엄마와 그에 못지않은 아빠가 가족 구성을 이룬다. 범수의 아빠는 둘째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죽어라 공부한 덕에 시골 출신이지만 일류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입사했으며 중독에 가까울 정도에 회사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다. 취미로 시작한 테니스도 지기 싫어서 죽기 살기로 연습하고, 경기를 핑계로 타부서 직원과의 업무적 협조를 고민하는 인물이다. 범수 아빠의 이런 성격은 자기 아들에 대해 못마땅한 평가를 내리게 한다. 아들은 성취동기가 부족하며 노력해보지도 않는 게으름뱅이로 보일 뿐이다. 자신의 로드맵이나 경험에 훨씬 못 미치는 것 같아 보이는 아들이 그에게는 답답하며 그 실패의 원인을 아내에게 돌려 버린다. 남성 어른은 이야기의 주변부 배경으로 밀려나고, ‘극성스러운 엄마 대 숨 막히는 아이’라는 지극히 식상하고 뻔한 구조가 한 번 더 되풀이된 것이다. 남성 어른은 솔지 아버지처럼 한없이 너그럽거나 범수 아버지처럼 여성이 한 일에 대해 이때껏 무관심하다가 느닷없이 평가하고 호통 치는 인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사실은 삭제한 부분이 더 많았던 이 초고에는 나의 본심이 들어있다고 본다. 막상 책으로 출간될 때는 독자를 고려하고 가독성을 최우선으로 쳐야 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덜어내야 할 때가 많다. 오히려 초고에는 작가 자신의 내면이랄까 솔직한 심정이 잘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모성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나에게 보내는 찬사이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숨 막혀요. 나도 처음부터 엄마 노릇 잘 할 리가 없잖아요, 제발 “어미가 돼서 그것도 하나 못 하…”냐는 말 따위로 나의 목을 조이지 말아 달라고 따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 죄도 없는 어린이들에게 그런 항변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내가 쓰고 있는 책은 어린이들의 읽을거리인데, 어린이들이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아이들이 어미에게 젖을 달라 하고 칭얼대고 안아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우나 고우나 어린이들은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따르는 돌봄의 노동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엄마, 할머니, 이모 등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한다면 더 불공평하다. 특히나 모성이라는 신화에 대해 의심조차 해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폭력적이다.
어린이들이 『엄마는 학교 매니저』를 읽을 때 이런 생각이 들기를 바랐다. 엄마가 정해주는 틀에 꼭 맞춰서 살지 않아도 돼, 휴대전화 대화창처럼 네모난 틀 안에서만 갇혀 있지 않아도 돼 라는 생각이 말이다. 휴대전화 단축 번호 ‘1’로 엄마와 연결되는 것은 행복하다. 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해서 엄마의 전파 레이더망에 모든 행동이 감시된다면 성장은 불가능해질지 모른다. 솔지가 ‘자기만의 공간’ 혹은 비밀장소를 찾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어린이들이 ‘틈’을 지켜내서 스스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의 적, 성장을 방해하는 반동인물이 다름 아닌 엄마라는 사실이 가슴 아프기는 하다. 작가인 내가 반동인물인 엄마들에게 더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면서 쓸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다.
(계속)
★ 이 글은 2017년 9월 2일 개최된 〈어린이문학과 여성주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발제문으로, 어린이책시민연대와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