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은 “평등해야 안전하다”라는 말과 함께 거리로 나서서 한국 사회의 ‘강간문화’와 싸우기 시작했다. 강간문화란 “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을 말한다. “강간문화는 여성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서 지속되며, 그럼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를 낳는다.”1 남성이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하고 그것을 ‘여성의 탓’으로 돌려, 그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고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것. 그런 것이야말로 강간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여성들이 강간문화와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한 사회에서 여성이 성/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여성의 탓이 아니라 가부장제라는 문화적 구조의 탓임을 직시하고, 이에 저항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김명남 옮김, 창비, 2015, 191쪽.
그런 대중적 각성의 시간으로부터 1년이 흘렀다. 한국 사회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기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전하거나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안 좋은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지난 8월에는 몇 가지 충격적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중 하나는 BJ 갓건배 사건이다. 여성 게이머이자 유튜버인 갓건배는 기존의 게임 플레이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했던 언어폭력과 성희롱을 그대로 ‘미러링’하는 것으로 유명한 게이머다. 요즘 온라인 게임들 중에는 음성 채팅을 하면서 플레이하는 작품들이 꽤 있는데, 목소리가 드러나는 탓에 성별도 쉽게 노출되었고, 게이머가 여성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온갖 성희롱과 언어폭력이 그 게이머를 향하곤 한다. 갓건배는 이를 미러링했을 뿐만 아니라 게임 실력도 출중했던 탓에 많은 남성 게이머들에게 “여자에게 지는 굴욕”을 안겨주었다. 이에 8월 10일, 남성 게이머이자 유튜버인 김○○은 유튜브 생방송 중 “갓건배의 주소를 알아냈다. 죽이러 가겠다”고 말한다. 갓건배에게 게임을 지고 조롱당한 것에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김○○의 유튜브 계정의 팔로워 수는 약 6만 명 정도. 이 방송의 실시간 시청자는 7천 명이었다. 결코 적은 수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 ‘살인 예고’를 보고 있었고, 대다수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몇몇 시청자들의 신고로 결국 김○○은 체포되었지만, 벌금형 5만 원을 받고 훈방 조치되었다. 진선미 의원을 비롯 많은 여성들이 “여성의 목숨값이 고작 5만 원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이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갓건배 사태가 터졌던 같은 날,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모티프로 한 영화 『토일렛』의 개봉 소식 역시 알려졌다. “모든 것은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분노 때문이었다”라는 카피를 가지고 소개된 이 작품은 마음에 드는 여성들에게 말을 걸었다가 (또다시) 조롱당한 남성들이 여자들을 납치해 강간하고 죽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강남역 사건이 일어난 지 고작 1년 3개월 후. 한국 사회는 이 사건을 “우발적 분노”로 포장하는 콘텐츠를 선보인 것이다.
아프리카 TV의 한 방송 때문에 일어났던 왁싱샵 살인 사건, “내가 갓건배를 죽이러 갈 것인데, 시청자들이 10만 원을 모금해 주면 내일 죽이러 가고 20만 원을 모금해 주면 지금 죽이러 가겠다”고 말했던 BJ 김○○의 살인 협박, 그리고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라는 가장 자극적인 소재를 선택하고 그 살인을 재현함으로써 영화를 팔고자 했던 『토일렛』까지. 이 사건들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 심지어 살인이 문화 콘텐츠가 되고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종의 ‘여혐 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혐 시장은 10대 남성들에게까지 소구되고 있다.
갓건배 사건의 경우, BJ 김○○에게 호응하고 유사한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한 사람들 중에 10대 남성이 적지 않았다. 경향신문에서는 8월 9일~10일 유튜브에서 ‘갓건배 저격’을 검색했을 때 뜨는 총 176개의 동영상 중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으로 보이는 얼굴이 공개된 영상이 17개였다고 밝혔다.2 10대 청소년은 일간베스트일베와 같은 남초 커뮤니티와 온라인 게임, 그리고 ‘야동’ 등 디지털 공간에서 ‘남자됨, 남자임’이란 무엇인가를 학습하고, 그렇게 형성되는 남성성에는 여성에 대한 멸시와 차별, 그리고 무엇보다 폭력이 기입되고 있다.3 물론 이런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비단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에만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2 윤승민·심윤지, “유튜버 '갓건배' 논란에 동조한 남자 초등·중학생들”, 『경향신문』, 2017.08.11.
3 최태섭, 「Digital Masculinity: 한국 남성청(소)년과 디지털여가」, 최태섭·허윤 외 『그런 남자는 없다』, 오월의 봄, 2017
이런 상황이라면 “기본적인 소양으로서 성평등을 비롯한 다양한 평등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전면적으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초기 생애 주기에서 젠더를 학습하고 훈육 받으며 형성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동화를 비롯, 그 동화를 원전으로 하는 다양한 미디어 텍스트에 대한 페미니즘으로 읽기, 혹은 페미니스트 비평의 가능성을 논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페미니즘이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해 페미니스트 영화이론가 쇼히니 초두리Shohini Chaudhuri는 “가부장제 사회, 즉 남성이 지배하고 남성의 가치가 특권화되는 그런 사회구조의 권력을 분석하고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4이라고 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지위를 기본적인 관심사로 삼지만, 그들의 역학 관계 분석 안에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다른 피지배 집단들도 포함된다.”5 초두리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보자면, 사실 갓건배 사태는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에만 그친다기보다는 기득권의 소수자에 대한 폭력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쇼히니 초두리, 『페미니즘 영화 이론』, 노지승 옮김, 앨피, 2012, 19쪽.
5 쇼히니 초두리, 위의 책, 19쪽.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이란 “성차별주의 및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라는 벨 훅스의 말을 함께 기억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이 성차별주의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를 차별로 구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애초에 남성과 여성으로 인간을 구분하는 성별이원제, 즉 차이를 만들어 내는 권력에 대한 문제의식도 함께 들어있다. 뿐만 아니라 남성 안에서의 ‘성적 차이’와 그로 인해 형성되는 억압 역시 주목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백인 남성의 남성성이 인간 문명을 대변하면서 제국주의하에서 지배적인 남성성으로 받아들여질 때, 흑인 남성의 남성성은 자연으로 연결됨으로써 문명이 지배하고 짓밟아도 되는 대상이 된다.
서구의 페미니즘 역사 안에서 보자면 페미니즘 제1 물결은 19세기 말 여성들이 참정권과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정치의 영역에서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요구하는 움직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이 ‘문화의 영역’을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웠던 페미니즘 제2 물결은 “그때까지 비정치적 영역에 머물던 여성 체험의 영역에 관심을 두고 숨겨진 권력 구조들이 가정과 가족, 출산, 언어 사용, 패션과 외양 등에 작동하고 있음”6 을 밝혔다. 말하자면 한 사회에서 남자됨과 여자됨, 성역할,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성별 위계와 차별은 문화를 경유해서 견고해지고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6 쇼히니 초두리, 위의 책, 19쪽.
이런 문제의식은 시몬느 드 보브아르의 입지전적인 페미니스트 고전 『제2의 성』1949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보브아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 책에서 어떻게 남성은 보편인간으로 성장하고 어떻게 여성은 남성을 남성답게 하는 타자이자 ‘성적 차이’로만 존재하는지 밝혀낸다. 가부장제 문화는 남성은 보편으로 여성은 ‘여성이라는 제2의 성’으로 상상하는 것에 익숙하고, 여러 재현을 통해 그런 사고방식을 확장시킨다. 2016년에 열렸던 리우 올림픽 중계 내용들은 보브아르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낡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016년 당시 한국에서는 20~3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2016 리우 올림픽 중계가 막말 대잔치”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면서 네티즌들이 한 인터넷 사이트에 모여 리우 올림픽 중계 당시 나왔던 성차별 발언을 수집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 있었다. “여성 선수가 저렇게 쇠로 된 장비를 다루는 걸 보니 인상적이네요.” 펜싱의 최인정 선수 경기 때 해설자가 했던 말. 펜싱 국가 대표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이 외에도 최인정 선수가 입장하자 “무슨 미인 대회에 출전한 것처럼요.(웃음) 계속해서 미소를 띠고 있는 최인정 선수입니다.” (상대 선수가 피아노 전공이라고 한 뒤) “피아노도 잘 치고 펜싱도 잘 하고, 무슨 서양의 양갓집 규수 같은 조건을 갖춘 선수네요.” 등등의 막말이 쏟아져 나왔다. 외에도 여자 유도 때에는 몽골 선수에게 “살결이 야들야들 한데요.”라고 말했고, 비치발리볼 경기 때는 여성 아나운서가 “리우 하면 뭐가 생각나세요?”라고 묻자 남자 아나운서가 “해변에는 여자와 함께 가야죠. 남자와 함께면 삼겹살밖에 더 먹나요.”와 같은 말을 쏟아냈다. 금메달을 딴 여성 선수에게 ‘위대한 어머니’라거나 ‘○○○ 선수의 여자 친구’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 역시 흔했다. 물론 남성 경기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중계 행태나 보도 행태를 보면 보편적인 스포츠맨은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고, 여성 스포츠맨은 여전히 독특한 볼거리로 다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 선수를 묘사할 때는 ‘선수’에 방점이 찍히고, 여자 선수를 묘사할 때는 ‘여자’에 방점이 찍히는 것. 즉, 남자 사람은 사람이고, 여자 사람은 여자인 것인 셈이다. 이것이 보브아르가 말했던 보편 인간으로서의 남성과, 그 남성에 대한 성적 차이로서만 존재하는 여성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여성 자체의 기량이나 자질보다는 외모나 사회적 관계, 가족 관계 안에서만 파악이 된다. 그리고 이런 성별 위계와 차별은 문화를 통해서 자연스러운 것, 운명과도 같은 것,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구성되고,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그런 방식으로 각인된다.
이를 파악한 페미니스트 문화 이론가들은 문화적 재현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영화나 드라마, 음악, 문학 등이 페미니스트의 관심사이자 분석의 대상으로 등극한 것이다.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는 “주체란 이데올로기의 효과”라고 설명했다. 이데올로기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내에 존재하는 사회를 지배하는 특정한 신념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일종의 “허위의식”마르크스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의식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데, 이처럼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으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억압과 착취의 과정을 ‘자연’이자 ‘필연’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장치들을 알튀세르는 ‘국가적 이데올로기 장치’ISA: Ideological State Apparatus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국가적 이데올로기 장치에는 학교, 가정, 그리고 미디어 등이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이데올로기의 작동이 비단 경제적 계급 관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성적 다수와 성적 소수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위계 안, 즉 그렇게 형성된 다양한 계급 간에도 존재함을 밝혀왔다. 그리하여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계급이 재생산되듯이, 이데올로기는 젠더를 재생산해 온 셈이다. 미디어의 한 종류인 동화는 아동기의 주체 형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계급 재생산을 비롯 젠더를 재생산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 소비하는 문화적 장르로서의 ‘동화’는 서구에서 ‘아동’이라는 개념이 탄생하면서 이 세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필립 아리에스는 『아동의 탄생』에서 유럽의 그림들에서 15~16세기까지 그저 ‘작은 사람’으로 묘사되던 존재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로 ‘아동’으로 묘사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여기에는 ‘애정적 가족의 탄생’이 그 배경으로 작동한다. 산업화와 함께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아이들은 소중한 존재로 등극하게 되고, 이 아이들은 가족의 미래로서 계급 재생산을 위한 투자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서 문화적 실천의 한 형태로서 ‘귀여워하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아이를 ‘귀여워하는 행위’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등장하게 된 문화적 행위인 것이다.
이와 함께 아동문학 시장이 형성된다. 엘리트와 부르주아 계층이 ‘아동’을 계급 재생산의 매개로 이해하면서 아동에게 계급의 윤리와 가치를 훈육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인쇄 자본주의는 이런 욕구와 만나게 된다. 동화들이 점차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내용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18세기, 19세기 베스트셀러의 제목들이 『경고의 이야기, 또는 게으름의 희생자』 『착한 소년과 나쁜 소년』 『팽이의 모험: 채찍질을 당할 나쁜 소년과 자두 케이크를 먹을 착한 소년들의 이야기』 등이었던 것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 시절의 동화들은 ‘어떤 남자’가 되어야 하나와 ‘어떤 여자’가 되어야 하나를 비롯한 성적 규범들 역시 담고 있었다.7
7 『라푼젤』이나 『개구리 왕자』 등, 그림 형제가 독일 전역을 다니면서 수집했던 동화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등의 청교도적 규범을 강화시켜온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소녀들을 대상으로 ‘여성됨’ 혹은 ‘여성다움’을 교육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동화의 영향력은 1930년대 이후 ‘디즈니 시대’를 맞이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유럽의 시공간에 한정되어 있었던 동화의 영향력은 디즈니를 경유해 ‘미국화’되면서 ‘세계화’의 길을 걸었다.8 그리하여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6세 소녀발표자의 조카다는 여전히 1930년대부터 디즈니가 만들어내기 시작한 온갖 공주 인형을 품에 안고 돌아다닌다. 그렇게 백설공주, 오로라잠자는 숲 속의 미녀, 신데렐라, 에어리얼인어공주, 벨미녀와 야수, 포카혼타스, 그리고 엘사겨울왕국 등은 6세 한국 소녀의 ‘소녀됨’에 개입하고 있다.
8 잭 자이프스, 『동화의 정체』,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08.
디즈니가 행한 동화의 ‘미국화’는 원전 동화보다 조금 더 보수화된 내용이었다. 예컨대 1937년 디즈니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백설공주』에는 원작에는 없는 내용들이 추가되거나, 원작에 있는 내용들이 삭제된다.
예컨대 원작에서 백설은 뜨겁게 달군 쇠 구두를 신기는 것으로 마녀를 응징하는 반면, 디즈니 버전에서 백설은 그저 순수하고 착하기만 하다. 마녀를 ‘사악하게’ 응징하는 것 따위는 디즈니 백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편, 원작에서는 별다른 묘사가 없었던 난쟁이의 집은 개판 일보 직전으로 그려진다. 난쟁이의 집이 너무나도 더러운 것을 참지 못했던 (집안일에 능한 현모양처 캐릭터인) 백설은 난쟁이의 집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백설이 난쟁이의 집을 청소하는 동안 난쟁이들이 광산에서 노동요를 부르며 다이아몬드를 캐는 장면이 동시에 보여진다. 사적 영역에서 재생산 노동을 하는 여성과 공적 영역에서 생산 노동을 하는 남성의 성별 분업은 백설과 난쟁이들의 노동 재현을 통해 강조된다. 더불어서, 원작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구원자로서’ 왕자의 역할이 부각된다. 잭 자이프스는 『동화의 정체』에서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미국 내셔널리즘을 전파하려고 했다고 밝힌다. 그는 이어서 『백설공주』라는 작품에서 강조된 것은 “불굴의 의지, 고된 노동, 헌신, 신의, 정의”이며, 이를 통해 디즈니는 “건강한 근로와 가정의 이미지를 제공하고자 했다”고 분석한다.9
9 잭 자이프스, 『동화의 정체』,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08.
그렇다면 기실 동화를 통한 젠더의 재생산이란 비단 성별 정체성을 형성하는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가 만들어 내는 ‘만들어진 성’으로서의 젠더란, 근본적으로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와의 관계 안에서 구성되는 것인 셈이다. 계급의 문제와 젠더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기도 하다.10
10 이에 대해서는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최재인 옮김, 갈무리, 2014 참고.
(계속)
★ 이 글은 2017년 9월 2일 개최된 〈어린이문학과 여성주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발제문으로, 어린이책시민연대와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