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3 from 신혜진
저는 구럼비입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저…… 미안하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제가 뭐라고 이토록 당신들을 아프게 하는지……
자살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미안합니다.
제게 찾아와 준 어떤 분들이 저를 위해 삭발을 하고,
몸 망가뜨려 가면서 밥을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추위에 떨면서 한뎃잠을 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람이 전해 주었습니다.
그게 근거 없는 풍문일지라도 미안합니다.
당신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도 다 제가 여기,
이 자리에 버티고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저는 돌입니다.
예전에는 제 이름을 몰랐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당신들이 저를‘구럼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름이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아실는지 모르지만 제 주변은 대체로 고요한 편이었습니다.
이따금 들리는 소리라 봐야, 잠결에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기분 좋은 소리들이었습니다.
“김치, 김치이~ 해 봐.”
“사랑해, 우리 이 바위처럼 변하지 말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물결처럼 번질 뿐 저를 놀라게 하는 소리는 없었습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아직은 맵찬 바람 불던 이른 봄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습니다.
한쪽에서 다급한 비명 소리도 들렸습니다.
“구럼비이이~ 구럼비야아!”
그땐 아직 제 이름을 몰랐지만 왠지 모르게 저를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아, 나를 부르는 건가? 나에게도 이름이 있었나?
위험하니 피하라는 신호처럼 느껴졌습니다.
눈을 떠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어리둥절했습니다.
막 태어난 아기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이상하고 이상해서 울고 싶어졌습니다.
왜 저 사람은 저리도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을까,
말라붙은 이끼색 옷을 입은 사람이 때렸나?
저 사람은 왜 꽃처럼 생긴 빨간 물건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걸까?
정말이지 모든 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물속에 들어와 내 정강이께를 잡고 알려 주었습니다.
“위험해, 구럼비!”
그는 정확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이름이‘구럼비’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노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따금 찾아와서 유쾌하게 깔깔거리던 관광객이나 아이들과 달라 보였습니다.
그 사람이 낯설어서 무서웠습니다.
저는 돌입니다.
어떻게 피하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웠습니다.
허둥대고 있는 사이 무언가 제 어깨를 쑤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명 소리조차 파묻는 엄청난 소리가 들렸습니다.
들들들들들들들~~
제 온몸이 진동했습니다.
어깨에 구멍이 나는 듯했습니다.
얼마쯤 지났을까요,
말랑거리지도 않고 단단하지도 않은 어떤 것이 상처를 헤집고 들어왔습니다.
누군가 약을 발라 주나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약을 발랐는데도 아픈 어깨는 그저 아픈 채로 며칠이 지났습니다.
오랜만에 봄다운 햇살이 제 어깨에 내려앉았습니다.
따뜻했습니다.
쿠우우웅 쿠아앙 꽝!
약이 천둥소리를 내며 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어깨가 부서졌습니다.
살과 뼈와 피가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너무 아파 저는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습니다.
만 년 넘게 그랬듯 시간은 잘도 흘러갑니다.
그냥 전처럼 조용히 혼자 누워 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프고 억울합니다.
왜 아파야 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
제가 대체 무슨 잘못을 얼마나 했기에 착한 당신들까지 울게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예전처럼 웃으며 찾아올 때까지 버티겠습니다.
제가 살아온 세월 이상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이 악물고 참겠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부디 밥 굶지 말아 주십시오.
따뜻한 곳에서 푹 주무시면서 힘을 모아 주십시오.
할 수 있다면 제 곁에서 함께 버텨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덜 미안합니다,
아니, 고마운 마음이 들 것 같습니다.
—강정 앞바다, 구럼비 올림
ⓒ 이광진 |
NO. 24 from 심보선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을 지키기 위하여
구럼비 바위를 지켜야 하냐 말아야 하냐는 논쟁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게 생태적 가치나 문화재적 가치입니다. 제주도에서 희귀한 바위냐 아니냐, 생태계의 보고냐 아니냐를 가지고 갑론을박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정작 강정 마을 주민들에게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구럼비 바위가 파괴될 때 주민들이 울부짖는 이유는 자신들의 삶이 바위와 함께 파괴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요?
정부와 군대, 전문가 들은 “왜 구럼비를 파괴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연구보고서를 보여 주며 과학적인 평가를 제시합니다. 심지어 “왜 구럼비를 파괴하면 안 되는가?”에 대한 대답도 비록 생태와 환경을 언급하고 있지만 여전히 과학적인 담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정 마을의 주민들은 그 질문들에 과학적 담론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 기억, 역사를 제시합니다. 이때 과학적 담론에 비해 주민들의 답은 언제나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하죠. 소위 과학적인 근거와 안보와 경제라는 명분으로 추진되는 제주군사기지건설 계획은 주민들의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이해 관심에 가해지는 피해를 소위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로 정의합니다. 여기서 논란은 부수적 피해의 규모를 어느 선까지 정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정도입니다. 제임스 C. 스콧은 이와 같은 국가 주도의 계획과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지식의 비대칭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한 계획을 창시한 사람들은 실제 이상으로 자신을 똑똑하고 예측력 뛰어난 존재로 생각한 반면, 계획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실제 이상으로 똑똑하지 않거나 무능한 존재로 간주했다. …(중략)… 계획의 대상으로 삼은 인구집단이 …(중략)… 계획의 추진이라는 목적을 위해 특정한 성별이나 취향, 역사, 가치, 의견 또는 원래의 생각, 전통, 차별적 개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특정 인구집단에 대해서도 응당 기대할 수 있는 특수하고 상황적이고 또한 맥락적인 속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우리는 그런 속성이 당연히 엘리트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_제임스C. 스콧,『 국가처럼보기』, 전상인옮김, 에코리브르, 2010.
지역적 지식local knowledge과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에 의존하지 않은 개발, “계획가들의 역량 바깥에 있는 수많은 우연성”과 “모델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적 혹은 자연적 사건들”(위의 책)을 고려하지 않은 개발은 역사적으로 실패해 왔다는 것이 스콧의 주장입니다. 스콧에 따르면 우리가 결단코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구상에 의거하여 추진되는 모든 계획과 개발은 본질적으로 ‘부실’합니다. 또한 그것을 추진하는 국가와 엘리트 조직은 능력 있고 합리적이기는 고사하고 본질적으로 ‘무식’하고 ‘위험’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래를 전망하며 뭔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은 “할 수 있다”는 확실성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삶에 대한 조금 더 많은 배려, 미래에 대한 약간의 헐거운 기대, 예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조금 더많은 관용과 더불어 약간 더 적은 희망적 사고.”(Albert O. Hirschman, “The Search for Paradigms as a Hindrance to Understanding”, 위의 책에서 재인용), 결국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야말로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재정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강정 마을 주민들이 구럼비 바위 위에서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 삶의 형태를 가꿔 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바위의 폭파는 중지되어야 하고 군사기지 건설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안보와 경제라는 이름의 계획,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다소 확실한 담론이 구럼비 바위 위의 삶, 주민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유구하게 생성하고 작동하고 있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일거에 폭력적으로 덮어 버리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NO. 43 from 황규관
구럼비는 존재의 터전이다
구럼비에 서서 구럼비 바위를 때리다 물러서다를 반복하는 바다는, 모든 생명체를 가능케 했던 영겁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누가 그랬더라. ‘나’라는 개체는 생명의 바다에서 튄 하나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고. 바다는 우리의 정신에 죽음마저도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일지 모른다는 섬광이 지나가게 한다. 이어서 영원한 사랑이란 쉬지 않고 출렁이는 영혼의 상태일 거라는 막막함까지. 작년 여름에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그리고 함께 있으면 내내 웃을 수 있는 문우들과 구럼비에 잠깐 서 있었던 경험은 현실 세계가 아름다운 관계로만 짜여 있지 않다는 평범한 진실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문제는 관계 자체가 아니라 관계의 특정 양식이라는 것. 그래서 어쩌면 싸움마저도 영원할지 모른다는 것. 사랑처럼 대상은 달라질지 몰라도 영혼의 상태로써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말이다.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는 이제 분노를 일으키기보다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끼게 했다. 그래서 이제 시인들은 기도밖에 할 일이 없단 말인가 하는 황망한 심리상태에 도달하고 말았다. 참, 한심하기도 하지. 시란 물건이, 그리고 그것을 제작하는 장인이라는 시인의 역할이 제 가슴만 치는 일이라니. 사실 시인이라는 종족들은 정치적 실패자들인지도 모른다. 지난겨울 작가들이 임진각에서 강정 마을까지 제주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릴레이 종단을 하기도 했지만, 시가 현실을 얼마만큼 바꿔 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간 회의적인 것도 사실이다. 상상력이 존재의 소금이라는 말에 기대고 있는 정도라고만 해 두자. 아직까지도 우리의 생활은 바위 하나의 안위와 꽃 한 송이의 비극에 둔감한 게 사실이니까. 생명과 평화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시는 그래서 뜨거운 허무를 근원적으로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정 마을에 기어이 짓고 말겠다는 해군기지가 품고 있는 진실이 국가의 안보도 아니고 아름다운 항구의 건설도 아님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름다움이 콘크리트로 도배된 강이나 바닷가라는 한심한 미학적 감수성도 그렇지만, 국가의 안보 운운에서는 소름마저 돋는다. 국가가 지켜 주겠다는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누대로 이어져 내려온 강정 마을 주민들과 구럼비의 시간만큼 유전되어 온 생명체들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긴 한가? 사견을 전제하고 말한다면, 시는 비유적으로 말하는 표현양식이 아니다. 시는 차라리 거짓을 알몸으로 관통하는 어리석음이다. 역설적으로 그 어리석음은 국가는 결단코 사람이든 짐승이든 목숨 있는 것들을, 혹은 그것들의 소중한 터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통치하고 있는 이명박‘들’은 특히 그렇다. 국가는 가축을 원하지 생명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 분류를 해 놔야 거래가 가능하고, 처분이 용이하고, 폐기가 손쉬우니까.
따라서 구럼비를 부수고 강정 마을에 수십 척의 군함이 들고 나는 미래를, 멀지 않은 바다에서 함포를 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풍경을, 끝내는 거대한 미군 항공모함이 정박하는 몸서리를 상상하며 절규하는 일은 힘에 겹지만 당연히 시의 몫이다. 어머니의 걱정은 대체적으로 자식의 현재도 현재지만 미래이듯 말이다. 어쩌면 고통보다는 불안이 더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지도 모른다. 구럼비를 깨겠다는 국가는 영혼을 붕괴시켜 바다처럼 출렁이는 우리의 삶을 국가의 부속품으로 잡아 두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구럼비를 지키는 일은 단순히 지질학적으로 의미 깊은 풍경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선다. 구럼비는 바로 존재의 터전이다. 국가가 해체하여 길들이겠다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강물이, 논두렁이, 지렁이가, 원추리가 그렇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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