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도덕적 진리
‘카눈kanun’이라 불리는 친족 복수vendetta는 알바니아 사람들의 오랜 전통이다. 알바니아에는 희생된 가족을 대신하여 살인자의 가족 중 남자를 죽여 원수를 갚는 사회적 관행이 있다. 불행히도 살인자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희생자의 가족을 피해 숨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교육이나 의료 혜택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알바니아 남자들이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에 이런 관습을 만들어놓은 알바니아인들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할까? 피로 복수하는 그들의 전통이 악한 것일까? 그들의 가치관은 우리의 가치관보다 열등한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에 대해 과학이 대답은 고사하고 아예 이런 질문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여러 양식 중에 어떤 것을 두고 ‘좋다’ 혹은 ‘도덕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과학적 사실일 수 있는가? ‘좋다’ 혹은 ‘도덕적이다’라는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요즘 도덕의 진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경생물학에 대해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많은데, 이들의 연구 목적은 단지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기술하는 것일 뿐이다. 과학자에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숱한 논쟁들은 바로 과학이 그에 대해 공식적으로 아무런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논쟁이다.
그러나 내가 하려는 주장은 이것이다. 가치에 대한 물음이란─의미나 도덕, 인생의 장기적 목표에 대한 물음이란─사실상 의식적 존재의 행복에 대한 물음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가치는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실로 해석된다. 이때 과학적 사실이란, 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사회적 감정, 복수의 충동, 법규나 제도가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 행복과 고통의 신경생리학 등이다.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과 마찬가지로 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를 초월한다.
뉴기니 섬에서 발생했더라도 암은 암이고 콜레라는 여전히 콜레라다. 정신분열증 역시 어디서나 정신분열증일 것이다. 이에 덧붙여 나는 동정compassion은 어디서나 동정이고 행복도 어디서나 행복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문화적 수준 차이가 크다면, 예를 들어 행복하고 지적으로 능력 있고 창조적인 아이들을 키워내는 방식과 공존할 수는 없지만 (가치가) 동등한 방식이 있다면, 이 또한 틀림없이 뇌의 구조가 좌우하는 사실인 것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신경과학과 심리학의 맥락에서 문화가 우리를 규정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있다. 뇌의 수준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하게 될수록 가치에 대한 물음에 옳고 그른 답이 있다는 것도 잘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도덕적 진리의 위상에 관한 끈질긴 논란에도 대응해야 한다. 종교에서 세계관을 끌어내는 사람은 보통 도덕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신이 세상을 만들 때 이미 도덕도 함께 만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선악의 개념은 진화의 압력이나 문화적 발명의 산물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도덕적 진리를 말할 때 필연적으로 신을 거론한다. 후자는 인간의 모방충동이나 문화적 편견 또는 철학적 혼동만을 주장한다. 이 논쟁에서 내 목적은 양쪽이 모두 틀렸음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 책의 목표는 과학의 맥락에서 도덕적 진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 책에서 내가 펼칠 주장도 논란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이는 아주 간단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즉 인간의 행복은 전적으로 세상의 사건과 인간 뇌의 상태에 의존한다. 따라서 행복을 설명해줄 과학적 사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자세한 과학적 지식이 축적되면 사회에 존재하는 삶의 방식을 더욱 분명하게 구분하게 될 것이다. 어떤 방식이 더 좋고 나쁜지, 어떤 방식이 사실에 부합하거나 그렇지 않은지 혹은 더 윤리적이고 덜 윤리적인지 판단해야만 한다. 이러한 통찰을 통해 분명히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학문적 논란은 끝나고 삶을 뒤바꾸는 수많은 선택이 시작될 것이다.
과학이 모든 도덕적 논란의 해결을 보장해준다는 말이 아니다. 의견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이 사실의 범위 내에 있을 거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물음에 답할 수 없다고 해서 답이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직전 60초 동안 정확히 몇 사람이 모기에 물렸을까? 모기에 물린 사람 가운데 몇 명이나 말라리아에 걸렸을까? 그중 몇 명이 말라리아로 죽었을까?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있는 과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자들이 간단한 숫자로 된 답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거라고 생각한다. 마땅한 데이터를 얻을 수 없다고 해서 모든 의견을 똑같이 존중해야만 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특정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서, 서로 다른 대응책들이 똑같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 내 경험상, 도덕적 혼동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은 ‘실제 답이 없다는 사실’을, ‘원칙상 답이 없다’는 것으로 오인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미국 21개 주에서는 여전히 학교 체벌을 허용한다. 멍이나 찰과상을 입힐 정도로 단단한 나무막대로 교사가 학생을 체벌하는 것이 합법이다. 매년 수십만 명이 체벌 폭력을 당하는데, 이런 일은 거의 남부 주에서 발생한다. 이런 행태의 근거가 종교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성경에서 우주의 창조자가 아이를 망치지 않으려면 매를 아끼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잠언 13장 24절, 20장 30절, 23장 13~14절). 그러나 진정 행복에 관심이 있고 아이의 행복을 증진하고자 한다면, 소년 소녀의 인지적 정서적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통증과 공포, 모욕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 질문에 답이 있음을 의심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이런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있을까? 사실상 모든 연구가 체벌은 최악의 방법이고 더 많은 폭력과 사회병리를 불러올 뿐만 아니라, 체벌을 더 강력하게 지지하게 된다는 결과를 제시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건 모르건 여기에는 분명 답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타인의 ‘전통’을 존중하기로 하고, 그저 우리와 의견이 다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과학은 점차 이런 문제의 답을 결정할 것이다. 인간관계, 정신 상태, 폭력 행위, 복잡한 법망 등의 결과에 따른 차이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제시하는 답의 차이가 우리 뇌의 차이, 다른 이들의 뇌의 차이, 더 넓게는 세계의 차이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나는 실제로 가치란 사실들이 상호 관련된 세계임을, 독자들에게 증명해 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생각과 의도가 뇌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 상태가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나는지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행동이 세상과, 다른 의식적 존재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한다. 이 사실들은 ‘선악’과 같은 용어를 써서 합리적으로 샅샅이 다루어질 것이다. 또한 이 사실들은 점차 과학의 영역으로 수용되고, 개인의 종교적 소속보다 깊이 뻗어나갈 것이다. 기독교 물리학이나 이슬람 대수학이 없는 것처럼 기독교나 이슬람의 도덕만 도덕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는 도덕을 과학에 속하는 미개척 분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첫 번째 책 《종교의 종말The End of Faith》이 출판된 이후 나는 ‘문화전쟁culture wars’에 대해 특권적 관점을 갖게 되었다. ‘문화전쟁’은 미국의 세속적 자유주의와 기독교 보수주의, 유럽의 비종교 사회와 이슬람 국민 사이의 전쟁이다. 신앙과 의심 사이 연속선상의 한 지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내온 수만 통의 편지와 이메일을 받은 뒤, 나는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다. 즉 어느 진영이든 이 문화적 단절의 저변에는 적어도 이성의 한계에 대한 믿음이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쪽 다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물음에 답하기에는 이성이 무력하다고 본다. 한 개인이 사실과 가치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는 방식은, 전쟁에서 교육까지 사회의 거의 모든 중대 쟁점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사유의 분열은 정치 스펙트럼의 양극에 상이한 결과를 가져온다. 즉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의미와 도덕의 문제에 올바른 답이 있다고 믿는데, 이는 오로지 아브라함의 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상적 사실은 합리적 탐구로 발견할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가치는 광야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로부터 와야 한다고 믿는다. 성서적 자유주의, 다양성에 대한 불관용, 과학에 대한 불신, 그리고 인간과 동물이 겪는 고통의 진짜 이유에 대한 무관심은, 자주 그렇듯이 종교적 우파가 사실과 가치를 가를 때 표현하는 방식이다.
반면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은 도덕적 물음에는 객관적인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보다는 선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이상에 부합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옳고 그름에 대해서만큼은 밀이 진리에 전혀 다가가지 못했다고 의심하는 세속주의자가 대다수다. 다문화주의, 도덕적 상대주의moral relativism, 정치적 올바름, 불관용intolerance까지도 관용하기 등은 좌파가 사실과 가치를 가를 때 생기기 쉬운 쟁점들이다.
두 진영의 힘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 우려된다. 세속적 민주주의는 구시대 종교의 터무니없는 열정에 대해 갈수록 속수무책이다. 보수적 독단주의와 자유주의적 회의 때문에 미국은 배아줄기세포 분야에서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 금지로 10년 이상 뒤처졌다. 이 때문에 낙태나 동성애자 결혼 등의 쟁점으로 과거 수년 동안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정치적 분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엔의 신성모독금지법안 통과를 위한 노력의 배경에도 이런 상황이 깔려 있다(법안이 통과되면 유엔 회원국 국민들은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이슬람 급진파에 반대하는 전쟁이 한 세대 이상 이어져서 서구사회를 곤경에 빠뜨렸는데, 이제 더 나아가 유럽사회를 새로운 칼리프시대로 재편하게 될지도 모른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는 우주의 창조주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믿는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공공영역에서 이러한 관점을 실현하려고 한다. 한편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는, 혹은 무엇이든 ‘진짜’ 옳다고 생각하는 세속적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지적 수준과 정치적 자유 둘 다를 포기한다.
과학자 공동체는 대체로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종교적 독단에 자리를 내어주는 걸 보면 놀랍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 문제는 국립과학원National Academies of Science과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같은 상위기관까지 뻗어 있다. 심지어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 잡지 <네이처Nature>도 이성적 담론과 신앙적 허구 사이의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나는 지난 10년간 이 잡지에서 ‘종교’라는 단어가 나오는 대목을 샅샅이 뒤진 결과, 편집자들이 스티븐 J. 굴드Stephen J.Gould의 ‘중복되지 않는 권위nonoverlapping magisteria’ 개념을 널리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과학과 종교는 전문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두 분야가 적절하게 관점을 규정하면 갈등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개념이다. 어떤 사설에서는, 두 분야가 “상대 진영으로 발을 잘못 넣었다가 곤란을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 이면에는, 과학은 물리적 우주의 작동에, 종교는 의미, 가치, 도덕, 선한 삶에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운이 좋다면 나는 이 주장이 진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와 가치, 그리고 도덕과 선한 삶은 의식적 존재의 행복과 관련이 있다. 이들이 세상의 사건 및 뇌의 상태와 법칙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합리적이고 정직하고 열려 있는 탐구만이 이런 과정을 통찰하게 해줄 진정한 원천이다. 신앙이 올바른 답을 내놓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우연일 뿐이다.
과학계는 도덕적 쟁점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취하지 않고 주저함으로써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과학 분야는 원칙적으로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와는 분리된 것이라는 인식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 보니 과학은 대중문화의 관점에서 마치 기술을 개발하는 부화장孵化場 정도로 보일 뿐이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도 과학은 사실상 종교에 대해 수 세기 동안 새로운 당혹감만 안겨주었음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과학계 안팎에서 과학은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었다. 어떤 신앙, 어떤 정치관을 가졌든지 종교사상가라면 신을 믿는 근거에 대해 의견이 일치한다. 신이 존재한다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삶의 의미와 도덕 지침의 원천으로 믿을 게 없기 때문이라는 게 가장 흔한 이유다.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여러 종교적 전통이 하나같이 바로 이 비논리적 언술 뒤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과학도 인생의 가장 심오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반발도 있을 것이다. 세계관의 충돌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과학의 발전이 좌우되는 것은 물론이고, 가치 공유에 근거한 전 지구적 문명 건설의 성패도 엇갈린다. 21세기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대안은 여럿 있지만, 대부분 명백히 틀린 답이다. 행복에 대한 합리적 이해가 있어야만 전 세계 수십억 인구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 환경적으로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일종의 인간 번영의 과학이라는 것이 아직까지는 요원해 보이지만, 이를 위해 우선 할 일은 그런 지식 분야가 실제로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도덕의 풍경the moral landscape’이라고 부르는 가설적 공간을 자주 거론할 것이다. 이 공간은 실제적, 잠재적 결과의 공간으로, 봉우리의 높이는 잠재적 행복의 높이에 해당하고, 계곡의 깊이는 잠재적 고통의 크기에 해당한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즉 다양한 문화적 관습, 윤리 규정, 정부의 양태 등은 이 풍경에서 지점 사이의 좌표 이동으로 표현되고, 이것은 또한 인간 번영의 정도 차이로 나타난다. 모든 도덕적 문제에 대한 하나의 정답 또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최선의 방식을 반드시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문제에서는 대동소이한 다수의 답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풍경에 봉우리가 여러 개 있다고 해서 봉우리의 실재성이나 가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뿐 아니라 봉우리와 계곡의 차이에서 보이는 대조가 흐려지거나 그러한 귀결의 필연성이 줄어들지도 않는다.
도덕적 물음에 대한 답이 여러 개라고 해서, 이 책의 논의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음식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잠시 살펴보자. 건강에 좋은 음식이 단 ‘하나’라고 주장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건강식과 독소 사이에는 객관적 차이가 존재하고, 땅콩을 먹고 사망하기도 하므로 예외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합리적 논의의 맥락에서 화학, 생물학, 건강의 삼자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식량이 풍부해졌다고 해서 영양에 대해 몰라도 된다거나, 요리방식은 원칙적으로 건강과 상관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덕의 풍경에서의 좌표 이동은 생화학에서 경제학에 이르는 여러 수준에서 분석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에 관한 한, 그 변화는 뇌의 상태와 역량에 필연적으로 의존한다. 나 역시 과학 내의 ‘통섭consilience’ 개념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따라서 과학의 전문 분야들 간의 경계 문제를 우선 대학의 구조와, 일생 동안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배움의 한계에 대한 함수로 본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에 대해서만큼은 신경과학과 기타 정신과학이 우선이라는 점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의 경험이 보여주는 존재의 징표는 뇌 상태에 따라 결정되고 그 안에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도덕의 보편적 개념이 성립하려면 예외가 전혀 허용되지 않는 도덕 원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테면 거짓말이 진짜 나쁘다면 ‘언제나’ 나쁜 일이어야 하는데, 예외가 하나라도 있다면 도덕적 진리를 운운하는 모든 개념은 파기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생각과 행동 및 행복의 관계로 볼 때, 도덕적 진리는 도덕을 정의할 때 불변의 도덕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도덕은 체스와 상당히 유사하다. 분명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원칙들이 있지만 중요한 예외들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체스를 잘하고 싶으면 ‘퀸을 잃지 말라’는 규칙은 따를 만한 가치가 있으나, 어떨 때는 퀸을 희생하는 것이 매우 재치 있는 방법이라는 예외도 인정한다. 또 불가피하게 퀸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체스에서는 어떤 위치에서건 객관적으로 유리한 수와 불리한 수가 있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행복에 대해 객관적 진실이 알려지면, 예를 들어 친절이 학대보다 일반적으로 행복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행동과 배려가 도덕적으로 좋은지 혹은 중립적인지, 아니면 피해야 하는지를 과학이 정확하게 주장할 날이 올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번영할 수 있는지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하기엔 아직 너무 이르지만, 단편적인 설명들은 속속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아동기의 경험 및 정서적 애착과 이후의 건강한 관계 형성 능력 사이의 관련성을 살펴보자. 정서적 방치나 학대가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아동기의 경험이 뇌에 반드시 구현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설치류를 이용한 실험 결과, 부모의 보살핌, 사회적 애착, 그리고 스트레스 통제가 부분적으로는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에 좌우됨이 밝혀졌다. 이런 호르몬이 뇌의 보상 시스템 활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동기에 방치되면 보상 시스템이 교란되면서 심리적 사회적으로 발달이 저해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험을 목적으로 아이들에게 일부러 적당한 관심을 쏟지 않는 일은 비윤리적이지만 이런 실험은 날마다 벌어진다. 아동기의 정서적 박탈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두 그룹의 아이들을 실험한 후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 혈중농도를 측정한 연구가 있다. 한 그룹은 집에서 평소처럼 보살핌을 받은 아이들이었고 다른 그룹은 생후 몇 년 동안 고아원에서 지낸 이들이었다. 예상대로 국가기관에서 자란 아이들은 보통의 양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이들은 인생 후반기에도 사회적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향이 있으며, 또 예측한 대로 이 아이들은 양어머니와 신체 접촉을 해도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정상 수준으로 증가하지 않았다.
관련 신경과학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지만, 우리는 정서, 사회적 상호작용, 도덕적 직관이 서로 영향을 준다고 알고 있다. 이 세 체계에 힘입어 동료에게 자기 자신을 맞추어나가고 그 과정에서 문화를 만들어낸다. 문화는 사회적, 정서적, 도덕적 발달을 촉진한다. 뇌는 틀림없이 사회적 정서적 상호작용, 도덕, 문화, 이 세 가지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문화적 규범은 뇌의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킴으로써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당신은 아들이 딸보다 낫다고 여기는 편인가? 또 솔직하게 묻는 것보다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가? 만일 당신의 자녀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식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는가? 부모가 이런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과 이것이 자녀의 인생에 끼칠 영향은 뇌와 관련된 사실로 해석해야만 한다.
인간의 지식과 가치가 더는 별개 영역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확신시키는 것이 내 목표다. 측정의 세계와 의미의 세계는 결국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종교와 과학이 동일한 현실을 정반대로 사유하는 한 타협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에 관한 모든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에 대한 의견 차이 역시 우리의 지식이 불완전함을 드러낼 뿐이다. 따라서 무조건 의견의 다양성을 존중할 의무는 없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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