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뜻, 말, 벗
이 책은 근대적 주체, 곧 ‘나’의 탄생 시기인 바로크 시대를 배경으로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과 그 ‘친구’ 격인 책과 그림, 음악을 소개한다. 독자는 각 작품 속 특정 ‘순간’으로 바로 안내될 것이다. 그 ‘순간’들은 서구 근대의 단면과 그 실상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그 '순간'들은 지금, 여기까지도 파장이 미치는 지속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 17세기 서양 지성사와 문예사의 ‘순간’들을 되살린 것은 이 과거로의 여행 속에 현재와 미래에 던지는 올바른 질문들이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답까지 찾아주는 것은 인문학의 영역을 벗어난다. 그것은 실천과 실행의 영역에서 이득을 챙기는 나머지 모든 분야의 몫이다. 인문학은 물음을 탐구한다. 물음을 시도하는essayer 이 책은 몽테뉴적 의미에서 ‘에세이essai’다. ‘내 전공’인 영문학의 틀을 벗어나 다른 영역들을 넘나든 비교문학적 시도 또한 이러한 ‘물음’의 실천이다.
물음표는 당장 이 책의 제목 『바로크와 ‘나’의 탄생』에 붙을 것이다. 이 제목에 등장한 말들이 친숙해보이기는 하지만, 서로 무슨 관련이 있는가? 작품 속 ‘순간’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제목을 이루는 이 책의 키워드들을 어떤 뜻에서 쓰고 있는지 소개하기로 한다.
나
‘나’. 가장 쉬운 말부터 시작하자. 이 책에서는 가급적 ‘주체主體’란 말을 피하고 그 자리에 ‘나’를 사용할 것이다. ‘주체’가 유행하기 전에는 ‘자아自我’가 주로 사용되었으나 이 말도 결국 ‘나 자신’이란 말을 한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문학 담론이 꼭 어려운 추상적 한자어를 선호해야 할 이유는 없다. ‘주체’와 ‘타자’ 대신 ‘나’와 ‘남’이라고 한다고 말이 안 통하지 않는다. 또한 ‘주체subject’는 철학의 인식론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문학과 철학, 음악, 미술, 신학, 역사를 왕래하며 포괄적 의미에서의 ‘비교문학’을 시도하는 이 책에는 ‘나’가 더 어울린다. 물론 ‘나’가 모호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모호성은 포괄성의 다른 면모이기도 하다.
『햄릿』의 독백이나 대사에서 ‘나’를 지칭하는 단어로 가장 빈도수가 높은 것은 ‘I’이다. 이 책은 ‘주체’라는 위압적 문패를 책 제목에 걸어놓는 대신, ‘나’를 여러 갈래로 변주시킬 것이다.
햄릿
‘햄릿’은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유명하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유명한 작품 『햄릿』의 주인공. 그러나 이 책은 『햄릿』 해설서가 아니고 햄릿 또한 이 책의 주인공은 아니다. 다만 햄릿은 이 책의 중심축이다.『햄릿』에 나오는 몇 가지 주제에 따라 내용을 배열했기에, 『햄릿』은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주역들을 소개하는 ‘사회자’ 역을 맡는다. 이 책에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바흐의 베드로, 그리고 렘브란트, 데카르트, 몽테뉴, 파스칼, 세르반테스, 밀턴, 피프스 등 작품 속 인물과 창작자, 작가와 화가, 음악가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이름이 출현한다. 이들은 모두 햄릿의 ‘친구들’ 자격으로 등장한다. 이 점에 있어서 햄릿이 중심에 서 있지만, 동시에 이 ‘친구들’이 중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성은 아래에서 언급할 ‘바로크’의 핵심적 특징이기도 하다.
친구
‘친구’, ‘동무,’ ‘벗’은 우리말 용법에서는 일단 ‘말을 놓는 사이’다. 친구 사이라면 나이가 같거나 비슷해야 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친구’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란 의미가 첫번째이고, 두번째는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다. 가깝게 오래 사귀려면 나이 차이로 인한 위압감이 없어야 하니, 첫번째 정의도 사실상 동년배 가운데 오랜 세월 가깝게 지낸 대상을 지칭한다.
이러한 한국어 용법들을 염두에 두긴 했으나 영어권을 비롯해 서구에서 쓰는 ‘친구friend’의 의미에 따라 ‘햄릿과 친구들Hamlet and (his) friends’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장유유서가 없는 영어에서 ‘friend’는 같은 나이 또래의 친한 사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제법 차이가 나는 경우도 해당된다. 우리말로는 ‘지인’, ‘아는 사람’, ‘동료’, ‘선후배’ 등이 때에 따라 모두 ‘friend’가 될 수 있다. 또한 같은 편 내지는 같은 입장에 서서 돕는 개인 또는 단체도 ‘friend’일 수 있다.
‘햄릿과 (그의) 친구들’은 햄릿과 ‘같은 편’에 서 있는 인물들을 지칭한다. 어떠한 대결에 있어서 같은 편인지는 해당 장에서 규명하겠으나, 일단은 ‘집단이나 제도, 전통의 힘에 맞서서 근대적 개인의 중요성 및 존재감을 강조하는’ 진영의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햄릿과 (그의) 친구들’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비슷하고 친근한 사이’의 동질성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햄릿이 보여주는 바와 유사한 증상들을 데카르트나 몽테뉴, 피프스가 보여준다. 햄릿 및 셰익스피어와 나이, 세대, 국가, 언어가 다르긴 하지만, 또 ‘동무’나 ‘벗’은 아니더라도 이 ‘친구’들은 한 시대의 중심적인 대결의 장에서 같은 편에 서 있는, 같은 성향의 ‘friend’이다.
바로크
사전적 의미에서 ‘바로크’는 ‘르네상스 전성기가 지난 후’의 양식이다. 이 책에서도 일단 ‘바로크’는 ‘르네상스가 지난 후’로 이해한다.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이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활동했으니 15~16세기 르네상스 전성기 이후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가 단순한 시간 개념일 수는 없다. ‘르네상스’는 19세기에 와서야 특정 시대의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쥘 미슐레가 『프랑스사』 제7권에서 요약한 대로, 이 시대의 핵심 특징은 “세계의 발견과 인간의 발견”이다. ‘신대륙’들을 발견하고 세속적 인간의 재주와 능력, 아름다움, 고귀함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르네상스를 보다 구체적인 시대개념으로 확정한 사람은 이 말을 서구미술사에 적용한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이다. 그는 ‘세계’보다는 ‘인간’을 강조하며 ‘개인주의’를 르네상스의 ‘정신’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시각은 이후 논의들에 전수되었다. ‘개인’을 중시하기는 20세기 말 ‘신역사주의’도 마찬가지다. 이 유파의 대표 논자인 스티븐 그린블래트는 ‘나’를 다양한 방식으로 ‘권력’과 연관짓는 ‘자아 만들기self-fashioning’로 르네상스를 이해한다. 그의 시각은 ‘개인’에 대한 입장이 다르긴 해도, 부르크하르트가 깔아놓은 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표현을 쓰고 어떤 점을 강조하건, 르네상스를 논할 때 이 시대를 계몽주의, 자유주의, 기계문명, 과학기술, 세속주의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문명의 시작점으로 이해한다는 점은 공통분모이다.
그런데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에 포함되는 16세기에 또다른 ‘발견’이 있었다. '세계'도 '인간'도 아닌 특별한 책, 기독교 경전의 (재)발견이 그것이다. 천 년 넘게 내려온 유럽 중세교회의 관습, 전통, 교리를 ‘미신’이라며 거부하고, ‘오직 성서만으로solo scriptura’의 구호를 들고 일어선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에서 성서는 그 근거이자 무기였다. 루터 또한 ‘인간’을 발견했지만, 그 인간은 능력 있고 자족적이고 세계의 중심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발견한 인간은 약 1100년 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발견한 인간, 즉 원죄로 인해 타락한 존재이며,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만sola gratia'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루터보다 20여 년 후에 태어난 장 칼뱅(1509-1564)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구원은 ‘창조 전’에 예정된 하느님의 절대주권 사항으로, 인간의 노력이나 미덕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이 발견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로 망가지고 갈라진 ‘문제아’로서, 그가 구원에 이를지 여부는 전혀 불분명했다.
루터와 칼뱅 둘 다 교회의 중개 역할을 거부하고 개인이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구원받는다는 시각에 있어서는 인간 개인의 주체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어느 정도는 르네상스의 ‘개인주의’와 통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근본적인 인간관에 있어서 르네상스가 탐구하고 탐닉한 ‘인간’과 ‘개인’의 아름다움, 미덕, 고귀함 따위와는 정반대 입장에 서 있었다. 믿음과 구원이 개인의 몫이자 과제가 되면서 교회의 예배의식과 사제의 중재자적 역할은 폐기되거나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발견한 개인은 근본적으로 타락한 죄인이었기에 삶과 죽음, 죄와 구원의 문제에 직면한 ‘나’의 형편은 개혁 이전 중세교회 안에 있을 때보다 행복해졌다고 할 여지는 많지 않았다. 개인이 교회의 관습과 간섭에서 자유로워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 대신 이해할 수 없는 절대자를 믿거나 안 믿는, 구원에 이르거나 못 이르는 중대한 문제를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힘겨운 상황에 봉착했다. 성례식이나 성물, 면죄부, 성인들의 효험이 '나'를 구원할 것인가?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종교개혁의 이러한 문제제기를 무시할 수 없었다. 로마 교회도 거의 20년 동안 이어진 트리엔트공의회(1543-1565)에서 루터와 칼뱅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찾느라 고심했다. 루터와 칼뱅을 지지했건 반대했건, 집단적 전통과 관습을 '미신'과 '우상'이라며 공격한 종교개혁은 ‘근대적 개인’의 외로운 홀로서기의 시발점이었다.
우리가 이해하는 ‘바로크 시대’의 ‘나’의 원형은 종교개혁이 만들어낸 ‘홀로 선 나’이다. 그 점에서 종교개혁은 ‘바로크’의 원천이자 시발점이다. 그렇지만 종교개혁 그 자체가 ‘바로크’인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은 신학 논쟁에서 시작해서 이를 지지하거나 반대한 군주들의 정치공학적 차원까지 얽혀 있는 매우 복잡한 역사이므로, 이 책에 필요한 세 가지 핵심만을 지적하자. 첫째, 이미 언급한 대로, 종교개혁은 교회의 전통과 권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또는 이를 거부한 '개인'을 만들어냈다. 둘째, 종교개혁은 교황에 대한 반항일 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종교적·정신적·문화적·예술적 우위에 반발하고 이에 도전하는 문화운동이기도 했다. 로마 시대부터 늘 ‘야만인’ 소리를 들었던 독일인들은 근세 시대 초기에 경제나 군사 차원에서는 아니라 해도 문화적으로는 이탈리아보다 뒤처져 있었다. 로마 교회와 라틴어 예배를 거부하고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해 독일어로 예배드리는 종교혁명은 다른 분야에서도 독일어와 독일적 정체성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로, 종교개혁은 ‘독일제’ 테크놀로지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독일인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루터의 선동적인 책자들이 독일어권 전역에 급속도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개혁종교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독일인이 아닌 프랑스인 칼뱅이었고, 칼뱅이 해석하고 규정한 개신교가 프랑스는 물론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폴란드, 헝가리 지역까지(그리고 20세기에는 한반도에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나 종교개혁 및 개혁종교는 16세기 독일 특유의 정신적·정서적 분위기가 그 근간에 깔려 있다. 이 요소들이 ‘바로크’로 지칭할 수 있는 시대, 사상, 태도, 입장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독일적’ 분위기는 무엇을 지칭하는가? 그 대답으로 두 유대계 독일인의 분석을 소개한다. 먼저 히틀러 시대에 미국으로 망명해서 활동했던 미술사가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바로크란 무엇인가?」에서, “이교도적 아름다움과 기독교적 영성” 사이의 긴장이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대가들에게서는 조화를 이루고 있으나, 둘 사이 갈등의 소지는 늘 있었기에, 그 갈등이 도지고 균형이 깨진 결과 바로크로 이행했다고 한다. 바로크는 이교도적 조형문화와 기독교적 내면세계처럼 서로 객관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힘들의 긴장을 “강렬하게 감지하면서” 이를 주관성 속에 “자유의 정서”로 통합한 예술이라고 파노프스키는 분석한다.
파노프스키는 대립의 긴장보다는 이를 극복한 ‘낙관적’ 생명력을 바로크의 핵심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벨리니의 조각을 비롯한 이탈리아 예술가들에는 잘 들어맞는 분석이다. 파노프스키는 미술사에서 바로크가 엄밀히 따지면 이탈리아에만 적용되는 현상이고, 그 역사적 계기는 반反종교개혁이라고 한다. 반종교개혁의 원인이 종교개혁이었으니, 바로크의 계기가 종교개혁이라고 하든 반종교개혁이라고 하든, 그 의미는 별 차이가 없다. 또한 벨리니의 조각들은 ‘바로크’(이 말은 ‘거칠고 조야한’이라는 뜻의 ‘barroco’에서 왔다)하다기보다는 지극히 세련되고 아름답게 이상화된 르네상스적 형상들이다. 오히려 ‘바로크’는 독일발 종교개혁이 침투하지 못했고 르네상스의 위세가 사실상 꺾인 바 없는 밝고 화창한 이탈리아보다는, ‘다시 살릴’(‘re-naissance’는 이탈리아어 ‘rinascimento’를 프랑스어로 옮긴 것으로, '다시 태어남'이란 뜻이다) 조형예술의 가시적 유산이 없기에 기독교적 영성이 우세할 수밖에 없었던 북부 유럽의 음울한 날씨에 더 어울리는 현상이다. 파노프스키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탈리아 미술사 밖에서도 ‘바로크적’ 요소들을 발견한다. 그는 바로크를 근대의 출발점으로 지목하면서, 데카르트의 서한들이 “감상성과 경박성이 바로크적으로 뒤섞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거나,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현실의 겉과 속 사이의 괴리를 간파하면서도 “이에 대해 분개하거나, 그 흉악함과 크고 작은 해악과 아둔함에서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것을, 객관적 모순과 대립을 주관적으로, 즉 ‘바로크적으로’ “극복”한 예로 파악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파노프스키가 이해한 바로크 개념을 따른다. 즉 '바로크'란 갈등과 모순, 괴리를 봉합하지 않거나 못하며, 대립의 양태를 그대로 사유하고 형상화하여 ‘나’의 시각에서 주관적으로 해결하는 태도, 입장, 전략을 지칭한다. 반면에 우리는 파노프스키 등 미술사가들과는 달리 바로크를 철학, 사상, 문학, 음악, 역사 등 다른 영역에 걸친 현상으로 파악한다.
두번째 유대계 독일인은 파노프스키와는 달리 미국으로 망명하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바로크 시대의 상황을 ‘어중간한 혁명’으로 규정한다. 기독교의 권위가 확고했던 시대, 그 틀 안에서 세속적 저항과 탈출을 시도했기에 “직접적 표현”의 방법을 전혀 찾지 못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신 “세상을 구름 낀 하늘로 덮을 뿐”이었다고 한다. 바로크 세계의 하늘을 덮은 구름은 개인의 죽음과 역사의 종말을 암시하는 구름이다. 르네상스는 성과 속, 하느님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상정했기에 종말을 걱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화를 교회의 권위가 보장했기에, 교회를 뒤흔든 종교개혁은 바로크의 ‘구름’을 만들어낸 주범이자 원인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벤야민도 바로크 시대 독일 극작가들이 루터교도들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한편으로는 현세와 인간의 능력 및 행위에 대한 루터식의 거부,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현실을 부인한 자리에 남은 ‘공허함’의 이분법만을 바라보고자 한다.
이 책이 파악하는 ‘바로크’는 벤야민과 달리, 그 대립항의 한쪽을 현실에 참여하면서도 현실의 모순이 야기하는 환멸과 공허함의 정서로, 그 반대편은 절대자 하느님, 영원과 초월의 세계에 대한 믿음 및 희구로 설정한다. 바로크 시대인 17세기는 우리가 아는 세속적 ‘근대’의 요소들이 거의 모두 태동했던 시기였지만, 동시에 믿음과 영성, 영혼, 구원, 심판, 내세 등 기독교적 사유방식이 (신학 논쟁에 목숨을 걸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 숨쉬던 시대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작가, 사상가, 작곡가, 화가 들은 이 양자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가운데 어느 한쪽에만 안주해서 손쉬운 해답을 찾지 않은 갈등의 용기와 대립의 정직함을 공유한다. 정치, 경제, 과학, 철학, 예술, 일상생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과감한 변화와 혁신이 진행됨과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헌신과 개인적 신앙 체험을 열정적으로 추구한 것이 이 시대의 모습이다. '바로크'의 가치는 바로 이 두 축 간의 갈등과 대립에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바로크는 새롭게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이성과 영성, 순간과 영원 사이의 대립과 충돌의 에너지를 그대로 보존했던 바로크. 이렇게 이해한 바로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질 들뢰즈가 선택한 라이프니츠가 아니라) 파스칼, 과학혁명을 선두에서 이끌었으면서도 동시에 강렬한 종교적 사색을 남긴 파스칼이다. 이 책에서 떠올리는 바로크의 이미지는, (들뢰즈가 주장하듯) ‘순환’과 ‘과정’, ‘운동’이 맞물린 ‘주름pli’이 아니라,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이다. 갈대는 서 있으나 움직인다. 갈대가 움직이는 것은 자기 안의 동력 때문이 아니다. 자신을 초월하는 힘, 바람이 갈대를 움직인다. 갈대는 바람으로 살아나고 바람은 갈대 속에 살아 있다. 갈대와 바람을 동시에 보고 듣는 다성음악의 이중성, 그 긴장의 유산은 지금 우리에게도 자양분을 줄 수 있다고 믿기에, 이 책은 그 긴장을 체현한 17세기 인물들을 ‘햄릿의 친구들’이란 이름으로 다시 만나보고자 한다.
벗
이 책 제목에 포함된 ‘친구’란 말은 상징적 의미에서 ‘유사성’을 표현하려는 수사이다. 단지 '친구' 그 이상의 '벗'의 문제는 몽테뉴를 다루는 장을 제외하면 이 책에서 탐구하지는 않는다. 그렇긴 해도 ‘벗’에 대한 생각이 나에게는 절실하기에 ‘친구’ 외에 ‘벗’ 항목을 첨가했다.
햄릿이 시대와 상황을 잘못 만난 젊은이이긴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믿을 수 있고 존경할 수 있는 벗 호레이시오를 곁에 두는 복을 누렸다. 그에게 호레이시오는 동년배 대학 동기 그 이상이다. “내가 자네한테 무슨 이득을 바랄 거 없이 그대의 선한 정신 그 자체가 소득”(3.2.47-48)이 되는 인물이라며, “운명의 장난과 보상을 똑같이 담담히 받아들이”(57-58)는 차분한 성품의 소유자이자 “열정의 노예가 아닌”(62) 그를 햄릿은 “나의 소중한 영혼이 자발적으로 선택”(53)했다고 칭찬한다. 햄릿은 호레이시오에게도 소중한 벗이다. 햄릿이 죽어가자 호레이시오도 독을 마시고 따라 죽으려 한다. 햄릿은 그를 말리며 “그런 행복은 잠시 미뤄두고, 이 험한 세상 고통을 들이쉬며 내 이야기를 해주게”(5.2.326-328)라고 당부한다. 쓰러진 친구의 시체 옆에 서 있는 호레이시오, 벗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렇게 영원히 떠나간다.
참된 벗은 무대 밖 현실 세계에서도 너무 빨리 죽음에게 내줘야 하는 것인가. 몽테뉴를 다루는 장에서 언급하겠지만, 그의 참다운 벗 에티엔 드 라 보에시가 그러했다. “왜 내가 그를 사랑했느냐고 당신이 묻는다면, ‘왜냐하면 그였기에, 왜냐하면 나였기에’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말할 방법이 없다고 느낀다.” 이것이 몽테뉴의 설명 아닌 설명이다. 몽테뉴는 이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우정은 오로지 그 자체 외에 다른 추종할 이상이 없었고, 오로지 그 자체하고만 비교될 뿐이었다. 그 어떤 측면 하나, 둘이나 셋이나 넷이나 천 가지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의 정수를 한데 합친 것이 나의 의지를 사로잡았고 그것을 그의 의지 속에 빠트려서 거기에 녹아들게 했고, 또한 그의 의지를 사로잡아 내 의지에 빠트려 거기에 똑같이 동등한 갈급함과 열심으로 녹아들게 했으니…… 우리는 그 무엇도 함께 나누지 않은 게 없다. 그의 것과 나의 것을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우정에 대하여」, 1.188)
그토록 서로 잘 맞던, 둘도 없는 벗 에티엔은 일찍 세상을 떴다. 벗은 떠나고 몽테뉴는 글로 그를 기념한다.
물론 햄릿이나 몽테뉴의 우정 자랑은 다소 과장이 들어간 찬사들이다. 인간이 완벽할 수 없듯 벗으로 삼은 다른 인간도 완벽할 수 없다. 하지만 불완전한 ‘나’와 또다른 불완전한 ‘나’가 서로 이렇듯 하나로 녹아들어가 정신과 정서의 교감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내게도 그러한 벗이 있었다. 나 또한 그 벗을 갑자기 찾아온 죽음에게 빼앗겼다. 이 책을 쓰던 해에 잔인한 병마가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이제껏 내 모든 원고를 늘 가장 먼저 읽어줬던 벗, 광현의 빈자리를 이 긴 독백으로 메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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