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생명과 평화를 향한 집 짓기 - 고제순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보기
이야기를 돌려서 다시 집 자체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봅시다. 여러분, 집은 공간이지요. 그렇다면 그냥 물질로 이루어진 공간일 뿐인가요? 그렇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집도 생명체예요. 이렇게 얘기하면 의아하게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여러분, 생물 시간에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기준을 배우죠. 세 가지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생식 능력이 있으면 생물, 없으면 무생물이지요. 두 번째가 신진대사 능력입니다. 이게 있으면 생물, 없으면 무생물입니다. 또 하나는 진화 능력이에요. 진화 능력이 있으면 생물, 없으면 무생물입니다. 생각보다 간단하죠? 자,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집은 생명체(생물)다'라는 말은 틀립니다.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능력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위의 잣대로는 생명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관점을 바꾸어야 해요.
현대 생물학의 한계가 이것입니다. 생물학에서는 생물을 동물과 식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동물 중에서도 가장 진화한 존재로 인간을 놓지요. 생명에 위계질서가 만들어집니다. 맨 꼭대기에 사람, 그 아래 영장류, 그 아래 맹금류, 또 그 아래 초식 동물, 그 아래 식물, 무생물, 광물……. 이런 식으로 가요. 자연히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생명은 인간을 위한 도구적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이외의 생명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게 정당화돼요. 하등한 생명체를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지배하고 이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갖고서는 생명 세계의 본질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생명의 이치, 원리, 본질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 우주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새롭게 눈을 떠야 해요. 여러분, 요즘 '생태학'이란 말 많이 듣죠? 생물학과 생태학의 차이는 뭘까요? 간단하게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생물학은 특정 생물을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그것이 동물이면 동물학이 되고 식물이면 식물학이 됩니다. 거기에 반해서 생태학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여기서 '관계'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불교적 용어로는 '인드라망'이라고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겁니다. 이걸 함께 봐야 합니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본질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기운이라고 바꿔 말하면 이해가 쉬울까요. 지금 이 방 안에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가득 차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멘 가방, 앉아 있는 의자에서 나오는 기운들이 우주를 향해서 발산되고 있는 거예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옆 사람과 에너지가 상호 작용하면서 우주로 향한단 말이죠.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때로 그걸 감지하기도 해요. 누군가를 처음 만났는데, 그 사람에 대해 갖는 느낌. 아, 저 사람은 사귀고 싶고 친구 하고 싶다는 느낌이 생기죠?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내가 감지하기 때문에 호감을 느끼기도 하고,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는 겁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에너지가 나옵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는 겁니다. 현대 생물학적 관점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생명을 보따리 속에 꽁꽁 묶어 놓고는 전체를 볼 수 없어요. 거시적 관점, 생태학적 관점, 우주적 관점에서 생명을 다시 봐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어요.
여러분,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현대 생물학에서 말하는 식물, 동물 이런 개념 말고요. 주역에 '이간이천하지리易簡而天下之理'라는 말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쉽고 간단하나 그것이 곧 천하의 근본 이치니라.' 하는 뜻이 되겠죠. 바꿔 얘기하면 참된 이치란 쉽고 간단하다는 말이에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일수록 오히려 진리에서 더 멀어져 있다고 보면 됩니다. 가방 끈이 길다고 해서 박사, 교수라고 해서 진리를 더 잘 인식하고 깨달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가방 끈이 짧아도, 초등학교도 못 나왔어도, 누구나 쉽게 깨달을 수 있어야 그것이 참된 이치라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접근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물어 보겠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청소년: '살아 있는 것')
그렇죠. 살아 있다는 건 뭐예요? 모종의 에너지가 작동한다는 걸 의미하죠. 뭔가 꿈틀꿈틀 댄다는 겁니다. 그러면 돌은 생명체일까요, 아닐까요?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으니까 생명체입니다. 돌에 무슨 에너지가 있느냐고요? 겉보기에는 돌은 그저 죽은 물체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까요? 돌이 여기 있다고 가정해 볼게요. 우리 눈에는 분명히 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명체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고요.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돌을 구성하는 최소 입자들, 원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어요. 이 과정에서 에너지가 발생해요. 돌에 손을 대면 느낄 수 있습니다. 돌의 에너지, 기운을 느끼는 거예요. 차갑다, 따뜻하다는 촉감이 그것입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공간의 변화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어요. A라는 공간에서 B라는 공간으로, 장소를 옮겼을 때만 '움직인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고정관념입니다. 이걸 깨야 해요. 돌도 분명히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흙도 생명체입니다. 햇빛, 바람도 그렇죠. 그렇다면 제 앞에 있는 리모컨은 어떻습니까? 이건 생명체일까요, 아닐까요? 생명체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최소 단위 원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즉, 변화한다는 겁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제가 가진 물건들, 처음 샀을 때하고 지금하고는 다릅니다. 낡은 거예요.
집도 마찬가지예요. 집도 생명체라고 했죠?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만 눈에 띄지 않을 뿐이에요. 변화의 속도가 느릴 뿐입니다. 움직임의 속도가 느린 거죠. 그래서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존재의 세 가지 특성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뜻이에요. 즉, 영원불변하는 존재는 없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인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생명체가 사람과 같은 의식적 존재, 즉 영적 존재냐 아니냐 하는 겁니다. 저 돌이, 이 집이 영적 존재인가요? 아닌가요?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2강 우리가 살아온 집, 우리가 살아갈 집 - 서윤영
한반도 집의 역사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집의 역사를 간략하게 말씀드려 볼게요.
한반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주거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 그러니까 기원전 50세기 무렵 신석기 시대 움집이에요.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있는 선사 시대 주거 유적지가 그렇습니다. 땅을 50~60센티미터 정도 파서 바닥을 다지고 그 위에 지붕틀을 얹고 거적을 덮어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듯하다는 장점이 있어요. 예전에는 집안에서 불을 피우기가 어려워서 난방이 가장 중요했거든요. 실험에 의하면 이러한 반지하 움집은 한겨울에도 실내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해요. 이렇게 겨울에도 따듯한 집에서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어 음식, 특히 곡식을 저장하고 살았어요, 이때부터 농경을 시작했거든요. 이러한 형태가 청동기 시대까지 계속되었을 거예요, 그러니 단군 할아버지와 웅녀 할머니도 아마 이런 집에서 살았겠지요. 북쪽이니까 겨울 대비가 중요했을 거예요.
철기 시대에 이르면 땅을 파지 않고 집을 짓습니다. 또한 벽체와 지붕이 분리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집 모양'이 나옵니다. 더 이상 어둡고 습기 찬 지하 움집에서 살지 않게 된 거죠. 부여와 고구려, 가야와 신라 등이 철기 시대 국가들인데, 이 중 추운 나라인 부여와 고구려에서 맨 처음 온돌을 발명했습니다. 학계에 의하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온돌 유적은 알래스카 지역에서 발견되었어요. 때문에 온돌이 알래스카, 시베리아를 거쳐 부여와 고구려에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남쪽 나라인 가야와 신라에서는 마루가 발달했어요. 무덥고 습한 기후적 특성 때문입니다. 요즘의 원두막이나 정자와 비슷한 형태였어요. 바닥이 뚫려 있어서 바람이 시원하게 통했지요. 김해와 경주 등지에 가 보면 가야와 신라 시대의 마루 집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의 문화는 크게 남방 문화와 북방 문화로 나뉘는데, 주거 건축 역시 북방의 온돌 문화와 남방의 마루 문화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런데 백제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남하하여 세운 나라입니다. 이때 북방의 온돌 문화도 함께 내려와요. 그래서 현재의 경기도, 충청도 지방에도 온돌이 등장하게 됩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 문화를 지녔던 백제가 온돌이라는 독특한 난방 방식을 남쪽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고려 시대가 되면 남방의 마루와 북방의 온돌이, 한 지붕 아래 공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 주거 문화의 가장 독창적인 점은 마루와 온돌이라는 서로 다른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있다는 것이에요. 이게 고려 시대에 이루어져요.
우리가 전통 건축이라 하면 신라 시대의 사찰이나 조선 시대의 궁궐 등을 주로 다루지만 고려 시대 역시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어요. 초가삼간, 다시 말해 온돌과 마루, 부엌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한데 결합하는 시기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고려 시대 주거 건축은 충남 아산의 맹씨 행단이라는 집이에요. 고려 말 충신이었던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였던 맹사성의 집입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 우리의 전통 가옥은 더욱 발전하고 분화합니다. 집이 단순히 추위와 더위를 막는 수단에서 벗어나 윤리적 규범과 철학적 사유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지요. 조선 시대는 유교를 생활 원리로 삼았죠. 삼강오륜이 대표적입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것도 있죠. 다시 말해 남녀는 자리를 따로 해야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친애親愛해야 하고(마찬가지로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또한 친애해야 하겠지요), 또한 어른과 아랫사람이 구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원리들은 조선 시대 집의 형태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요. 조선 시대 사대부가에서 안채와 사랑채가 구분된 것을 보세요, '남녀칠세부동석' 하고 또한 '부자유친' 하려고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채에서, 어머니와 딸, 며느리는 안채에 함께 지내게 되어 있지요, '장유유서'를 지키도록 사랑채 안에서도 아버지는 큰사랑에서 아들은 작은사랑에서, 어머니는 안방에서 딸과 며느리는 건넌방에서 지내게 되어 있어요. 이런 집에서 살다 보면 정말 날마다 삼강오륜을 지키게 되겠지요.
서울의 사대부가가 이렇게 발달하는 한편, 지방에서는 각 민가가 지방의 특색을 살리면서 발달합니다. 함경도 집, 평안도 집, 강원도 집, 경상도 집, 전라도 집, 제주도 집이 각각 지역적 특성에 맞게 분화·발달하게 된 것이 조선 중기 이후예요. 한국민속촌에 가면 사대부가 외에도 제주도 민가, 함경도 민가 등 여러 지방의 집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울릉도 집, 본 적 있어요? 민속촌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상업이 발달하면서 한양에 상가 한옥이나 2층 한옥이 생깁니다. 대략 18세기, 19세기 무렵의 일인데, 이런 새로운 흐름은 불행하게도 19세기 말 외세의 침입과 함께 외국의 주거 문화가 들어오면서 급격히 사라집니다. 안타깝게도 그 기간이 너무 짧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적이 없어요.
1876년 개항이 시작되면서 원산, 부산, 인천 등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이른바 양관, 양옥이라는 외국의 집들이 몰려오게 됩니다. 세련된 외관에 위생적인 생활 등, 당시에는 선망의 대상이었고요. 일반 서민들은 그런 양식 주택들의 몇 가지 요소를 가져와 전통 한옥을 변화,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개량 한옥입니다. 지금도 가회동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지요.
이후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등 굴곡 많은 근·현대사를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주택도 많이 발전했고요. 앞으로 우리의 주거 문화가 어떻게 변화·발전해 갈지, 이제 그것은 온전히 여러분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상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4강 신문제 사회의 한옥 구조와 문학 작품에 반영된 우리네 삶의 풍경 - 이재성
자연의 일부, 서민들의 공간-초가
예전에는 모두가 건축가였어요. 건축가 없는 건축, 조형가 없는 조형 예술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지요. 인문학적인 소양도 없고, 경제력도 없고, 시간도 없는 서민은 자연의 일부처럼 살았어요. 초가는 우선 재료를 구하기 쉬웠습니다. 볏짚이나 진흙, 나무로 지었으니까요. 물론 서민은 돈과 인력과 시간이 있어도 와가를 짓고 살 수는 없었어요. 큰 나무나 기와를 얹어 집을 짓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거든요. 와가는 양반의 전유물이었어요.
초가는 지붕에 진흙을 올리고 볏짚을 여러 겹 덮어서 단열 효과를 높였다고 합니다. 지붕은 2~3년에 한 번씩 갈아 줘야 해서 너무 번거로웠는데요. 썩혀서 그대로 퇴비로 쓸 수 있는 점이 농부에게는 그나마 도움이 되었습니다.
서양식 주택이 석재를 써서 영원성을 추구했다면, 우리의 전통 가옥은 자연성을 중요시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 조상이 유난히 자연 친화적이라서 그렇게 되었다기보다는 주변의 환경과 생활 조건 때문에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겠지요.
초가의 공간 역시 와가처럼 열려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집은 대체로 발뒤꿈치만 살짝 들어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열린 공간이지요. 그러나 양반이 사는 와가의 '열려 있음'과 초가의 '열려 있음'은 개념이 다릅니다. 와가는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을 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는 어려운 구조인데, 초가는 문 하나만 열면 안과 밖의 경계가 없어지는 구조입니다. 아주 큰 차이지요.
싸리 울타리에 문짝 하나 달린 것이 대문인데, 봉당이라는 작은 마당을 지나면 작은 툇마루가 있고 바로 안방 문이 있는 집이 초가였지요. 게다가 문도 창호지 문이어서 안에서 하는 소리가 다 들려요. 싸리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을 지나 부엌, 안방, 건넌방이 일자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게 다입니다. 마루는커녕 사립문조차 못 달고 산 사람도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양반 집은 닫힌 구조로 사생활이 보장되었다면, 서민 집은 열린 구조로 사생활을 보호하기 힘든 구조라고 볼 수 있어요.
서민은 여유가 없다 보니 양반처럼 안채, 사랑채 구분해서 공간을 쓰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서민 계층에서도 남녀 차별은 여전해서 남성 어른은 독상을 받고 여자와 아이들은 같은 상에서 먹거나 바닥에 놓고 먹는 경우도 많았어요.
자~ 그럼, 집의 구조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문학 작품으로 넘어가 봅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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