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잔소리
1
문단의 작가가 세상을 뜰 때, 그의 사후 무덤가를 지키는 문하생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 마사오카 시키에게는 하이쿠 동인들이 있었고, 포에게는 보들레르가 있었으며, 살아생전의 도쿠다 슈세이에게는 나카무라 무라오가 있었다. 이들이 모두 이 사실을 입증한다. 작가들의 사후 명성이, 적어도 사후 삼십 년간의 명성이(여기서 굳이 삼십 년이라 함은 저작권이 남아 있는 기간이기 때문) 무덤가를 지키는 문하생들의 힘에 의한 것이라면 부하를 키우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물론 부하 역시 훌륭해질 법한 인물이라면 그 효과가 훨씬 더 커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누구나 훌륭한 인재를 문하에 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노 호메이의 문하에 아무도 없음을 보라. 사람의 일은 하늘의 뜻에 미치지 못하니 결국은 우연에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2
문단도 일개 사회일 뿐이다. 재능만 가지고는 문단의 걸출한 인재가 될 수 없다. 속세에서 성장해야 하니 말이다. 작가 누구누구는 속세의 인간 누구누구보다 나을 게 없다. 그런데도 무리 가운데 인간으로서 월등히 뛰어난 존재라고 하니 정말이지 박장대소할 노릇이다.
3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한 장에 몇 엔 몇십 전 하는 원고료 제도를 벗어날 수 없다. 많이 받고 적게 받음으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물론 불공평한 일이다. 이런 사회에서 태어난 소설가, 희곡가, 비평가 등은 우선 대량 생산을 버틸 수 있는 사업가적 능력을 지녀야 한다. 혹은 나가이 가후 씨 말처럼 부모 형제 처자식을 봉양해야 하는 사람은 글 쓰는 직업에 종사해선 안 된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늘그막에 문필이 점점 더 훌륭해지니 젊은 작가와는 비교도 안 된다는 말 따위는, 그저 사업가적 능력이 출중하고 패거리 가운데 뛰어난 작가라는 뜻일 뿐이다. 실제로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 많은 것들이 다 썩어 문드러져서 진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런 무리를 가리켜 늙은 대가라 한다. 이 또한 박장대소할 일이다.
4
사회학자에 따르면 사회가 아무리 변해도 거지나 부랑자 같은 빈민 계층은 여전히 존재한다 한다. 이 같은 현상은 문단이라는 사회 안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 거장이 가고 저 거장이 와도 이름 없는 잡문가는 여전히 존재한다. 문단에서 진정으로 불후 불멸하는 것이 있다면 문단의 빈민 계급이리라.
5
여전하구나, 문단이여. 신세대니 구세대니 작가는 많은데 문단은 변화가 없다. 설령 사회주의 치하가 된다 해도 문단은 조금도 변하지 않으리라. 혹시 무정부주의 치하가 된다면 약간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1925년 8월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이 우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만 쓰라는 말도 아니다. 애초에 내 소설도 대부분 이야기를 갖추고 있다. 데생이 없는 그림이 있을 수 없듯 소설은 이야기 위에 세워진다. 여기서 이야기란 단순히 줄거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이야기가 전혀 없다면 어떤 소설도 성립할 수 없기에 나는 이야기가 있는 소설에도 존경을 표한다. 『다프니스와 클로에』 이래 세상 모든 소설과 서사시가 이야기를 토대로 지어진 이상 누가 이야기 있는 소설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담 보바리』도 『전쟁과 평화』도 『적과 흑』도……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소설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인은 이야기의 길고 짧음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야기가 기발한지 아닌지는 평가 범위 밖의 문제다. 알다시피 다니자키 준이치로 씨는 기발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많은 소설을 썼고, 그중 몇 편은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으리라. 다만 그 생명력이 꼭 이야기의 기발함에서 오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있든 없든 작품의 가치와 상관없다. 앞서 말했듯 이야기 없는 소설 혹은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이 우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소설도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이 그저 신변잡기를 묘사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소설 가운데 가장 시에 가까운 소설이며, 산문시보다는 소설에 가깝다. 세 번 반복하는데 이야기 없는 소설이 우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통속적인 흥미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가장 순수한 소설이다. 다시금 그림을 예로 들면 데생이 없는 그림은 있을 수 없다. 칸딘스키의 〈즉흥〉이라 이름 붙은 그림들은 예외. 그러나 작품의 생명력이 데생보다는 색채에 있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일본에 알려진 세잔의 그림 몇 점이 이 사실을 입증해준다. 이처럼 세잔의 그림에 가까운 소설에 나는 흥미가 있다.
그렇다면 세잔의 그림에 가까운 소설이 존재할까? 독일 초기 자연주의 작가들이 이런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내가 아는 한 근대에는 아무리 봐도 쥘 르나르밖에 없다. 가령 르나르의 「필립 일가의 가풍」은 미완성이 아닐까 얼핏 의심스러울 정도이나 훌륭한 관찰력과 예민한 감수성만으로도 성공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세잔을 예로 들자면, 세잔은 후대의 우리에게 수많은 미완성 그림을 남겼다. 미켈란젤로가 미완성 조각상을 남겼듯이. 다만 미완성이라 불리는 세잔의 그림조차 정말로 미완성인지는 의심스럽다. 실제로 로댕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에 완성이라는 명예를 부여했다! 그러나 르나르의 소설이 미켈란젤로의 조각이나 세잔의 그림과 같이 미완성이라는 의심을 받지는 않는다. 내 견문이 부족해 프랑스인들이 르나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르나르 작업의 독창성을 충분히 인정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세잔의 그림에 가까운 소설은 서양에만 있을까? 작가 시가 나오야 씨의 여러 단편, 특히 「모닥불」 이후의 단편들을 보자. 앞서 이야기 없는 소설은 통속적인 흥미와 무관하다고 했는데, 내가 말하는 통속적인 흥미는 사건 자체에 대한 흥미를 뜻한다. 나는 오늘 길가에서 인력거꾼과 자동차 운전사가 싸우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이 흥미로움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연극 속 싸움을 보며 느끼는 흥미와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연극 속 싸움은 내 신변에 아무런 위해가 되지 않지만 길거리 싸움은 언제 어느 때 위험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정도다. 흥미 위주의 문예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보다 한층 높은 차원의 흥미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흥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특히 다니자키 준이치로 씨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다. 「기린」의 처음 몇 페이지가 바로 그 좋은 예라고.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은 통속적인 흥미가 부족하다.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의미에서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이는 통속적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르나르가 그려낸 주인공 필립─시인의 눈과 마음이 그대로 반영된─이 흥미로운 까닭은 그가 우리 곁에 있는 한낱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통속적 흥미라 한다면 부정할 순 없겠지만 애초에 내 논점의 방향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시인의 눈과 마음이 그대로 반영된 평범한 사람’에 있다. 실제로 나는 이런 흥미 때문에 문예를 늘 가까이하는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 우리는 동물원에서 기린을 보며 경탄해 마지않지만 집고양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애착을 느낀다.
누구 말마따나 세잔이 그림의 파괴자라면 르나르는 소설의 파괴자다. 신성한 향로의 향이 나는 앙드레 지드도, 마을 냄새 풍기는 샤를루이 필리프도 인적 드문 덫투성이 길을 간다. 나는 아나톨 프랑스나 모리스 발레스 이후 작가들의 작업에 흥미가 있다. 내가 말하는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이 어떤 소설을 가리키는지 또 내가 왜 이런 소설에 흥미를 갖는지에 대한 답변은 이 글 속에 들어 있으리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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