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배움을 중심으로 하는 수업 창조
1. 조용한 혁명
교실은 어딜 가나 닮은꼴이다. 하지만 어느 교실을 방문해도 하나하나 서로 다른 숨결이 느껴지고 서로 다른 교류 속에 서로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3년 1월 24일, 도쿄 도 네리마 구립 도요타마미나미초등학교 3학년 하마노 다카아키浜野高秋 선생의 교실 한편에서 비디오카메라로 수업을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이날 수업 관찰이 내 기억 속에서 잊을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을 예감했다.
지금까지 방문해 온, 1만 개가 넘는 교실은 그 하나하나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특이성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어떤 공통된 개혁의 물결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혁명의 물결은 교실의 벽을 넘고 학교의 담과 국경을 넘어 진행하고 있는 조용한 혁명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조용한 혁명은 배움 양식에서는 좌학座學의 배움에서 활동적인 배움으로, 개인적인 배움에서 협동적인 배움으로, 획득하고 기억하여 정착하는 배움에서 탐구하고 반성하고 표현하는 배움으로의 전환이다. 수업 양식에서는 전달하고 설명하고 평가하는 수업에서 촉발하고 교류하고 공유하는 수업으로의 전환이다. 이 혁명은 일본 교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교실에서 보다 대규모로 전개되고 있다. 실제, 유럽과 미국 등 여러 나라 교실 개혁은 보다 광범위하며 보다 급진적이다.
칠판과 교탁을 중심으로 많은 학생들이 한 명 한 명씩 한 방향으로 나란히 줄지어 앉아 책상에서 배우는 교실, 교과서를 중심으로 주어진 지식이나 기능을 습득시키고 시험으로 평가하는 수업은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박물관에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교실을 방문하면 20명 내외의 아이들이 네댓 명씩 모둠별로 테이블에 모여 협동학습을 전개하고 교사는 배움의 디자이너로서 혹은 촉진자facilitator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한 교실에서 교과서는 보조 역할을 할 뿐이다. 탐구할 만한 주제나 과제를 중심으로 많은 자료를 살펴보고 다채로운 활동을 하면서 질 높은 배움을 추구하고 있다.
이 조용한 혁명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필연적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전통적인 교실 풍경은 19세기의 산물이며 국민국가의 통합과 산업주의 사회의 발전에 대응한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 세계화에 따라 일본을 포함한 선진 여러 나라들은 물건 생산과 소비를 중심으로 하는 산업주의 사회로부터 고도의 지식과 문화, 정보와 대인 서비스에 의해 경제가 구성되는 포스트 산업주의 사회로 이동하고 있다.
OECD는 지금 아이들이 사회인이 되는 2020년에는 가맹국 30개 나라에서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노동인구의 10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격감할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21세기 사회는 지식이 고도화되고 융합하는 사회이며 그 지식이 끊임없이 유동하며 갱신되고 발전하는 사회이다. 창조적 사고, 비판적 사고, 커뮤니케이션 능력, 탐구적인 배움이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다.
21세기 학교에서는 배움의 양이 아닌 질이 문제시되고, 평생에 걸친 주체적 배움이 요청된다. 교실의 조용한 혁명은 이 역사적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2. 하나의 수업에서부터
하마노 선생의 교실에서 ㄷ자 형태로 배열한 책상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종이 울리기 전부터 각자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텍스트는 <모치모치 나무>다. 밤 어둠이 무서워서 혼자 오줌 누러도 가지 못하는 즈다豆太. 한밤중에 복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할아버지가 내뱉는, 곰처럼 끙끙 앓는 소리에 눈을 뜨고 일어나 할아버지를 도와야 한다는 일념으로 어둠의 두려움, 서리의 차가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사를 부르러 가는 장면의 글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속도에 맞게 공손하게 소리 내어 읽는 모습과 교실에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상쾌하고 기분이 좋다. 그것만으로도 이 교실에, 자연스럽게 서로 교류하며 개성과 공동성(공동체 의식)이 자라는 토양이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교실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 존엄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안심하고 수업에 참여할 수 있고, 나도 맘을 비우고 수업을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다.
시작종과 동시에 하마노 선생은 “자, 시작합시다. 자신의 목소리로 읽어 보세요.”라고 말한다. 그 후에 몇 명을 지명하여 이 수업에서 다루는 장면의 텍스트를 소리 내어 두 번 읽게 하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적는 단계로 넘어갔다. 하마노 선생은 묵묵히 작업을 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 들어가 정서가 불안정한 학생에게는 “줄만 그어도 괜찮아요.”라며 격려하고 뭔가 문장을 만들어 보려고 애쓰는 학생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등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에게 세세한 대응을 하고 있다. 작업이 조금씩 진행되자 학생들은 옆 친구와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면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텍스트와 침묵의 대화를 반복한다. 약 10분간 개인 활동을 통해 스스로 읽기를 성숙하게 완성하는 모습을 꼼꼼하게 확인한 하마노 선생은 조용한 목소리로 “이제 슬슬 해 볼까요? 됐나요? 자, 모두 읽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라고 이야기를 건넨다. 이 타이밍도 적확하다.
곧 도시키俊樹(이하 아이 이름은 모두 가명)가 “‘절반도 더 남은 산기슭 마을까지’라는 부분은 아직 절반도 더 남았다는 것인데 지치지 않았을까요?”라고 말을 시작했다. 듣고 있던 아이가 “절반이라면 약 2킬로미터예요.”라고 응답한다. 하마노 선생이 “그것과 관련되는 것이 있나요?”라고 질문하니 가쓰시勝司가 “잠옷을 입은 채로 달려 나갔으니까 많이 서두르고 있어요.”라고 답한다. 이어서 미치오道夫가 “이 산은 어느 정도 걸려야 갈까요?”, 가즈오和夫는 “할아버지 때문에 달리고 있어요.”, 요시키芳樹는 “무서웠어요. 할아버지가 죽을까 봐 무서웠어요.”라고 계속해서 말한다. 여기서 하마노 선생은 “‘무서웠다’는 말이 몇 번 나오지? 두 번 나오지요?” 하고 그 부분에 아이들의 관심을 유도했다.
하마노 선생의 이 대응이 수업의 전개를 결정지었다고 해도 좋다. 니시仁志가 “하지만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죽는 게 더 무서웠다”라고 꼭 알맞은 부분을 소리 내어 읽자 가쓰히사勝久가 “즈다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이렇게 무서웠을까?”라며 이어 간다. 도시코俊子가 “그건 할아버지가 죽을까 봐 무서웠던 거고 ‘아프고 춥고 무서웠으니까’라는 부분은 자기 몸을 다친 것이 아프고 무서웠던 거야.”라고 정리한다. 그러자 “뭔가 다른 것 같아.”라는 작은 속삭임이 들리더니 “밤이잖아, 뭔가 나타나지 않을까?”라는 히사키久樹의 발언에 아이들은 “곰”, “귀신”, “서리”라며 여기저기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노부信夫가 “선생님, 서리가 뭐예요?”라며 본문에 있는 ‘서리’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하마노 선생이 설명하지만 이야기 흐름을 중단한 이 질문과 설명에도 아이들은 “서리는 밤에 내리잖아.”, “곰도 밤에.”, “귀신도.”라며 훌륭하게 화제를 연결 지어 되돌린다.
그러자 요시키가 “‘할아버짓!, 할아버지!’라며 두 번 말하고 있지만 놀람의 의미가 달라. 첫 번째는 곰(처럼 할아버지가 앓는 소리)이고, 두 번째는 (할아버지가) 배가 아픈 것이 무서웠던 거야.”라고 한다. ‘무서웠다’와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도 두 번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차이에 대해서 소곤소곤 속삭이며 아이들의 이야기는 나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이야기 속에서 처음 장면에도 ‘할아버지!’라는 서술이 있었고,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짓!’ 하고 세 번이나 소리쳐 부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발견해 냈다. 하마노 선생은 ‘할아버지~!’, ‘할아버짓!’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쓰여 있는 표현에서 즈다의 심정 차이를 묻자 아이들은 이 “두 번째는 할아버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더욱 큰 소리로 불렀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무서워하고 있어요.”라고 여기저기서 대답했다. 다카오貴夫가 “머리맡에서 곰처럼 몸을 웅크리고 신음하고 있잖아. 할아버지 배가 무지 아픈 거야.”라고 말하자 도시키가 “할아버지는 ‘걱정하지 마’라며 즈다를 안심시키고 있어.”라고 받는다. 미스즈美鈴는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는 배가 조금 아픈 거야’라는 부분은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는’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많이 아픈 거야.”라고 발언하고, 가쓰히사가 “‘즈다는 할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고 하는 부분에서 즈다가 달려들면 할아버지 복통이 더 심해지지 않니?”라고 말한다.
나아가 미사美佐가 “‘울며 울며’가 두 번 나오는데 의미가 비슷해.”라며 ‘울며 울며’도 본문에 두 부분 나온다는 것을 지적한다. 아키亞紀가 “처음 것은 밤이 무서워서 그리고 두 번째는 할아버지가 죽을까 봐 겁이 나서, 슬퍼서 울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자 “조금 달라.”라는 중얼거림이 퍼진다. 도시코가 “처음 부분은 서리가 발에 묻어 맨발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파서 울었던 거야.”라고 한다. 와카코和歌子가 “두 번째 ‘울며 울며’는 할아버지를 생각하자 더 겁이 나서 울었던 거지.”, 마사토正人가 “발에서 피가 났지만 산기슭에 사는 의사 선생님이 계신 곳까지 참고 잘 달려갔어.” 하자 요시키가 미소 지으면서 “그러니까 의사 선생님한테 즈다의 발까지 치료받게 해야 해.”라고 받는다.
여기서 하마노 선생은 일단 한 번 정리를 하기로 했다. “벌써 시간이 다 되었네요. 1분 남았어요.”라고 말하자 아이들은 “벌써? 좀 더 하고 싶어요.”, “선생님 계속해요.”라고 작은 소리로 외친다. 그 시점에서 손을 들고 있는 아이에 한해서 발언할 기회를 주었다.
유미由美가 “즈다가 ‘작은 강아지처럼 몸을 웅크리고 (달려 나갔다)’라고 하는 부분 있잖아요. 앞에 할아버지가 ‘곰처럼 몸을 웅크렸다’고 했으니까 ‘몸을 웅크리고’도 두 번씩 나와요.”라고 지적했다. 이 지적에 대해서도 한바탕 이야기가 오가더니 두 번 나오는 ‘몸을 웅크렸다’에 대해 비교했다. 계속되는 발언에서 마코토眞人가, 즈다가 초가집에서 번개처럼 달려 나가는 장면에서 “칠흑 같은 밤의 공포”라고 말하자, 가즈오가 “‘밖은 굉장한 별에 달도 나왔다’고 되어 있는데 ‘굉장한 별’은 무슨 별?”이냐고 묻는다. “별이 가득하다는 거야.”, “보름 무렵 아름다운 별”, “음력 보름이라면 그건 달이잖아.”, “음력 보름달도 있잖아.”라며 계속 이어진다. 이제까지 말을 하지 않고 있던 아키라徹가 “그래도 즈다는 별도 달도 보지 않았어.”라며 정리했다. 마지막에 아키라가 한 말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 절정, 즉 의사의 등에 업혀 초가집으로 들어갈 때 모치모치 나무 뒤의 달과 나뭇가지 뒤의 별에 즈다가 매료되는 전개를 준비하는 귀중한 발언이 되었다.
3. 서로 듣는 관계
배움이라는 것은 텍스트(대상 세계)와의 만남이고 대화이며, 교실 친구들과의 대화이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 이 세 가지의 대화적 실천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배움의 삼위일체론). 이것은 ‘활동activity’과 ‘협동collaboration’ 그리고 ‘반성reflection’ 세 가지로 구성되는 활동적이며 협동적이고 반성적인 배움으로 수행된다.
하마노 선생의 교실에서 서로 배우고 탐구하는 활동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던 걸까. 이 교실에서 배움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아이들과 개성적이고 다양한 텍스트의 만남과 대화, 아이들 사이에 형성된 서로 듣는 관계이다. 아이들은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으며 친구가 읽은 것을 교류할 때도 한 명 한 명 텍스트의 표현에 입각하여 사고하고, 텍스트와 대화를 하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어떻게 아이들은 텍스트를 충실하게 읽고, 친구들과 읽은 것을 교류하며 이야기 세계를 풍부하게 그려 내고 있는 것일까. 그 비밀은 하마노 선생의 대응에 있다.
내가 수업을 참관하면서 본, 아이들에 대한 하마노 선생의 대응은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 아이의 발언을 음미하며 깊이 받아들이고 그 발언이 다른 아이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때는 “~라고 말하네요.”라며 아이들에게 정중하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중간에 ‘무서웠다’는 의미가 나왔을 때 “‘무서웠다’는 두 번 나오지요.”라고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그 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장면이 두 번(텍스트 전체로는 세 번), ‘울며 울며’가 두 번 ‘몸을 웅크리고’가 두 번(할아버지가 ‘곰’처럼, 즈다가 ‘강아지’처럼 웅크린 것) 나온다는 것을 텍스트에서 발견하여 대비해서 읽기를 발전시킨 것은 아이들이다. 하마노 선생은 그 계기를 준비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한 대응으로 아이들의 읽기가 훌륭하게 연결되어 발전한 것은 왜일까.
그 비밀은 하마노 선생의 대응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가지 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하마노 선생의 대응이 ‘듣기’를 중핵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마노 선생의 ‘듣기’라는 행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듣기’야말로 수업에서 교사 활동의 중핵인 것이다. 아이들의 발언을 ‘듣는다는 것’은 다음 세 가지 관계에서 발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는 그 발언이 텍스트의 어느 말에 촉발된 것인가를 인식하는 것, 두 번째는 그 발언이 다른 아이들의 어느 발언에 의해 촉발된 것인가 인식하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그 발언이 그 아이 자신이 이전에 한 말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교사가 이 세 가지 관계에 대해 한 명 한 명의 발언을 들을 수 있게 되면 텍스트를 매개로 한 명 한 명의 발언이 마치 직물이 짜이는 것처럼 연결되어 간다.
하마노 선생의 ‘듣기’ 대응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원리는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수업에서 아이들의 존엄을 존중하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교사가 ‘좋은 수업’을 하기 바라는 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을 존중하는 수업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수업’을 바라는 교사는 ‘좋은 발언’을 연결하여 수업을 전개한다고 하는 덫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마노 선생의 대응은 그런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좋은 발언(읽기)’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아이의 발언도 훌륭하다’라고 하는 신뢰와 기대가 하마노 선생이 행하는 ‘듣기’의 밑바탕을 지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업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태도로 참가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이미지를 교류하고 그 자유로운 교류가 다양한 읽기의 풍성한 연결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수업 속에 서로 배움이 성립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그 70퍼센트가 아이 한 명 한 명의 존엄을 존중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고, 교사로서의 경험과 배움, 이론과 수업 기술은 나머지 30퍼센트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수많은 수업을 참관하면서 나는 점점 이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성실할 것, 그리고 교재에 대해 성실할 것. 이 두 가지 성실함이 수업의 성패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초임 교사라도 경력 교사 못지않게 풍부한 서로 배움을 실현할 수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4. ‘연결하기’와 ‘되돌리기’
하마노 선생의 수업을 참관하면서 나는 10년 전 히로시마 시 초등학교에서 참관했던 <모치모치 나무> 수업 풍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교실에서는 의사 선생님을 부르러 밤길을 달려갔던 즈다의 심정을 서로 이야기하는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교실에는 차분하지 못한 가즈키和樹라는 남자아이가 있는데 교과서도 펴지 않고 책상에서 떨어져 앉아 연필 깎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 가즈키가 “저요, 저요” 하며 손을 들더니 “즈다는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주위에 있던 아이들은 의아해하면서 “아픈 건 즈다가 아니고 할아버지잖아.”, “할아버지가 아픈 건 머리가 아니고 배야.”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가즈키는 “즈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고 있다니까.” 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놀라운 것은 교사가 “왜, 그렇게 생각하니?” 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니?” 하고 물었다는 점이다.
가즈키는 교과서를 펴지도 않았는데, “교과서에 쓰여 있어요. ‘초가집 사립문에 부딪치며 달려 나갔다’고 쓰여 있어요.” 하고 대답했다. “에~?” 하고 술렁대는 소리가 교실에 퍼졌고 잠시 후 교실 한쪽 편에서 “와, 대단해!” 하며 감탄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가즈키의 읽기에 감동했다. 즈다와 할아버지는 가난해서 작은 초가집에서 살고 있는데 할아버지의 병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된 즈다가 잠도 덜 깬 상태에서 ‘작은 강아지처럼 몸을 웅크리고’, ‘문에 부딪치며 달려 나갔다’고 하니까 머리를 문에 부딪치며 달려 나갔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것이 가즈키가 읽은 즈다의 이미지인 것이다. 이 즈다의 이미지는 어떤 아이의 해석보다도 생생하게 실감 나는 것이었으며 상황을 자세하게 이해한 것이었다. 교사는 가즈키의 의견을 계기로 한 번 더 텍스트로 ‘되돌리기’를 하여 달려 나갔던 즈다의 모습을 서로 이야기하는 수업으로 전개시켰다.
가즈키에 대한 교사의 묻는 방식이 “왜 그렇게 생각하니?”가 아니라 “어디에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니?”라는 것이 이 수업에서 결정적이었다. ‘어디에서’와 ‘찾아보다’에서 교재와 ‘연결하기’가 생겨났고 가즈키가 읽은 것과 다른 아이들이 읽은 내용이 ‘연결’된 것이다.
수업에서 교사가 할 일의 핵심은 ‘연결하기’와 ‘되돌리기’이다. ‘연결하기’는 교사 역할의 핵심이라고 해도 좋다. 교사는 수업에서 교재와 아이들을 연결하고, 각각의 아이들을 연결하고, 어떤 지식과 아이들 저마다가 갖고 있는 지식을 연결하고, 지난날에 익힌 것을 오늘 배운 것과 연결하고, 교실에서 배운 것은 사회현상과 연결하고,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것이다.
수업에서 교사의 활동을 살펴본다는 것은 ‘연결하기’를 잘하고 있나 그렇지 않나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교사의 활동을 잘 살펴보면 ‘연결하기’보다 ‘끊기’로 시종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누구 더 없어?”, “다른 의견은?”이라고 지명하면 발언과 발언의 연결은 끊어지게 된다. 수업이 끝나고 감상과 반성을 적게 하는 교사도 많은데 그렇게 하면 아이들의 의식에서 다음 수업에 대한 연결은 사라지고 만다.
‘되돌리기’ 활동은 더욱 잘 안 되고 있다. 수업 중에 교사는 “다음은 어떻게 하죠?”, “다음은 어떻게 하죠?”라고 의식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만 기울게 되어 그 진행을 멈추고 이전 단계로 ‘되돌리기’를 하거나 교실 전체나 모둠에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되돌리기’는 드물게 된다. 그 결과 많은 아이들을 버려 둔 채 가게 되어 몇몇 아이만 참여하는 수업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서로 배우는 교실을 만드는 교사와 일방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의 차이는 바로 ‘되돌리기’에 있다. 그에 따라 교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의 배움을 보장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결정된다.
서로 탐구하는 교실을 만드는 교사는 ‘되돌리기’의 의의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되돌리기’에 능숙한 교사는 좀 더 수준 높은 배움에 적극적으로 도전한다. 과제가 아이들에게 어려울 때에는 이전 단계로 ‘되돌리기’를 하여 다시 출발할 수 있게 한다든지 모둠 활동에서 ‘되돌리기’를 함으로써 모든 아이들의 참여를 북돋우며 아이들이 서로가 가진 다양한 생각을 주고받도록 조직해서 좀 더 수준 높은 배움을 실현한다.
하마노 선생의 수업도 ‘연결하기’와 ‘되돌리기’ 이 두 가지 방법으로 교사의 활동이 조직되어 있다. 하마노 선생은 수업에서 아이 한 명 한 명의 말 ‘듣기’를 중심으로 ‘연결하기’와 ‘되돌리기’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5. 비전
개혁은 ‘비전’에 따라 추진되는 것이다. 서로 배우는 교실을 만드는 ‘조용한 혁명’도 ‘비전’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이 ‘비전’은 교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수업 철학을 형성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나와 함께 교실의 조용한 혁명에 도전한 교사들의 수업 사례를 소개하여 그 도전 속에 싹트고 있는 수업 철학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교사들의 도전은 모두 작은 도전이며 작은 일들이다. 등장하는 교사들은 미국의 개혁 사례에서 소개한 데보라 메이어처럼 국제적으로 유명한 교육개혁자도 있으나 교사 대부분은 유명한 교사도 아니고 저명한 개혁가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교실의 조용한 혁명이 어떤 학교에나 존재하는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도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배우는 교실 창조와 배움의 공동체 학교 만들기는 교사들의 공통된 숙원이다. 그 도전은 학교와 교실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도전이다. 수업에서 아이들의 존엄을 세우는 도전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배울 권리를 보장하는 도전인 것이다.
학교는 아이들이 함께 성장해 가는 장소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는 그 기능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많은 아이들이 배움으로부터 도주하고 있으며 독서를 멀리하고 있다. 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다니면 다닐수록 배움의 즐거움과 서로 배우는 친구를 잃어버리고 배움을 지탱해 주는 교사와 자기 자신의 가능성까지 잃어버리게 하고 있다. 함께 배우는 교실을 만들고 함께 탐구하는 교실을 만들어 가는 도전은 이러한 학교의 현실을 바꾸는 투쟁인 것이다.
서로 배우는 관계를 교실에 구축해 가는 도전은 아이들 속에 서로 배우며 성장해 가는 연대를 기르는 도전이다. 교실을 참관하며 놀라는 것은 아이들이 서로 돌보고 지탱해 주는 잠재적 능력을 풍부하게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교실에서 엉뚱한 말을 하며 배움을 방해하는 아이가 있을 때에도 아이들은 강한 인내로 그 아이에게 관용을 베푼다. 오히려 교사가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배우려는 태도를 보이면 아이들은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친절하게 대하며 배우는 것을 도와준다. 어느 교실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러한 사실에 나는 정말 감동했다.
그러나 교사는 보통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아이들이 서로 배우는 관계를 맺어 가는 경우에도 서로 가르치는 관계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서로 배우는 관계’는 ‘서로 가르치는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서로 배우는 관계’는 자연스럽고 잘난 척하지 않으며 친절함으로 맺어지는 관계인 데 반해 ‘서로 가르치는 관계’는 쓸데없이 참견하는 관계이다.
‘서로 배우는 관계’는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아이가 “이거 어떻게 해?”라고 도움을 구하면 그 요청에 다른 아이가 대답해 주는 관계인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교실에 두 가지 윤리가 필요하다. 하나는 잘 이해할 수 없거나 도중에 실패하게 되면 친구에게 “이거 어떻게 해?” 하고 물어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떤 친구가 “이거 어떻게 해?” 하고 물어볼 때는 비록 교사가 말을 하고 있는 중이라도 반드시 성실하게 대답해 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초등학교 1학년이라도 지켜야 하는 윤리로 만들 필요가 있다. 서로 배우는 교실 만들기는 아이들이 서로 돌보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윤리적 실천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교사들은 스스로 교실을 열고, 동료와 서로 배우는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는 아무리 ‘대단한 실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1년에 한 번도 동료에게 수업을 공개해서 비평을 받지 않는 교사는 공립학교의 교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교사는 아무리 ‘대단한 실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교실을 사적인 공간으로 여기고 아이들을 사유화하며 수업을 사유화하고 교직을 사유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사례는 모두 교실에서 서로 배우는 관계를 만들고, 교실을 열어 동료성을 구축해 가는 교사들의 도전을 기록한 것으로 국내외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실의 조용한 혁명의 장면을 서술한 것이다. 그들의 사례와 그 풍경은 학교와 교실 속 조용한 혁명의 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수업의 철학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 비전과 철학을 읽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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