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꿈
지금껏 나는 여러 날 동안 낮에는 전혀 쉬지 않고 밤에도 아주 잠깐씩 쉬어 가며 여행을 했다. 내 앞을 연이어 빠르게 지나갔던 새로운 풍경들이 어렴풋한 꿈처럼 되살아났다. 인적이 드문 길을 달려갈수록 수많은 사물들이 내 마음속을 아주 혼란스럽게 헤집고 다녔다. 그 중 일부는 마음속을 쉴 새 없이 오가다가 이따금씩 내가 또렷이 쳐다볼 수 있도록 가만히 멈춰 섰고, 몇 분 뒤에는 환등기로 비춘 그림처럼 다시 스르르 사라졌다. 어떤 장면은 또렷이 보이고, 어떤 장면은 희미하게 보이고, 또 어떤 장면은 내가 최근에 구경했던 많은 장소들이 다른 장면 뒤에서 어른거리다가 그 장면을 뚫고 나오기도 했다. 그 영상들은 제 차례가 되어 보이는가 싶더니 금세 다른 것으로 변해 버렸다.
어느 순간 나는 다시 모데나의 지저분하고 낡은 갈색 성당들 앞에 서 있었다. 험상궂은 괴물들을 토대로 서 있는 특이한 기둥들은 마치 내가 차분하고 오래된 대학이 있고, 점잖게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걸어 다니는, 파두아의 조용한 광장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나는 주택들과 정원, 과수원들이 유달리 깨끗한 것에 감탄하며 몇 시간 전에 봤던, 쾌적한 도시의 변두리를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라지자 이윽고 볼로냐의 두 탑이 나타났다. 연못으로 둘러싸인 페라라의 거대한 성이 열정적인 사랑을 증명하듯, 고독하고 풀만 무성한 쇠락한 도시의 주인처럼 붉은 햇살 속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탑들은 모습을 감추었다. 말하자면, 여행자들이 흔히 겪기 쉬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면서도 유쾌한 혼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반쯤 졸면서 마차가 흔들거릴 때마다 새로운 기억을 밀쳐내고 또 다른 새로운 기억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 뒤(내 짐작이지만) 마차가 서는 바람에 나는 눈을 떴다. 밤이 깊었고 우리는 물가에 있었다. 검은 배 한 척이 보이고 선실(똑같이 슬픈 색깔로 칠한 작은 집이라고 해야 할지) 같은 것도 보였다. 내가 배에 오르자 사공 두 명이 노를 저어 바다 저 멀리 보이는 큰 불빛을 향해 배를 움직였다.
때때로 바람이 음울한 소리를 내며 불었다. 바람은 물결을 일으키고, 배를 흔들고, 별들을 향해 검은 구름을 날려 보냈다. 그 시간에 육지를 뒤로 하고 물위를 떠다니며 바다 위의 빛을 향해 나아가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빛은 이내 더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배가 기둥과 말뚝으로 표시된 꿈같은 뱃길을 따라 가까이 다가가자, 한 덩이를 이루고 있던 빛은 물 위에서 반짝이며 여러 개의 작은 촛불로 변했다.
시커먼 물 위로 5마일쯤 떠돌았을까. 꿈속에서 배가 근처의 장애물에 부딪히며 잔물결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유심히 살펴보니 어둠 사이로 검고 큼직한 무언가가 보였다. 강기슭인가 했지만 그것은 뗏목처럼 수면 가까이 평평하게 놓여 있었다. 둘 중 윗사람으로 보이는 사공이 그것은 묘지라고 말했다.
묘지가 그런 외로운 바다에 있다니, 호기심과 놀라움을 느낀 나는 다시 한 번 그쪽을 돌아봤지만 묘지는 서서히 물러나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우리가 탄 배는 거리(유령의 거리)로 미끄러지듯 들어서고 있었다. 길 양쪽으로 집들이 물 위에 솟아 있고, 검은 배는 그 창문 아래로 조용히 지나갔다. 창문에서 새어나온 불빛은 검은 물줄기의 깊이를 재며, 반사된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고요했다.
그렇게 우리는 물이 가득 흐르고 있는 좁은 거리와 골목길을 따라 이 유령의 도시 속으로 계속 나아갔다. 어떤 모퉁이들은 너무 좁고 뾰족해서 길고 가는 모양의 배로는 돌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사공들은 읊조리는 듯한 소리로 경고를 하며 멈춰 서지도 않고 부드럽게 지나갔다. 때로는 우리처럼 검은 배를 부리는 사공들이 그 소리를 흉내 내며 속도를 늦추더니(나는 우리 배가 속도를 늦춘다고 생각했다) 검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비밀스러운 문 근처의 기둥에는 거무스름한 색깔의 배들이 묶여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배는 텅 비어 있고, 어떤 배는 사공들이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횃불을 든 이들의 시중을 받으며 화려하게 차려입은 형체들이, 궁전 내부에서 어둑한 아치 길을 지나 배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언뜻 보이다가 이내 가려졌는데, 꿈을 혼란스럽게 하던 많은 다리 중 하나가 곧 무너져 내려 우리를 뭉개버릴 것처럼 배에 가깝고 낮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다리 중 하나가 꿈을 혼란스럽게 하더니 곧 지워졌다. 그렇게 이 이상한 곳(우리 주변은 모두 물이고 다른 곳에는 물이 없었다)의 중심부로 들어가자 주택과 성당들, 위풍당당한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놀랄 만큼 고요했다. 이윽고 우리는 넓고, 트인 물줄기를 가로질러 잘 포장된 넓은 부두 같은 곳을 지났다. 길게 늘어선 아치와 기둥, 육중하고 힘이 넘치면서도 흰 서리나 거미줄처럼 가벼워 보이는 건물들을 등불이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배가 물에서부터 커다란 저택에 이르는 계단 앞에 도착했고 수많은 복도와 회랑을 지나서 나는 잠시 쉬려고 몸을 눕혔다. 그리고 창 아래로 검은 배들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오가는 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본 한낮의 아름다움은 또 어떠한가. 그 신선하고 활발하고 쾌활한 모습. 물 위에서 반짝이는 햇살과 푸른 하늘과 살랑대는 바람은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으리라. 나는 창가에서 작은 배와 범선들을 내려다보았다. 돛대, 돛, 밧줄, 깃발. 배에서 짐을 부리는 바쁜 선원들, 화물과 술통, 온갖 화물이 가득한 넓은 부두, 바로 근처에 당당하게 정박해 있는 거대한 배들이 보였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 위에는 멋진 성당 꼭대기에서 금빛 십자가가 햇살에 반짝이고, 우아한 돔 지붕과 탑들이 있었다. 나는, 파도를 문 앞까지 밀어 보내고 거리를 물로 가득 채우는 녹색 바닷가로 내려가, 빼어난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있는 어떤 장소로 갔다. 눈을 뗄 수 없는 그곳의 매력과 비교하면 주변 모든 것들은 초라하게 빛을 잃었다.
그곳은 다른 곳들처럼 깊은 바다에 고정되어 있는 드넓은 광장 같았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한창 전성기에 있는 세상의 그 어떤 건물보다도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을 간직한 오래된 궁전이 서 있었다. 궁전 주변에는 요정의 손으로 만든 작품처럼 우아하고 대단히 견고해서, 수백 년 세월의 공격도 허사였던 수도원과 회랑들이 서 있었다. 또, 동양의 화려한 상징으로 가득한 성당이 궁을 감싸고 있었다. 궁전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홀로 서 있는 높은 탑은 자랑스러운 머리를 하늘로 들어 올리고 아드리아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가에는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불길한 기둥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꼭대기에 검과 방패를 든 인물상이 서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날개 달린 사자가 서 있었다. 그 곁에는 모든 것이 호화로운 이곳에서도 가장 장식이 화려한 또 하나의 탑이 서 있었다. 탑은 황금색과 짙은 푸른색의 번쩍이는 천체를 높이 떠받치고 있었고, 위에는 황도 12궁이 그려져 있었으며, 그 주위를 가짜 태양이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그 위에서 청동 거인 두 명이 망치로 종을 두드려 낭랑한 소리로 시간을 알렸다. 새하얀 돌로 지은 직사각형 모양의 높은 집들은 화사하고 아름다운 아치로 둘러싸여 이 황홀한 광경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곳곳에서 깃발을 매단 화려한 돛대들이 올라가더니 꿈결처럼 포장된 길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성당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나는 건물 전체를 가로지르며 수많은 아치들 사이를 오갔다. 웅장하고 몽환적인 거대한 건물이었다. 낡은 모자이크로 금빛을 발하고, 좋은 향기가 가득하며, 향로의 연기가 자욱하고, 진귀한 보석과 금속으로 호화로운 곳. 성인들의 성체가 있어 거룩하고,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오색찬란하고, 조각을 새겨 넣은 나무와 채색한 대리석으로 어둑어둑한 곳. 엄청난 높이와 너른 공간으로 어둠에 싸이고, 은색 등불과 깜빡이는 빛으로 빛나는 곳. 구석구석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고, 엄숙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었다. 이번에는 궁전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물의 왕국의 옛 통치자들이 그림 속에서, 벽 속에서 근엄하게 바라보는 고요한 회랑과 회의실을 걸어 다녔다. 뱃머리를 높이 쳐든 전함들도 화폭 속에서 옛 모습 그대로 전쟁을 하고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나는 위엄과 승리를 기리는 넓은 방(지금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을 이리저리 걸으며 사라져버린 이곳의 긍지와 권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과거 속의 일이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몰락에 대한, 고대인들의 징표와 위안이 되는 이유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지금도!”
꿈속에서 나는, 궁전 근처의 감옥과 이어진 방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좁은 거리 위에 걸쳐 있는 높은 다리가 궁전과 감옥을 잇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 다리를 탄식의 다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먼저 돌로 만든 벽의 들쭉날쭉한 구멍 두 개를 지났다. 지금은 이빨이 빠지고 없지만 사자의 입 같은 그 구멍을 보며,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늙고 사악한 평의회를 비난하다가 어두운 밤에 그 구멍을 통해 떨어져 죽었으리라는 생각에 나는 꿈속에서도 병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그런 죄수들이 심문을 받으러 끌려갔던 평의회실과 그들이 유죄를 선고 받고 지나쳤던 문(목숨과 희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늘 닫혀 있는 문)을 보니 가슴이 쓰려왔다.
하지만 밝은 햇살을 뒤로 하고 횃불을 들고 아래위 두개의 층으로 만든 음침하고 무시무시한 감옥으로 내려가자 가슴은 더 심하게 아려왔다. 감옥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아주 오래전, 방마다 두꺼운 벽에 작은 구멍을 내어 횃불을 끼워놓고 매일 삼십 분씩 안에 있는 죄수들에게 빛을 비춰 주었다. 죄수들은 잠깐 비치는 이 가냘픈 빛에 의지해 시커먼 감옥 속에서 비문을 새겼다. 그 글자들이 보였다. 뭉툭한 손톱 끝으로 힘겹게 만든 흔적은 그 고통보다 그리고 그 자신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여러 세대를 버텨온 것이다.
들어가기도 전에 죽음의 낙인이 찍혀 누구도 스물네 시간 이상 머무른 적이 없다는 작은 방을 보았다. 그 옆에는, 낮에는 밝게 웃지만 밤이 되면 희망의 파괴자요 죽음의 사자가 되는 고해 신부(갈색 예복에 갈색 두건을 쓴 수도사)가 유령처럼 찾아가던 어두운 감옥이 있었다. 나는 죄수들이 속죄의 고행을 당하며 목 졸려 죽던 바로 그 위치에 발을 올리고, 손은 죄악의 문(입구가 낮고 잘 보이지 않았다) 위에 올려놓았다. 바로 그 문을 통해 묵직한 자루를 배로 옮기고 노를 저어나가 죽음이 그물을 던지는 곳에 빠뜨렸던 것이다.
물은 이 지하 감옥의 성채 주변과 위쪽에서 그리고 바깥으로는 성벽으로 밀려와 철썩거리고 안으로는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진흙으로 더럽히고 있었다. 마치 성을 이룬 돌덩이와 막대기에, 막아야 할 입이라도 있는 것처럼 젖은 잡초와 쓰레기가 벽의 틈새를 메웠다. 비밀스러운 희생자들의 시체를 없애주는 매끄러운 길(잔인한 관리처럼 언제든 시체와 함께 움직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길)이 되어 주었던 물과 나의 이 꿈을 가득 채우며 흘렀던 물이 그때는 같은 물로 보였다.
궁전에서 거인의 계단이라고 불리는 계단(왕위에서 물러난 늙은 왕이 계승자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이 계단을 천천히 그리고 힘없이 내려오는 장면이 떠올랐다)을 걸어 내려온 나는 네 마리의 대리석 사자들이 지키고 있는 옛 무기고에 닿을 때까지 검은 배를 타고 움직였다. 어떤 사자의 몸에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말인지도 모를 글씨가 새겨져 있어 그 의미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었다.
이 도시의 영광은 이제 사라졌으니 배를 만드는 망치소리도 들리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일도 없었다. 도시는 이제 낯선 자들이 조타기를 잡고 낯선 깃발을 내걸고 있는, 말 그대로 바다 위를 떠다니는 난파선 같았다. 옛 수장이 대양과 하나가 되겠다며 당당하게 출항하던 화려한 바지선은 이제 이곳에 없었다. 거대한 도시를 회상하며 만든 조그마한 모형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바다나 땅 위에서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버린 위풍당당하던 배들과 거대한 기둥과 아치와 지붕들을 보다 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무기고는 지금도 남아 있었다. 약탈당하고 손상되었지만 무기고는 무기고였다. 생기 없는 상자 안에 투르크족에게서 빼앗아온 축 쳐진 사나운 군기가 보였다. 위대한 전사들이 입던 화려한 갑옷들도 보관되어 있었고 석궁과 화살, 화살로 가득한 전동, 창, 대검, 단도, 철퇴, 방패, 큼직한 날이 달린 도끼도 있었다. 용감한 말에게 덮어 씌워 괴물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던 단련한 강철판도 있었고, 독이 묻은 화살을 쏘아 소리 없이 적을 죽이던 용수철 무기(가슴팍에 넣어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다)도 있었다.
저주받은 고문 도구들이 가득한 상자도 보였다. 사람의 뼈를 꺾고, 조르고, 뭉개고, 짓이기려고 만든 무시무시한 도구들, 천 번을 죽을 듯한 고통으로 사람들을 찢고 비틀던 도구들이었다. 그 앞에는 살아 있는 죄수의 머리에 씌워 단단하게 조이고 짓누르던 철모 두 개도 보였고, 그 옆에는 죄수들을 고문하던 악마들이, 팔꿈치를 편하게 얹고서 그 안에 갇힌 가련한 이들의 통탄과 자백을 들을 수 있도록, 작은 손잡이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투구의 모습이 인간의 형상과 으스스할 정도로 닮아서(아파하고, 꽉 끼고, 고문당하는 얼굴의 형상) 안이 비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투구 안에 남아 있던 끔찍한 뒤틀림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배를 타고 풀과 나무가 있는 바다 위의 공원 혹은 산책로 같은 곳으로 노를 저어 갔다. 하지만 나는 그 가장자리에 닿자마자(꿈속에서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그 장소는 까맣게 잊고 찰랑거리는 잔물결을 따라 지는 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 앞에서 하늘과 바다가 진홍빛으로 물들고 뒤로는 도시 전체가 물 위에서 붉은빛과 자줏빛 광선으로 변하고 있었다.
놀라움으로 가득한 이 특이한 꿈속에서 나는 시간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낮과 밤이 존재했다. 해가 높이 떴을 때에도 등불이 흐르는 물에 비쳐 일렁일 때도 나는 물 위에 떠 있었다. 내가 탄 검은 배가 거리를 미끄러져 갈 때마다 출렁이는 물결이 미끌미끌한 담벼락과 집들에 부딪혀 철썩철썩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때로는 성당이나 거대한 궁전의 입구에서 배를 내려 방에서 방으로, 복도에서 복도로, 화려한 제단과 고대 유적들의 미로 속으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어딘가 무섭고 기괴해 보이는 가구들이 썩어 가는 방도 보았다. 변치 않는 아름다움과 감정, 열정과 진실과 힘으로 충만한 그림들도 보였다. 그림들은 수많은 망령들 사이에 서 있는 젊고 신선한 존재들 같았다. 그림들은 도시의 옛 모습과 그 미인들, 폭군들, 선장들, 애국자들, 상인들, 신하들, 신부들, 그 뿐만 아니라 돌덩이와 벽돌과 한데 뒤섞여 벽 위에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파도가 아랫부분까지 밀려드는 대리석 층계를 내려가 배에 올라타고 다시 꿈속을 돌아다녔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가다보니 가게에서 목수들이 대패와 끌로 작업을 하고 있고, 그들이 물위로 던진 얇게 깎은 부스러기는 마치 잡초처럼 한 덩이로 뒤엉켜 내 앞을 떠내려가고 있었다. 물에 오래 잠겨 있어 썩고 문드러진 열린 문들을 지나쳤다. 문틈으로 포도 덩굴의 초록색 잎사귀들이 하늘거리며 특이한 그림자를 인도 위로 드리우고 있었다. 우아하게 면사포를 쓴 여인들이 오가는 부두와 테라스를 지나쳤다. 포석과 계단 위에 거지들이 햇볕을 쬐며 누워 있었고 거지들이 어슬렁거리며 주위를 살피는 다리들도 지나쳤다. 높다란 집들의 높다란 창문들 앞에 아찔한 높이로 서 있는 돌 발코니 아래를 지나갔다. 모든 시대와 나라들의 기호가 뒤섞인(고딕 양식에서부터 사라센 양식까지) 작은 정원과 극장, 사당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들을 지났다. 높은 건물, 낮은 건물, 검은색 건물, 흰색 건물, 똑바로 선 건물, 비뚤어진 건물, 초라하고 웅장하고, 부실한 것 같으면서도 튼튼한 건물들을 지나쳤다. 서로 뒤얽힌 배와 바지선 사이로 이리저리 가다보니 마침내 대운하로 들어서게 되었다. 꿈속에서 나는 시끌벅적한 상점들 위로 다리를 오가는 늙은 샤일록(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옮긴이)을 본 것 같았다. 내가 꿈속에서 데스데모나(셰익스피어 희곡의 여주인공-옮긴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 격자모양의 차양 사이로 허리를 굽혀 꽃을 꺾는 모습도 보았다. 셰익스피어의 영혼이 몰래 이 도시에 들어와 사방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고, 대성당 바깥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앞의 봉헌 등불이 타고 있을 때, 나는 날개 달린 사자가 있는 드넓은 광장이 밝은 빛으로 가득하고, 광장을 둘러싼 상점들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꿈을 꿨다. 사람들은 화려한 커피 하우스(밤새 문을 닫지 않고 열어 두는 것 같았다)로 들어갔다. 청동 거인들이 자정을 알리는 종을 울리자 이 도시의 모든 생기와 활기가 이곳으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조용해진 부두를 따라 노를 저어 가다보니 뱃사공들은 망토를 덮어쓰고 돌바닥 위에 가로 누워 자고 사람들은 여기저기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물은 부두와 성당, 궁전과 감옥의 벽을 씻어 내리고 도시의 비밀스러운 곳들까지 밀려가며 늘 그렇게 가만히 움직이고 있었다. 물은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늙은 뱀처럼 도시를 굽이굽이 휘감으며, 자신의 지배자임을 자처하던 옛 도시 그 깊은 곳의 돌멩이 하나라도 누군가 쳐다볼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물은 나를 멀리 띄워 보냈고 나는 베로나의 오래된 시장에서 눈을 떴다. 그 뒤로 나는 물에 관한 이 이상한 꿈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도 그 도시가 그곳에 있을지, 그 도시의 이름이 혹시 베니스가 아닌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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