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에서 벗어나 콘텍스트의 길을 거닐어라
나는 이 그림을 참 좋아한다. 김홍도의 대담하고 자유로우면서도 따뜻한 그림세계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러 강의에서 이 그림을 사용했는데 그 계기는 이렇다. 중고등학생이나 어른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면서 무엇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느냐 물으면 비슷한 대답들을 한다. ‘김홍도, 단원, 씨름, 단오, 생동감, 구도’ 등이다. 자신이 이 그림에 대해 알고 있는지에 대한, 즉 텍스트text에 관한 지식들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정말 김홍도金弘道, 1745~?의 그림인가? ‘TV쇼 진품명품’에서도 그렇듯 진품 여부의 가장 기본적 단초는 낙관이나 수결手決(사인)이 아닌가? 이 그림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그럼 왜 그리 철석같이 믿는가? 텍스트 중의 텍스트인 교과서에서 본 그림이니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다른 걸 볼 생각도 없다. 교과서에 나오면 무조건 믿을 수 있는가? 중세인들이 천동설을 절대진리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낙관도 수결도 없는 이 그림이 진짜 김홍도의 그림이 맞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 까닭은 이렇다. 이 그림은 정식으로 그린(김홍도의 그림은 대부분 비단에 채색한 것들이다) 게 아니라 일종의 스케치이다. 아무리 자기 그림에 자부심이 있는 화가라 해도 스케치마다 일일이 낙관을 찍고 수결을 남기지는 않는다. 그저 앞장에 제목을 적거나 소유자를 나타내는 도장 하나 찍어두면 끝이다. 혹은 뒷장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 그림의 크기는 고작해야 지금의 스케치북보다 조금 더 작다. 그리고 재질도 막종이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의 이 풍속도들은 사생화집을 낱장으로 해체하여 표구한 것이다.
이 그림은 보물 527호로 지정될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정형산수나 인물화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김홍도지만 그의 진가는 사경산수화寫景山水畵와 풍속화에서 드러난다. 독창적인 붓놀림, 색채와 조형감은 가히 최고 수준이다. 그가 풍속화에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영정조 때부터 서민의 지위가 예전에 비해 높아졌고(물론 반상의 구별은 여전히 엄격했고, 복종의 의무는 여전했지만 그 정도는 크게 바뀌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민사회에 안목을 돌리게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세속의 주제들을 그린 풍속화가 당당하게 하나의 미술 장르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홍도는 서민들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들의 삶에서 빚어내는 다양한 모습들을 생동감 넘치고 해학 가득하게 분방하게 그려냈다.
자, 그럼 이 그림에 대해 조금 더 들어가 보자. 그림에 대한 분석적 설명과 지식은 분명 그림에 대한 보다 심층적 이해를 돕는다. 그러나 그것이 때론 그림의 본질을 놓치게 하거나 정작 중요한 가치를 못 보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구도상으로 볼 때 이 그림은 크게는 원 구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구성적으로 운동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제공한다. 또한 삼각형 구도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안정감을 강화한다. 또 다른 분석에 따르면 이것은 X자 마방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방진이란 어느 방향으로 더해도 그 합이 같아지는 구도를 말한다. 주인공인 씨름꾼을 중심으로 대각선으로 보면 그 인물의 합이 동일하다. 오른쪽 위의 구경꾼 다섯과 씨름꾼 둘, 그리고 대각선 맞은편인 왼쪽 아래 구경꾼 다섯을 합치면 모두 열둘이며, 왼쪽 위의 구경꾼 여덟과 씨름꾼 둘, 그리고 대각선 맞은편인 오른쪽 아래 구경꾼 둘을 합치면 모두 열둘이 된다. 재미있는 구성이다. 그저 마음대로 배치한 것 같지만 이렇게 절묘한 균형을 이끌어낸다.
사실 작은 종이에 스물두 명이나 되는 인물을 그려 넣으면서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게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씨름꾼과 구경꾼 사이의 공간이 주는 넉넉함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오른쪽 위의 열린 공간과 왼쪽 아래 엿장수 소년 쪽으로 흐르는 곡선은 바람이 흐를 것 같은 느낌을 줌으로써 시원한 느낌이 들게 한다. 만약 그것을 수평으로 배치했다면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구심적求心的 구성은 밀도를 더해준다. 즉, 주인공 씨름꾼에게 향한 시선들은 이 그림에 집중도와 긴장감을 배가시키고 있다.(아래 그림 참고) 그러나 지나친 집중은 시각적·심리적 피로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한두 개의 시선을 바꿈으로써 배출구의 역할을 한다. 즉 엿장수의 시선이다. 그러나 억지로 그런 시선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 묘사에 따른 것이기에 작위적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엿장수는 엿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구경꾼들에게 시선을 둬야 한다. 그에게는 누가 이기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씨름꾼이 벗어놓은 신발코의 방향도 밖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지나친 집중의 피로감을 상쇄시킨다. 간단한 것 같지만 치밀한 구성의 능력이 놀랍게 발휘되고 있다.
작은 종이 위에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그려 넣으면서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게 할 정도의 필력은 그 자체로 대단하지만 그저 쓱쓱 그린 듯한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 또한 생생하게 살아있다. 붓으로 점 하나 폭 찍은 눈들조차 다 느낌과 표현이 다르다. 대가다운 면모는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붓놀림 하나에서 조차 그의 능력을 실컷 느낄 수 있다.
이 그림에 대한 쉽고도 독창적이며 날카로운 분석은 오주석의 책에서 즐겁게 만날 수 있다.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은 이 그림을 비롯하여 많은 한국의 전통 미술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감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최고의 길라잡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매우 특별한 안목을 제시한다. 나 또한 뒤에 가서 결론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겠지만 그는 이 그림에서 매우 특별한 점을 몇 가지 밝혀내고 있다. 뒷사람을 오히려 진하게 그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그 중 하나이다. 앞사람을 진하게, 그리고 뒷사람을 흐리게 그리는 것이 농담의 법칙에 적합하다. 그런데 그림 위의 인물들을 보면 오히려 뒤에 있는 사람이 진하게 그려진 걸 볼 수 있다. 특히 맨 위의 꼬마가 제일 진하게 그려졌다. 그것은 뒷사람까지 속속들이 잘 보이게 할 뿐 아니라 인물들의 일체감을 느끼게 해준다. 아마도 김홍도는 그 꼬마가 멀리 있어서 작게 보이는 것도 억울할 텐데 흐리게 하면 더 무시된다고 느낄지 몰라서 일부러 더 진하게 그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은 존재, 멀리 있는 존재에 대한 배려로 읽어내는 포인트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주석의 해석은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애정을 느끼게 하는 지점을 잘 포착해낸다. 아마도 그런 점에서 김홍도는 오주석에게 기특하다고 상찬하지 않을까 싶다. 하늘나라에서 두 사람이 서로 고마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오주석의 예리한 시선은 다시 반상의 엄격한 예절을 허무는 자유분방함 속의 인물에 꽂힌다. 바로 오른쪽 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운 청년의 모습이다. 양반들까지 함께 있는데, 그리고 일찍 장가들어 상투는 틀었지만 수염도 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린 티가 역력한데 누워있다니! 오주석은 그 자세를 통해 씨름 경기가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앞에 놓인 돼지털을 얽어 만든 모자만 봐도 그의 신분이 낮은 걸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건 아마도 양반과 상민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단오라는 날의 분위기 탓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도 나무라지 않는 관대함이 있다는, 혹은 있어야 한다는 표현일지 모른다.
누가 이겨요?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을 경험했다. 이 그림을 보여주고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유치원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절반 이상이 엉뚱한(?) 물음으로 내 물음에 되물었다. “누가 이겨요?” 처음에는 나는 살짝 당황했다. 어른들이나 청소년들에게서는 나오지 않았던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물음은 많은 것을 되짚어보게 했다. 과연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저 텍스트의 지식 조각들을 채워 넣기 급급해 하지 않았는가?
이 아이들이 던진 물음을 우리가 따라가 보자. 과연 누가 이길까? 든 사람이 이길까, 들린 사람이 이길까? 어떤 이들(대부분은 남자들이다)은 들린 사람이 이길 수도 있다고 대답한다. 아마도 씨름의 기술을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되치기 기술이다. 그러나 들린 사람이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
이 그림에서 씨름하고 있는 두 사람을 확대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우선 들린 사람의 손 위치를 자세히 보라. 왼손은 상대의 겨드랑이에 오른손은 엉덩이에 있다. 상대를 되치기로 쓰러뜨리려면 최소한 상대의 허리를 정확하게 잡고 있어야 한다. 힘의 중심점을 잡아야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니까 되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길 확률은 별로 없다.
이번에는 든 사람을 보자. 툭 튀어나온 이마, 날카로운 눈매, 툭 튀어나온 광대뼈, 앙다문 입만 봐도 그가 다부져 보인다. 완벽한 들배지기로 상대를 번쩍 든(그것도 덩치가 자기보다 더 커 보이는) 그의 팔뚝에는 근육까지 완벽하다. 당황한 상대방은 눈썹을 찡그리며 난감해 하고 있다. 얼굴이나 팔의 모습뿐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추론할 수 있다. 바로 입성이다. 든 사람의 바지는 그대로 짧은 소매(일하기에 적합한)에 민바지이지만 상대방은 긴 소매(그가 일할 일은 없으니까)에 행전까지 차고 있다. 신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양반이고 다른 한 사람은 평민이다. 그것은 그들이 벗어놓은 신발로도 알 수 있다. 하나는 짚신이고 다른 하나는 발막신, 즉 가죽신이다. 하나는 평민의, 다른 하나는 양반의 신발이다. 평소에 노동으로 다져진 사람과 평생을 노동하지 않은 사람이 붙었다면 씨름에 특별한 재주와 기술이 없는 한 당연히 노동을 했던 이가 이길 확률이 높다. 그러니 이 그림에서는 든 사람이 이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이번에는 왼쪽 위의 사람들로 가보자. 맨 앞의 인물은 신발(역시 발막신이다)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갓(두 개를 포개 놓은 것으로 보아 하나는 지금 붙고 있는 선수의 것인지 혹은 다음다음에 나갈 뒷사람의 것인지 모르지만)도 벗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음 선수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수심 가득한 얼굴이다. 무엇보다 그가 무릎을 모아 깍지 끼고 있는 모습을 보면(등장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그가 그렇다!) 자기편이 진다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 그래서 심란한 것이다. 저절로 무릎이 모아졌을 것이다.
결정적인 힌트는 맨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몸은 앞으로 쏠려있다. 곧 승부가 결정될 상황이기에 긴박감에 몸이 저절로 앞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나 오른쪽 아래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와는 정반대로 뒤로 재껴져 있다. 왜 그럴까? 재미없어서 심드렁해서 그럴까? 아닐 것이다. 들배지기 한 사람이 번쩍 들어 자기네 앉아 있는 쪽으로 상대를 메다꽂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피하려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이 그림의 자세를 설명할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이 씨름 경기에서는 반드시 든 사람이 이긴다.
“누가 이겨요?”라는 질문은 우리를 이렇게 그림의 구석구석으로 끌고 가 많은 이야기를 발견하게 해준다. 묻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것을 물음으로써 보게 된다.
위의 그림에서 매우 특별한 게 또 있다. 바로 땅을 짚은 손 모양이다. 도저히 그런 손모양은 나올 수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특이하게도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만 이런 모습이 보인다. 도화원의 도화사이기도 했던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궁에서 명령을 받아 그린 것은 꼼꼼하고 치밀하다. 만약 그런 그림에서 잘못 그렸다면 곤장을 맞을 수도 있고, 만약 일부러 그렇게 그렸다면 유배형에 처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풍속화에서만 일부러 그렸을 것이다. 오주석의 탁월한 해석은 바로 이 점에서도 돋보인다. 그는 이것을 익살이라고, 보는 사람들 재미있으라고 일부러 장난친 것이라고 해석한다.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누가 김홍도의 그림을 봤다고 떠벌린다면 그 그림 가운데 어디가 잘못되었느냐고 물을 수 있다. 보지도 않았거나 대충 훑어봤다면 대답하지 못하고 망신을 살 것이다. 그러므로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게 되는 사람은 그 잘못된 부분을 찾기 위해 꼼꼼하게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 그림 뜨문뜨문 보지 마셔’ 그런 은근한 압력일 수도 있지 않을까? 화가로서의 자존심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림 속에서 위트 있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김홍도의 의도와 그의 풍자 능력은 더욱 돋보인다.
나는 이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의 그림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보물로 지정될 정도라서 그런 건 아니다. 물론 이 작품이 김홍도의 걸작은 아니다. 오주석 역시 이 그림이 지금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지만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걸작은 아니라고 말한다. 종이만 봐도 그렇지만 당시 일반 서민들더러 사서 보라고 손쉽게, 아주 빨리 그려낸 값싼 그림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그림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의 그것들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뜻은 다른 데 있다. ‘위대한 사기’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구사했다는 점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사기라니?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 이 그림에는 ‘논리적(?) 모순’이 숨겨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거나 볼 때 화가의 시선은 한 곳에 국한되어야 한다. 소실점은 바로 그런 시선을 추적하는 근거이다. 원근법에 근거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렇지 않다. 관점觀點이 여러 개다. 만약 우리가 한 그림에서 두 개 이상의 시선을 발견하게 되면 불편하다. 논리적(물리적, 회화적인 측면에서)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무려 세 개의 시선을 바탕으로 그렸다. 그러니 사기가 아닌가!
그러나 이건 사기라기보다 위대한 천재성이고, 또한 그런 천재성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심성이 돋보인다. 오주석은 이렇게 말한다. “이게 바로 서양 사람들은 도저히 생각하지 못하는, 한국사람들만의 기발한 재주입니다.” 대부분의 그림은 위를 여백으로 남겨둔다. 그건 서양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배경색쯤으로 채운다. 하물며 동양화에서는 ‘여백의 미’를 위해 거의 그렇게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와는 반대로 상단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다. 그 점이 매우 특이하다. 다시 시선의 주제로 돌아가자.
씨름꾼은 한복판에 가장 크게 그렸다. 주인공이니 당연하다. 그 시선은 바로 정면에서 같은 높이로 그렸다. 그래서 생생하고 당당하다. 내 눈높이와 동일하니 현장감이 높다. 그런데 앞서 말한 상단부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바글바글한데도 그리 크게 그려지지 않았다. 거리로 보자면 원근에 따른 것이겠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원근의 착시를 역이용한 것이다. 다른 그림들과 달리 위에 사람들이 몰린 것은 구경꾼들의 표정을 통해 씨름판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정면의 얼굴로 다양한 표정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씨름꾼과 같은 크기로 그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렇다고 원근에 따라 그렇게 작은 그림이 될 수도 없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씨름꾼과 달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닌가! 표정은 그려야 하겠고, 크기는 작아져야 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내려다보면 된다. 그러면 살짝 찌부러뜨려서 작아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슬쩍 원근에 의한 착시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대단하지 않은가? 이런 것을 부감俯瞰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카메라를 위에 두고 찍는 것을 부감법이라고 한다.
그런 남은 또 하나의 시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그려낸 시선이다. 바로 뒤에서 발꿈치를 들고 혹은 작은 의자 위에 올라가서 어깨 위로 살짝 내려다본 모습이다. 이렇게 세 개의 시선이 들어있다. 그런데도 충돌하거나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손댈 수 없는 법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들고 허물면서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화가가 원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김홍도는 분명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보다 뛰어나다. 막종이에 공들이지 않고 그렸다고 깎아낼 여지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공들이지 않고도 이 정도로 그렸다는 것 자체가 그의 회화가, 예술의 경지가 얼마나 탁월한지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미술의 영역에서 본 설명이다. 미술도 물론 인문학의 범위에 들어간다. 그러나 인문학이 미술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미술의 지식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거기에서 어떻게 삶을, 사람을 읽어내느냐 하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그게 진짜 인문학의 힘이고 매력이다.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
만약에 여러분이 양반이라고 치고 단옷날마다 씨름 경기에서 번번이 졌다고 생각해보자. 누가 지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한 번쯤은 보란 듯 이겨보고 싶다. 그래서 이만기 같은 뛰어난 씨름 대가를 코치로 영입해서 겨울에 제주도쯤 가서 전지훈련을 했다 치자. 그가 가르쳐준 기술을 모두 전수받아 마음껏 발휘할 수준이 되었다. 그래서 실제로 상대와 붙어보니 이번에는 이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저들이 힘이 좋다 한들 씨름은 기술로 하는 것이지 힘으로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길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 것인가? 아니, 져 줄 것인가?
에둘러 갈 것도 없다. 그래도 져야 한다! 음력 5월 5일은 양력으로 대략 6월 초·중순이니 본격적으로 농사가 한창일 직전이다. 그래서 하루 날을 잡아 마음껏 놀고 거나하게 먹고 마시며 하루를 즐기는 축제인 셈이다. 그런데 내가 능력이 생겼다고 이겨버리면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을 사람들의 사기는 어쩔 것인가? 양반들 기분 내는 날이 아니다! 농민들 위한 날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 가늠하지 않고 이긴다? 그게 바보짓이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 그 바보짓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사람은 능력에 따라 사는 것이라면서.
또 하나. 대강 승부가 정해진 경기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시합이니 상품이 걸렸을 것이다. 그 상품은 누가 내놓는가? 마을 현감이? 아니다. 양반들이, 지주들이 내놓는다. 씨름 경기에서 이겨서 그걸 다시 되찾아오면 더 행복한가? 승리의 기쁨은 일시적으로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보짓이다. 내가 이만기 같은 뛰어난 씨름인에게 기술을 배운 건 박진감과 긴장감을 최고로 고취시켜 싱거운 승리가 아닌 간발의 승리로 상대가 더 짜릿한 기쁨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사기충천한 그들이 상품으로 내건 송아지나 돼지 한 마리 몰고 가 동네잔치를 열게 해주는 것이 더 탁월한 선택이다. 그게 배려고 연대의 방식이다.
우리가 맨 밑바닥에서 OECD에 가입한 나라가 된 것은 정말 가상한 일이다. 어떤 나라도 그런 기적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정말 뿌듯하고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 그러나 노동시간은 여전히 최장이고 반면에 행복지수는 형편없이 낮으며 소득 또한 다른 가입국들에 비해 낮은 편이다. 달리 말하면 노동효용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열심히 일하는 법만 강요하고 강조했지 정작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데에는 소홀했다.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악질적인 자들은 그것조차 착취하면서 제 뱃속만 채웠다) 오래 일하는 데에만 집중했는데 그 체질을 바꾸지 못한 까닭이다. 그럼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사용자인가, 노동자인가?
노동자에게도 약간의 책무는 있겠지만 주 당사자는 사용자이다. 그런데 왜 노동생산성이 낮은가? 더 이상 저임금에 기대서는 안 된다. 이제는 우리의 임금도 고임금 체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건 옛날 말이라고 치부하겠지만 그건 옳은 지적이 아니다. 고임금을 받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고 절대다수가 여전히 저임금에 시달린다. 노동시간을 늘려야만 이익이 생기는 구조이니 ‘저녁이 있는 삶’은 무망하다. 당연히 삶의 질이 떨어진다. 그런데도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다. 그건 사용자의 몫이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다. 교육도 지속적으로 실시해야 하고 시설도 바꿔야 하며 경영방식도 쇄신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건 일단 돈이 든다. 그러니 꺼린다. 쥐어짜면 되니까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일에 소홀하다. 하지만 마른 수건 더 이상 짜봐야 물 나오지 않는다. 임계점에 달했다. 나만 배불리 먹고 여가 누릴 게 아니라 함께 먹고 함께 누려야 한다. 빨갱이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그런 시스템이 장착되어야 구조적으로 소비가 단단해지고 지속성을 갖게 되며 시장이 활성화된다. 그러면 자연히 기업도 활기를 띤다. 이런 선순환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양보가 아니라 상생이고, 일방적 방식이 아니라 연대의 방식으로 시스템을 바꿔 노동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대전제는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이다. 그게 바로 인문정신이다. 그리고 그런 인문정신으로 쇄신해야 노동생산성을 높여 노동시간은 줄이고 이익은 키워야 한다.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진짜 배워야 하는 건 바로 그런 가르침이다.
여행하다가 오래된 종가를 만날 때 내가 유심히 보는 건 논 한복판이나 귀퉁이에 솔숲 같은 아담한 공간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기품 있는 종가의 종답에는 그런 공간들이 어김없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무심히 지나쳤다. 그저 보기 좋다는 느낌만 들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왜 저 나무들은 저 논에 있을까?’
보기에는 좋지만 그 나무들 뽑아 옥답을 만들면 거기서 벼 한 섬은 나올 수 있지 않은가? 지금처럼 쌀이 남아돌 때가 아니고 추수 후 떨어진 이삭까지 긁어모으던 가난한 시절, 저건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미쳤다. 산을 깎고 돌을 캐내 전답을 만들어야만 했던 시절을 생각해보라. 그게 얼마나 낭비적인 것이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주인이 경치를 보려고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거기에 나가 가끔 낮잠을 자거나 맑은 술 한 잔 기울일 멋진 곳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그 나무들을 뽑지 않았을까?
그건 내 쌀 한 섬보다 내 논일 해주는 이들에게 잠깐이나마 쉴 수 있는 공간을 배려한 것이 아닐까? 여름 땡볕 뜨거운 논둑에서 새참 먹지 말고 솔밭에서 햇볕 피하며 즐겁게 먹을 수 있으라고, 한여름 무조건 일하지 말고 잠깐 그늘에 들어 짧은 낮잠 한숨 매기라고 배려한 것이라 여긴다. 가풍 단단한 종가일수록 이런 모습이 많다. 그게 최소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고 상생의 배려이며 사람에 대한 예의이다. 그게 한 섬의 쌀보다 중요하고, 실제로 노동생산성도 높아지며 존경과 충성심도 커진다. 소탐대실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보고 천천히 가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런 집이 진짜 명가다. 천 석 만 석을 자랑할 게 아니다. 아무리 창고에 쌀 쌓여있어도 베풀 줄 모르고 소작인 쥐어짜서 제 뱃속만 채우는 건 천박한 일이다. 사람의 사람에 대한 예절과 배려, 사랑과 존중.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 적어도 함께 사회를 살아가는 한. 그리고 거기에서 진짜 노동생산성도 높아진다. 그런 게 진짜 실용이다.
세한도의 속살
세한도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어서 아무 때나 볼 수 없었다. 여러 해 지나야 한 번 볼까 말까 하다. 그래서 세한도의 전시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만사 제치고 길게 줄 서서라도 봐야 했다. 다행히 소장자가 국가에 기증했는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사실 그 그림을 막상 보면 그리 대단한 그림도 아니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조금 허망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볼수록 서려 있는 결기와 단호함이 돋보인다. 그림 자체는 단색조의 수묵으로 간결하다 못해 어설퍼 보이지만 일부러 선택한듯한 마른 붓질이 빚어내는 단단함은 어느 그림에서도 찾기 쉽지 않다.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그 좌우로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지극히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텅 빈 여백으로 남아 있다. 가로로 긴 지면에 가로놓인 초가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간략하게 그린 이 작품은 김정희가 지향하는 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극도의 생략과 절제는 추사 김정희의 신세이며 동시에 그의 결기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숙연하고 처연하다. 갈필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용서치 않는 까슬까슬한 선비의 정신이 필선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은 당시 문인화의 대표적 작품으로 전문적 직업화가들이 지나치게 기교를 부리며 인위적 기술과 허위의식에 빠진 것과 대비된다. 이 그림은 미술의 기교나 재주보다 농축된 내면의 세계를 극도의 절제로 표출한 걸작이다. 이른바 문인화가 지향하는 서화일치와 사의寫意의 극치를 보여준다. 유배지에 있지만 끝까지 타협하거나 굴종하지 않은 그의 기개가 드러났다. 그런 가치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었을 것이다.
제목인 ‘세한도’는 《논어》에서 따왔다.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의 푸름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는 뜻이니 선비의 기개와 의리를 강조한 내용이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그린 것으로, 그가 59세 때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림에서 추사 김정희보다 이 그림을 받은 이상적李尙迪(1804~1865)이라는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 김정희는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물심양면 지극정성으로 자신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제자이며 역관인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이 그림을 그려줬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 가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 가지 않는다는 세태를 비웃듯 이상적은 단 한 번도 스승 김정희에게 소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지극히 대했다. 유배지에서 외로울 스승에게 수많은 책과 용품들을 꾸준히 보냈다. 김정희는 그런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림의 제목 바로 옆에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 적혀있다. ‘우선(이상적의 호) 보시게나’라는 고마움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우선 이상적이라는 인물이다.
세한도는 초라한 판잣집에 소나무와 잣나무 고목이 옆에 서 있는 유배지의 환경을 그린 것으로 고목이라 할지라도 사계절 푸른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선비의 지조를 표현한 것이다. 제자의 은공이 고마워 그를 송죽에 비유하였다. 초라한 판잣집이 추사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면 그 소나무들 잣나무들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눈이 온 뒤에 더 푸르른 생명력이 돋보인다 하였으니 제자에 대한 고마움의 상찬이 간결하면서도 깊다. 이 그림에는 김정희 자신이 추사체로 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하는 것이 보통이다. 김정희가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처량한 신세인데도 이상적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런 귀중한 물건을 사서 부치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공자는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라 하였으니, 이상적의 정의야말로 추운 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조라 느꼈을 것이다. ‘세한도발歲寒圖跋’을 읽어보면 그 절절한 고마움과 애틋함이 가득하다.
“또한 세상은 세찬 물결처럼 오직 권세와 이익만 따르는데, 이토록 마음과 힘을 들여 얻은 것을 권세와 이득이 있는 곳에 돌아가 의지하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고 고달픈 이에게 돌아가 의지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듯 하고 있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을 위해 합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성글어진다.’라고 했다. 그대 또한 세상 속의 한 사람인데 권세와 이익 밖에 홀로 초연히 벗어나 있으니, 권세와 이익을 가지고 나를 보지 않은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추운 겨울이 온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아서 추운 겨울 이전에도 소나무 잣나무이고 추운 겨울 이후에도 소나무 잣나무일 뿐인데, 성인聖人이 특별히 추운 겨울 이후의 모습만을 칭찬하였다. 지금 그대도 내게 이전에도 더함이 없고 이후에도 덜함이 없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다면,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한낱 추운 겨울이 되어서도 시들지 않는 곧은 지조와 굳센 절개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이라는 계절에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압권은 바로 다음 구절이다.
今君之於我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 君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지금 그대도 내게 이전에도 더함이 없고 이후에도 덜함이 없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다면,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정희가 세한도에 이런 글을 따로 쓸 정도이니 이상적이 김정희를 어떻게 대했는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중임에도 변함없이 천만리 타국에서 귀한 서적을 구해다주며 정의를 다하는 제자 이상적에게 감격하여 송백과 같은 사람이라며 논어의 한 구절과 이를 표현한 세한도를 선물했다.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스승 추사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려 보낸 선물을 받은 제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림과 함께 적어 놓은 글을 받아 본 이상적은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었을 것이다. 가슴으로 준 스승의 선물을 마음으로 받은 제자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을 터이다. 이상적은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하여 스승의 발문 뒤에 자신의 심정을 글로 적었다. 물론 김정희는 제자 이상적에게 이 그림을 그려주면서 또 다른 의도를 갖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중국의 지인들에게 알려 자신을 구명해 줄 힘이 되기를 은근히 바랐던 것이다. 이상적은 스승의 숨은 뜻까지 읽어냈다.
이상적은 제주에 귀양 간 김정희와 청나라 지식인을 계속 이어준 교량 역할을 담당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받은 해 동지사 이정웅을 수행해 연경에 갔는데, 이듬해 정월 중국인 친구 오찬이 베푼 재회 축하연에서 청나라 명사들에게 그림을 보여주었고, 그 그림과 글을 보고 감탄한 지인 16명이 제발을 적었다. 이상적은 이것을 현지에서 한 축의 두루마리로 표구하여 가져왔다. 아마도 그 명사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비단 김정희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림을 받은 이상적의 사람됨을 읽었을 것이고 그의 존재에 대해 고마워했을 것이다.
김정희는 당대 조선 최고의 가문 출신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 조선후기 양반가의 대표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김정희 집안인 경주 김씨 가문이었다.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가 된 사위였다.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 김한신에게 조카가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 그 조카 김이주가 바로 김정희의 할아버지였다. 김정희의 아버지는 병조판서였다. 일곱 살 때 그가 쓴 입춘방을 우연히 보게 된 채제공이 감탄할 정도였다.
김정희는 박제가에게 배웠고 자연스럽게 실학에 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도 아버지를 따라 북경을 방문했는데 이때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5~1848을 만나 교류하면서 고증학과 금석학을 배웠다. 당시 연경학계의 원로이자 중국 최고의 금석학자였던 옹방강은 추사의 비범함에 놀라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 찬탄했고, 완원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애정 어린 아호를 받을 정도로 각별했다. 김정희는 북경에서 옹방강, 완원 외에도 이정원, 서송, 조강, 주학년 등 많은 학자들을 만났다. 연경학계와의 교류는 귀국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져 만년까지 계속되었고 김정희의 학문 세계를 풍성하게 해 주었다.
1821년 김정희는 서른넷의 나이로 대과에 급제하여 출셋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10여 년간 김정희와 부친 김노경은 각각 요직을 섭렵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김노경이 1930년 탄핵을 받은 것이다. 이른바 윤상도 옥사 때문이었다. 윤상도는 호조판서 박종훈과 유수를 지낸 신위, 그리고 어영대장 유상량 등을 탐관오리로 몰아 탄핵했다. 그러나 군신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왕의 미움을 사서 추자도에 유배되고 김노경은 그 배후조종혐의로 탄핵을 받아 고금도에 유배된 것이다. 김정희는 부친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묵살당했다. 김노경은 일 년 뒤 해배되었지만 부자는 힘든 시기를 겪었고, 부친이 사망한 다음 해인 1839년 김정희는 병조참판에 올랐다. 그러나 1840년 윤상도가 서울로 송환되어 능지처참되자 안동 김문은 아버지에 이어 이번에는 김정희를 공격했다. 김정희가 윤상도 부자가 올렸던 상소문의 초안을 잡았다는 이유였다. 추자도에 유배되었던 윤상도 부자가 대역죄로 처형될 때 참판 김양순이 피의자였는데 그의 진술로 인해 김정희가 사건의 중심인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당시 대사헌이 안동 권문의 김홍근이었다. 자칫 김정희도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다. 그러나 우의정 조인영의 탄원으로 사형을 면하고 김정희는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의 화려한 삶은 끝이 났다. 누가 그런 김정희와 교류하려 했겠는가. 그러나 이상적은 끝까지 김정희에게 귀한 서책 등을 보내는 등 정성을 다했다.
우선 이상적은 김정희의 제자로 한어역관 집안 출신이다. 그는 역관의 신분으로 12번이나 중국을 여행했으며 당대의 저명한 중국 문인과 친구 관계를 맺었다. 그는 당시 연경의 학술과 예술계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그런 혜안으로 교분을 맺으며 청나라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1847년(헌종 13)에는 중국에서 시문집을 간행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의 문학 작품은 다양한 반면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의 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역관으로서 언어에 대한 탁월한 재능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 쓰인 시어가 섬세하고 화려하며 때로는 맑고 우아하다는 평을 얻었다. 〈거중기몽車中記夢〉이라는 작품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명성을 얻었으며 헌종이 그의 시를 읊어 ‘은송恩誦’이란 별호로 불리기도 했다. 이상적은 시 이외에도 골동품이나 서화·금석金石에도 조예가 깊었다. 중국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조선의 금석문을 모아 편찬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부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금석학의 대가인 김정희의 제자다웠다. 그런 연유로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북경에 가지고 가서 청나라의 문사 16명의 제찬題贊을 받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역관이었기에 상당한 부도 축적할 수 있었는데 그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추사를 위해 수시로 청나라에서 들여온 서적과 예물을 보내어 스승의 외로운 마음을 위로하였다. 추사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서 쓸쓸히 늙어 가는 처지에 청나라에서 가져온 최신 서적을 선물로 받고, 제자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한다. 어지간한 정성으로는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대역죄인으로 몰려 귀양 간, 그야말로 끈 떨어진 갓 신세인 사람에게 그러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의 인품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세한도〉 이 한 폭의 그림에는 지조와 의리를 중히 여기는 전통 시대 지성들의 선비 정신이 깃들어 있고, 한 시대 최고의 경지에 이른 그림과 글씨의 어우러짐이 있고, 사대부 스승에서 중인 출신 제자에게 계승되는 문화의 흐름이 암시되고 있다. 이 그림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감동은 물론 김정희의 시와 그림도 있지만 바로 이상적의 사람됨에서 오는 따뜻함이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김병선이 소장하다 그의 아들 김준학이 물려받아 감상기를 적어 놓았다. 이후 민영휘 집안이 소유했다가 일본인 경성제국대학 교수며 동양철학자였고 추사 연구가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에게 팔아넘겨 후지쓰카를 따라 도쿄로 건너가게 됐다.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낱낱이 밝혀낸 후지쓰카는 20세기 초에 한국 인사동 서점가를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청나라 화가 주학년이 김정희에게 보내준 그림 등을 다수 수집하였다.
손재형, 〈세한도〉를 찾아오다
〈세한도〉에는 또 한 사람의 아름다운 열정이 담겨있다. 바로 소전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다. 유명한 서예가이며 고서화 수장가인 손재형은 〈세한도〉가 후지쓰카의 소장품이 된 것을 알고 거금을 싸들고 현해탄을 건너갔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 세계에 흠뻑 빠진 후지쓰카가 김정희의 최고의 작품을 내줄 리 만무했다. 게다가 그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손재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석 달 동안 병석의 후지쓰카를 아침저녁으로 문안했다. 그야말로 신발이 해지고 무릎이 헐 정도였다. 마침내 손재형의 정성에 감복한 후지쓰카는 그 작품을 손재형에게 넘겨주었다. 그렇게 해서 김정희의 〈세한도〉는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후지쓰카는 김정희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모았는데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폭격으로 거의 다 불타버렸다. 손재형이 조금만 늦었어도 어쩌면 그 그림은 잿더미가 되어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손재형은 이후 1949년 당시 독립운동가이자 서화비평가였던 오세창과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였던 위당 정인보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감상문을 받아 17명의 제발에 이어 붙였다. 이렇게 해서 늘어난 제발로 인해 세한도는 그림은 물론 감상평이 함께 있는 작품으로 유명한데 그림 부분 길이가 103cm인데 반해 제발은 무려 11m가 넘는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되찾는 노력을 한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단연 간송 전형필全鎣弼,1906~1962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얼을 뺏기지 않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문화재를 되사는 데에 쏟아 부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지금 우리가 간직하게 된 국보급 예술품이 많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애정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고, 애정이 아무리 많아도 안목이 없으면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전형필의 재산과 열정, 그리고 안목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두고두고 고마워해야 할 선물이다. 그러나 손재형을 아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서예가로서 일가를 이룬 그를 서예를 좋아하는 이들은 존경하고 기억하지만 그가 엄청난 재산을 넘겨주고 상상 이상의 공을 들여 마침내 〈세한도〉를 되찾아왔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다.
아마도 그림을 그려준 김정희도, 그것을 선물 받은 이상적도 손재형에게 하늘에서 고마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손재형의 손을 떠나게 되는데 그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이 그림을 저당 잡혔던 것이 그만 낙선하는 바람에 개성갑부 손세기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 자체는 고작 세로 23㎝, 가로 61.2㎝에 불과할 뿐인, 종이 바탕에 수묵으로 그린 이 작품은 국보여서라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인간됨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지켜낸 후손의 노력 때문에 더더욱 가치를 더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은 사람이다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느낌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해석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십인십색인 것이 사람의 일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사람의 가치에 대한 존중은 다를 수 없다. 위에서 본 그림들을 통해 그것을 하나의 지식과 정보라는 실용적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거기에 담긴, 거기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의 가치를 중심으로 해서 바라보면 그 느낌이 더 짙어진다.
첫 번째 그림인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에서 양반들이 이길 수 있는 형편이라도 져줘야 하는 상황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OECD 가입국 가운데 가장 길다. 그것은 더 이상 자랑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소득 수준은 높지 않다. 여전히 우리의 시장 구조가 값싼 노동력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구조는 어디에서 오는가? 노동자 탓이 아니다.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작은 이익 구조에 많은 인력이 달려서 그것을 나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인력의 개발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하고 경영 시스템도 보다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투자에는 인색한 채 노동시간만 늘여서 이익을 얻어내려는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가치에 대한 투자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무한한 가치를 얻어내고 다양한 정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융합과 창조의 가치에 우선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떤가? 여전히 하드웨어 중심이다. 하드웨어는 당장 돈이 많이 들어가지만 금세 그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다행히 우리 경제력은 어느 정도 하드웨어 투자가 가능할 만큼 커졌다. 그래서 하드웨어 투자에는 인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단 거기에 매달린다. 그에 반해 소프트웨어는 당장 들어가는 돈은 적을지 모르지만 그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문화 체제가 바뀌어야 하고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말로는 소프트웨어 개발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그 풍성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진짜 투자해야 할 분야는 바로 휴먼웨어humanware(사용자 능력, 권한 및 사용자 인터페이스 설계를 강조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이다. 그러나 여기는 많은 투자가 필요하고,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어느 조직도 거기에 투자하려 하지 않는다. 말로는 교육이 백년대계니 떠들면서도 걸핏하면 제도나 바꾸는 통해 학생과 학부모들만 멍들고 개선이 없다. 이런 풍토가 기업이나 조직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람의 가치를 개발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인문학이 단순히 달달한 교양이 아니라 이러한 미래 가치를 새롭게 창출할 매우 중요한 모멘텀 메이커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속도와 효율에만 함몰되어 살아왔다. 그게 통했다. 교육도 전문가 양성에 몰입했고, 세상도 그런 방식으로 꾸려갔다. 수학 시간에는 수학만, 미술 시간에는 미술만 가르쳤다. 그런 전문가들이 사회의 중심 역할을 자처하며 살았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더 이상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이제는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어야 한다. 통솔적 리더가 아니라 조정형 리더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코디네이터로서 역할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리더의 덕목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다양한 삶과 앎을 다양한 방식으로,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오늘날 인문학의 발흥이 일시적인 붐이 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바로 미래의 발전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며, 그 바탕에는 바로 인간의 무한한 가치를 최대로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후반이 속도와 효율의 프레임으로 성장하였다면 이제 21세기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이 마음껏 융합되는 창조의 프레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바탕이 인문학이고, 인문학의 근간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이라는 점에서 지금 우리의 인문학은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그것을 제대로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